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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Oct 28. 2021

뤄양, 고도(古都)의 속삭임

롱먼 석굴과 향산

아침 햇살에 21층 객실 통유리창 밖 뤄양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있다. 이번 출행의 숙소로 정한 정승만려 호텔(正升万丽酒店)에 딸린 26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사방이 툭 트인 평원에 우뚝 서있는 호텔 유리창 밖으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반듯한 건물들과 도로가 한눈에 굽어 보인다.

황허의 지류인 뤄허(洛河) 유역에 위치하는 뤄양은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로 BC 11세기에 주(周) 성왕(成王)이 동방 경영 기지로 축성한 곳이라고 한다. 그 후 동주(東周) 후한(後漢) 위(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후당(後唐)의 수도가 되었고, 수당(隋唐) 때에는 장안의 부도(副都)로서 번영했다고 한다. 지금은 성도인 정저우와 함께 허난성의 2대 공업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지만, 상하이 천진 선전 등 동부 연안 선진 도시들에 뒤쳐져 낙후된 모습이 여실하다.

식당 안 단체여행을 온 아주머니들의 떠들썩한 수다 소리가 아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대부분 60 전후 나이로 보이는 저분들은 가을 추수를 끝내고 한 해의 고단했던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려 버스를 대절하여 나들이에 나섰을 터이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드는 중국인 단체 여행객

시골에 살 적 농번기와 추수를 마치고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경주와 속리산 두 번 나들이를 하셨던 돌아가신 모친의 빛바랜 사진 몇 장이 낡은 앨범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일흔다섯에 세상을 버리신 선친은 물론이요, 십일 년 후 선친을 따라가신 모친과도 제주도 여행 한 번 외에 별다른 여행다운 여행 한 번 모시고 다녀온 적이 없으니 막급한 회한을 감당할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택시로 롱먼 석굴(龙门石窟)로 향하는 길에 기사 아주머니가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아침에 바이마쓰(白马寺)를 찾아 가슴에 품은 기원을 풀어놓고 오후에 석양에 더욱 빛을 발하는 용문석굴을 둘러본다고 귀띔한다. 솔깃한 얘기에 잠시 흔들리던 마음을 타일러 예정대로 롱먼 석굴로 다잡았다.

성곽문처럼 생긴 용문고가(龙门古街) 입구로 들어서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음식점들이 즐비한 고가(古街), 수목과 괴석 등으로 잘 조성해 놓은 공원을 가로질렀다. 이내 넓은 바닥을 반쯤 드러낸 이허(伊河)가 눈앞에 나타나고, 강변을 따라 난 너른 도로가 롱먼 석굴로 인도한다. 동편 향산(香山) 능선 위에서 태양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햇살을 펼치고 있다.

허난성 낙양의 남쪽 14km 지점에 있는 롱먼 석굴은 북위~초당 시대의 불교 석굴군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이허(伊河) 양쪽의 서산과 동산 절벽 1km에 걸쳐 조성된 감실 2,345개 조상 11만여 존이 남아 있다. 막고굴, 운강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손꼽힌다.

얼마 전 허난성 지역에 내린 폭우로 인한 피해와 경기침체 회복을 돕기 위해 지방정부가 주요 관광지 입장료를 일정기간 면제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할당된 입장권이 소진되어 우리 일행은 입장료 90원을 내고 입구로 들어섰다. 개찰구에서 20여 분을 걸어 이허(伊河) 위를 가르지르는 롱먼 대교(龙门大桥) 밑 아치형 문을 지나 롱먼 석굴 북단으로 접어들었다.

용문고가(龙门古街) 입구(좌)와 연표(年表) 보도(우)


초입 잠계사(潜溪寺) 석불 앞에서 두 손을 모은채 연신 무릎을 돌바닥에 꿇으며 절을 올리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울먹이는 사연은 알 길이 없다. 평생 벼루고 벼루어 오던 순례지의 품속으로 들어 수십만 불상을 마주하니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병양 3동(賓阳三洞) 세 석굴 중 가운데 석불의 인자한 미소를 띤 불상 앞에서는 인터뷰가 진행 중이다. 양쪽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간 단아한 얼굴이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을 떠올리게 한다.

북동 석불은 팔을 치켜들고 검지와 중지를 가위처럼 펴고 있는 모습이 생소해 보인다. 좌측 남동 석불은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가 문소 황태후를 위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경선사(敬善寺) 석굴에는 규모는 작지만 완벽하게 구현된 석굴 내부 모습이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연상시킨다.

미륵불 사상이 융성하던 당나라 무주(武周) 시대 때 조성된 마애삼불감은 주불인 미륵불을 중심으로 삼신 좌불 사신 입불이 시립하고 있다. 평편한 바위 절벽에 입체적으로 미려한 불신 전면을 온전히 조각해 낸 석공의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앞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치켜든 사람들이 흡사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경배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불계를 펼쳐놓은 암벽과 이허(伊河) 사이로 난 보도 옆에 세워 놓은 이 지역에서 산출된다는 목단석과 매화옥이 한동안 눈길을 끈다. 매화석은 검은색 바탕에 백옥같이 흰 매화꽃이 내려앉은 듯하고, 매화옥은 작은 꽃잎들이 무성한 잎사귀에 묻혀 보일 듯 말 듯 비 온 후 꽃잎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진 듯하다.  


