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절(淸明節)이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절기답게 추위가 온전히 물러나고 천지에 생기가 가득한 봄날씨다. 집을 나서 신홍교중심화원(新虹桥中心花园) 공원을 가로질러 건널목을 건너니 71번 전차가 신호등을 기다리며 정차해 있다.
중국에선 청명절은 공휴일이라 집에서 멀지 않은 옌안시로(延安西路) 726호에 위치한 '상하이 양배명 선전화예술수장관(上海杨培明宣传画艺术收藏馆, Shanghai Propaganda Poster Art Centre)'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 수장관은 상하이 출신 양페이밍이 1995년부터 수집한 정치선전 포스터를 전시하기 위해 개인이 설립한 공간인데, 트립 어드바이저가 상하이 즐길거리 1,367개 중 7위에 랭킹 했고, 2014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모 국제 관광 웹사이트는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10대 박물관 중 하나로 선정했다고도 한다.
버스에서 내린 후 한 정거장 지나쳐 온 목적지를 향하여 거슬러 걸었다. 수장관은 위풍당당한 중국민생은행 건물의 7층 비즈니스 구역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복도를 따라가니 같은 층에 입주해 있는 여러 업체들의 사무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장관 유리문이 나온다.
이곳은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는다는데 입장료 25위안을 별도로 받고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다. 유리문 안쪽 탁자 앞 중년 여성에게 입장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서서 포스터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기로 한다. 개관 시각인 10시 전후라 그런지 관람객은 아직 나 혼자 뿐이다.
1913-1997년 기간 중국에서 제작된 포스터와 월간지 6천여 종을 소장하고 있고 타 지역 순회전시도 한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 전시된 작품은 그중 일부일 것이다.
맨 앞쪽에 마오쩌둥 인물화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글귀가 적힌 1979년작 대형(212 ×77cm) 포스터가 맞이한다. 그 옆에는 머리에 머플러를 하고 가슴에 중국 정부 휘장을 단 젊은 여성이 고속철도 그림을 배경으로 전진을 독려하는 모습을 담은 '고속도 전진(高速度地前进)' 표제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벽면을 따라가며 청대 사찰의 벽사(辟邪) 목판화, 중국공농홍군 깃발을 든 기수와 여군의 총검술 모습이 담긴 우산 등이 보인다. 전통 복장 차림의 55개 소수민족, 의용군행진곡 악보, 천안문, 동방명주 등을 배경으로 쑨원, 마오쩌둥, 덩샤오핑의 인물화가 담긴 포스터는 1999년에 광저우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전차, 모터사이클, 승용차, 마차, 행인 등이 등장하는 '상하이 난징루 풍경' 포스터 앞에 한참 동안 서서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옛 상하이의 모습을 어림짐작해 본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린 연단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이 담긴 '공산주의사업 분투' 제하의 포스터는 정치 선전화의 전형답다.
천안문 앞 개국대전에서 여자 군악대의 행진 모습을 담은 1950년 페이난(飞南)의 작품, 무장한 군인들이 뱃사공의 도움으로 거친 물결이 헤치고 용오름이 솟는 강을 건너는 '양쯔강을 건너는 백만 영웅(百万雄師下江南)' 제하 진랑(金浪)의 1949년 작품, 적을 추격하는 홍군 모습을 담은 자오왕윈(赵望云)의 1950년 작품, '인민해방군 환송, 타도 대만' 제하의 1949년 작품 등도 정치색이 붉게 묻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범한 일가의 행복한 일상 모습을 담은 작품이나, 조선족 등 26개 전통복장의 소수민족이 마오쩌둥을 중심에 두고 건배를 하는 모습을 담은 '중화각민족대단결' 제하 작품, 부녀자 셋이 방 안에서 군대에 보낼 군화를 꿰매는 작품 등은 그나마 살벌함이 덜해 보인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을 선언하는 '개국성전(开国盛典)' 제하의 작품은 1949년에 나온 것으로 포스터 속 열광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올 듯하다.
사무실에 딸린 탈의실처럼 구분된 별도의 작은 방엔 당시 유행하던 복장 차림의 신여성 전신사진을 담은 포스터들이 전시되어 있다.
상하이 대세계, 인쇄업체, 연초공사, 전지 제조창, 약국 등을 홍보하는 상업 광고 포스터에 여성의 사진을 넣은 것이다. 탤런트나 모델 등 젊은 여성 사진을 표지에 담았던 7~80년대 우리나라 잡지들이 오버랩된다.
잡지 부록으로 발행된 포스터, 1911-39년
1920-40년대 상하이에서 탄생한 '월분패 연화(月份牌年画)'류의 여인화
그중 와이탄 건물들과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는 황포강을 정치하게 그린 그림을 배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의 전신을 담은 '황포야월여인심(黄浦夜月女人心)' 제하의 포스터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구도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배드민턴, 평행대, 스케이트 타기, 싸이클링, 배구, 다이빙, 승마 등 건강한 남녀 학생들의 스포츠 활동 모습을 담은 포스터들도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득 학창 시절 귀에 각인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구호며 반공, 불조심, 교통안전, 절약, 호국보훈 등 각종 주제의 표어나 포스터를 의무인양 그려내던 기억도 소환된다.
'Modern sketch' 제하의 벽면엔 1911-1939년 기간에 '시대 아동만화' 잡지의 부록으로 발행된 포스터 열두 점이 점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대담하지만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젊은 여성의 나신을 담은 것들로 20세기 초 중국 작가들의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다.
1937-1949년 기간 중 발행된 것들은 군 홍보용 포스터가 대다수다. 군복에 목발을 짚은 군인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군중을 담은 1940년작 항일(抗日) 선전화가 보인다. 그 옆 국민혁명군 제3군정치국 발간 포스터는 일본 제국주의자에게 목줄을 잡힌 채 '북방인민'의 머리통과 무릎을 물어뜯는 두 마리의 개로 표현된 ‘동북왕(東北王)’으로 불린 군벌 장쭤린(张作霖)과 그의 협력자였던 장종창(张宗昌) 타도를 외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인 1949-1963년 기간 제작된 포스터들은 식량증산, 불법 간상(奸商) 타도, 반미, 국방강화, 노동절 경축, 국경절 열병식, 신 중국 건설 독려, 마오 주석 칭송 등의 내용이 담겼다.
1950년작 '모 주석 영명영도(英明领導) 하의 신 중국' 제하 포스터는 '항미원조' 깃발 아래 무장한 인민지원군 모습 등을 담아 우리 민족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중국 공산당의 시각으로 증언하고 있다.
1953년작 "각국 인민영유(各国人民领䄂)" 제하 포스터는 스탈린, 마오쩌둥, 호찌민, 김일성을 비롯해서 미국 프랑스 독일 체코 몽골 이태리 등 18개국 국가수반의 상반신 초상화를 담았다.
1953년작 '개국대전(开国大典)'은 마오쩌둥이 천안문에서 광장의 군중들을 내려다보며 중화인민공화국 개국을 선포하는 모습을 담았다. 5.4 운동 40주년 기념 1959년작 포스터는 "청년이 사회주의 건설의 첨병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변한다.
전시관에 딸린 기념품점과 양페이밍 옹
북 나팔 등 악기 연주에 맞춘 노질에 거친 물결을 호쾌하게 헤치며 나아가는 용선(龙船)이 담긴 포스터도 눈에 띈다. 용선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절약하자"는 의미의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의 슬로건 '다쾌호성(多快好省)' 글자가 적힌 돛을 달고 있다. 용선 옆에는 미국과 영국 국기 문양의 모자와 셔츠를 착용한 선원들이 탄 초라한 행색의 해적선을 대비해서 그려 넣었다. '다쾌호성(多快好省)' 슬로건이 제시된 해인 1958년에 제작된 포스터다.