만불동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암벽에 부조된 불상들의 안면부가 대부분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벽에 새긴 높이 4cm 소불로 얼굴 모습과 자태가 제각기 다른 1만 5천 개의 불상 부조가 동굴 안 벽면을 빼곡히 채운 만불동(万佛洞)은 경이로울 뿐이다.


511, 512호 쌍굴은 당대에 조성된 것으로 북동에 삼세불, 남동이 미륵불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북위 효창 연간에 조성되었다는 연화동은 뒷 벽면에 석가모니불 입상 부조가 자리하고 천정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대형 연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애삼불감의 주불인 미륵불(좌)
롱먼석굴의 하이라이트 로사나대불

당나라 고종 무측천 때인 675년 낙성된 19번째 불동 봉선사동(奉先寺洞)에는 수많은 불상 군 가운데 가장 미려하고 모습이 온전히 보전된 높이 13미터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 있어 롱먼 석굴을 대표하는 하이라이트 지점이다. 중앙에 무측천의 화신으로 알려진 로사나대불이 앉아 있고 그 좌우에 가섭, 아난, 문수, 보리 등이 호위하듯 시립하고 있다.

약방동(药方洞) 고양동(古阳洞) 화소동(火烧洞) 등을 훑어보고 '팔작사 석장 10인'이라는 명문이 확인된 송대(宋代) 불사를 관장하던 팔작사에서 조성한 석굴을 지나자 어느새 석불군의 남단까지 왔다. 이허(伊河) 위에 걸린 만수교(漫水桥)를 건너 동산(东山) 기슭 강변을 따라 향산사로 걸어가면서 건너편에 펼쳐진 용문석굴의 파노라마를 천천히 한눈에 조망해 본다.

동산 기슭에 자리한 향산사는 북위(北魏) 때인 516년 건립된 고찰로 중국 유일의 여제인 측천무후 때 번성했으며, 안사의 난 이후 쇠락한 것을 후일 향산거사라 불린 백거이가 중건하고 이곳에 은거했다고 한다.

3세 때 출가하여 15세 때 도당(渡唐)하여 명승을 떨치고 후일 한국 유식종(唯識宗)의 종조가 된 신라의 고승 원측(圆测, 613-696)의 사리를 안치했던 사찰이라고 하니 우리와도 인연이 적지 않은 곳이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올라 소담한 남문으로 들어서서 고루 종루 자재원통(自在圆通) 대웅보전 장송별야(蒋宋别墅) 구로당(九老堂) 건륭어비(乾隆御碑) 삼성전(三圣殿)  등을 둘러보고 북문으로 나섰다. 강변 도로로 내려오는 길 계단 난간에도 남문 쪽 계단처럼 맹꽁이 석상이 군데군데 자리하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성싶다.

향산사 가는 길에 만난 현장법사 像
향산사의 고루와 종루
향산사와 이허(伊河)
백원(白园)의 백거이 묘소

향산사 옆 아늑한 안부에 백원(白园)이 자리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거이가 만년에 은거하던 곳으로 그의 행적과 영면의 안식처를 만날 수 있다. 백원의 형세는 여름엔 덥지 않고 겨울엔 웬만한 추위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은거처로 보인다.

평평한 비파봉 위에 낙천 백거이의 묘소가 자리한다. 지름이 10여 미터쯤 되는 무덤 주위를 시비와 각종 기념비들이 시립하듯 둘러서 있다. 그중에는 한국 백 씨 전국종친회가 1999년 세운 참배 기념비를 비롯해서 백거이가 16세 때인 787년경에 지었다는 <古原草 시제로 송별을 노래함>이라는 시의 시비도 눈에 띈다.


<賦得古原草送別> - 낙천 백거이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遠芳侵古道  晴翠接荒城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

언덕 위의 무성한 풀
해마다 한 번씩 자라고 스러지지만
들불에 타도 다 없어지지 않고
봄바람이 불면 또 생겨나지.
풀꽃 향기 멀리 옛길까지 번지고
맑은 풀빛은 거친 옛 성터까지 어리네.
다시 그대를 보내어 전송하니
우거진 풀처럼 이별의 정 가득하다네.


나라나 도시 또한 모두 한때 흥하고 융성해도 언젠가는 쇠락하여 망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진리던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뤄양의 위대한 역사를 지켜보았을 이허(伊河)는 말없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한 시대를 주름잡으며 위세를 떨치던 중원의 수많은 영웅호걸이나 절세가인들도 이곳 낙양성 북쪽 십리 밖 북망산(北邙山)의 높고 낮은 무덤이 되어 누워 있을 것이다.


<游香山龙门> - 장인산
临面香山之旅终
似伊河迷恋流淺
日斜道远心焦忙
因是羡慕君乐天

향산 여행을 마치려고 하니
이허 물처럼 미련이 얕게 흐르네
해 기울고 갈 길 멀어 마음만 분주하니
그대 백낙천이 부러울 따름이라.


마음속에 이는 감회 한 마디 읊으며 정오쯤 롱먼 석굴과 향산사를 뒤로하고 따처(打车)하여 백마사로 향했다.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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