마오쩌둥과 후르시초프가 악수하는 포스터에는 "중소인민단결 평화행복 보증(中苏人民团结紧和平幸福有保证)"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는다(自找死路)"는 문구를 넣은 1955년작 포스터는 미국과 대만의 조약을 비웃고 있다. 하나같이 자유진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적개심과 공산진영의 결속을 제창하고 있다.
악기와 춤으로 경축일을 축하하는 사람들,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운채 화려한 전통복장 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젊은 여인들, '곳곳에 두루 평화(和平共处)'라는 리본을 부리에 문 비둘기와 인민복 차림 중국인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악수하는 모습이 담긴 '세계 모두 우리 친구(我们的朋友遍天下)' 문구의 포스터, 생산을 독려하고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내용의 포스터도 보인다.
당시에는 모두 정치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표현 기법의 독창성과 미려함 등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곳 명칭에 '예술(Art)'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기실 전시작 중에는 민국시대의 유명한 상업미술가였던 한치잉(杭稚英, 1901-1947), 상하이 월간 브랜드 광고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중국미술가협회 상하이 지부 이사 등을 역임한 시에즈광(谢之光,1900-1976) 등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중국민들이 전통적으로 명절이 되면 게시하던 단순하고 강렬한 색채의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연화(年画)를 이곳 상하이에서 1920~40년대에 새로운 유형으로 탄생시킨 주인공들인 것이다.
* 연화(年画) 그림에 연월역표(年月历表)가 첨부되어 “월빈패 연화(月份牌年画)”라 불림.
시에즈광(谢之光)의 월분패 연화(月份牌年画)
지금과는 모습이 사뭇 다른 1956년 6월의 와이탄 모습을 담은 정치색이 없는 포스터가 눈에 띄어 반갑기도 하고, 구색 맞추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탈곡된 곡물을 토해내는 용의 머리에 올라탄 농군을 그린 1959년작 증산을 독려하는 포스터도 보인다. 1958년 농지 수자원 관리시설 건설이 대대적으로 추진될 당시 마오쩌둥이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사람이 많아야 역량도 크다(人口多 力量大)'는 말로써 증산에 필요한 노동력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포스터 주제와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1958년작 "15년 내에 영국을 뛰어넘겠다(十五年内赶上和超过英国)" 글귀가 적힌 백마를 탄 중국 청년과 검은 소를 탄 배부른 영국인 모습을 대비하여 배치한 포스터는 과단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대만 '해방'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1969년 작품은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작금의 정책 노선을 당시에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이 알곡이 풍성한 볏단, 배추, 옥수수, 완두콩 등 각종 곡물과 야채를 타고 하늘을 비행하는 '환호 농업 대풍년(欢呼农业大丰收)' 제하의 1959년작 포스터는 유치한 듯 부드러운 색감이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소련과의 우호와 프로레타리아 사상을 고양하고 부르주아 사상을 퇴출하자는 1965년작, 쿠바의 주권 침범에 반대한다는 1962년작, "전 세계 무산자 연합해서 일어나자(联合起来)"는 문구가 적힌 1968년작 포스터 등은 정치 이념을 같이하는 공산진영의 결속을 호소한다.
무산계급 혁명전사 레이펑(雷锋,1940-62)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1963년작, '우공이산 개조중국' 제하의 1971년작, 혁명위원회를 지지하는 내용의 1976년작 등은 공산주의 이념과 마오 사상을 선전하고 지지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 레이펑은 14세에 중국소년선봉대에 입대했고, 20세에 인민해방군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22세 나이에 군에서 사고로 사망한 그는 공산주의에 헌신, 당에 충성, 인민에 헌신 봉사 등의 행적으로 인해 정책적으로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오쩌둥(1893-1976) 사후 시기 포스터들의 주제는 혁명전통 계승(1984년), 미래의 소명(1980년), 우주여행(1979년) 등으로 이어진다.
1977년작 포스터는 마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화궈펑(華國鋒, 1931-2008)의 시대를 알리고 있고, '과학의 봄 도래' 제하의 포스터나 손오공과 어린이가 우주의 꽃밭을 거니는 '우주의 화과원(太空花果园)' 제하 1985년작 포스터는 이념의 색깔을 배제하고 과학 주도의 밝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특구 중국 개방의 문(特区中国开放的门)' 제하 1987년작 포스터와 '전면 개창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신국면' 제하 포스터에는 개방을 통한 도약을 도모하는 당시의 정책 노선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홍콩 회귀 일국양제' 제하 1997년작 포스터에는 천안문과 홍콩 섬 빌딩을 배경으로 등샤오핑 인물화를 넣었고, 마카오 반환을 경축하는 1999년 7월 작 포스터에는 정치인이나 정치적 문구가 없이 중국과 마카오 국기 비둘기 등이 담겨 있다.
넓지 않은 전시실의 작품들을 찬찬히 살펴보자니 세 시간이 훌쩍 흘렀다. 내 뒤를 이어 간간이 전시실로 들어왔던 외국인, 대부분 서구인 관람객들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모두 훌쩍 전시실을 빠져나가고 없다.
관람 중에 전시실 벽면 중간에 작은 창이 달린 문에 걸린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진이 든 액자가 눈에 띄었었다. 노인 한 분이 그 방에서 나오길래 말을 걸었더니 본인이 이 전시관을 연 장본인 양페이밍(杨培明)이라고 밝힌다. 나를 벽면에 걸린 사진 앞으로 인도하더니 1984년 우시의 골동품점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찍은 사진이라는 설명이다.
우측에서 좌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양페이밍
1946년 생으로 1995년경부터 정치선전 포스터를 수집했다는 노 수집가를 만난 것은 우연치고는 값진 행운이다. 당시에 제작된 대부분의 포스터들은 길거리 담장이나 건물 벽에 붙여 소진되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의 격차를 뛰어넘어 수 천여 점의 포스터들을 수집하기까지는 집요한 노력과 열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수집한 20세기 초반부터 등소평이 정치 포스터 제작을 그만두게 했다는 1997년까지의 포스터들에는 중국 현대 정치사, 문화사, 생활상 등 역사와 함께 작가들의 예술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시실에 딸린 기념품점에서 전시된 주요 포스트들을 담은 액자와 책자, 티 셔츠 등 기념품들을 둘러보고, "괜찮다(메이꽌시; 没关系)'라는 양페이밍 옹의 허락하에 몇몇 작품들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전시관을 뒤로하고 도보로 쟝쑤로(江苏路)와 화샨로(华山路), '화산녹지(华山绿地)' 공원 등을 거치고, 공용 자전거로 양자이로(杨宅路)로 이동해서 부근의 식당('粉家柳州螺蛳粉')에 들러 늦은 점심을 마주했다.
이 식당의 대표 메뉴로 보이는 '시그니처 달팽이 국수(招牌螺蛳汤粉)'에는 면 외에 유바, 새콤한 죽순, 목이, 두부, 다진 고기, 메추리알, 땅콩, 파 등 8가지 재료가 들어가고 국물은 뜨겁고 얼큰 매콤하다. 설명에는 없지만 식당 이름처럼 다슬기와 잘게 썬 소라 조각도 들어갔는지 입에 씹히는 느낌이다.
광시성 류저우(柳州) 지방의 가장 특색 명물이라는 '뤄스탕펀(螺蛳汤粉)'을 마주하니 단박에 그 비주얼과 맛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종종 이 식당 앞을 지날 때마다 젊은 손님들로 붐비던 까닭을 알겠다.
집에 머물면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하루가 지나갔을 터이지만, 상하이에서는 집밖으로 나서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볼거리 먹거리 등 즐길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바야흐로 좋은 계절 봄이다. 계절도 인생처럼 호시절은 빨리 지나가고 짧은 봄의 촌음도 아까우니 마음만 분주해지는 요즘이다. Lao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