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주말 아침이다. 지하철 15호선을 12호선으로 환승하여 티란루(提蓝路) 역에서 내렸다. '상하이 유태인 난민 기념관'을 둘러보려고 집을 나선 것이다.
녹음이 무성한 가로수와 도로 분리대 화단의 화사한 장미꽃이 오월을 알리고 있다. 도로변 작은 공원엔 수국이 진녹색 이파리 위로 탐스런 꽃송이들을 수북이 내밀었다. 차량 소음에 섞여 '꾸우꾹-' 들리는 비둘기 소리는 녹지가 많은 상하이에서는 별난 일도 아니다.
유태 난민 기념관에 도착해서 20위안을 지불하고 입구로 들어섰다. 아래 내용은 기념관 전시물, 설명문, 사료, 현지 검색엔진 등을 통해 파악한 내용을 정리해 본 것으로 자료마다 일부 차이점도 발견된다.
상하이 유태인 난민 기념관은 창양로(长羊路) 62번지에 위치한다. 1939년부터 상하이시 전역에 7개의 유태인 난민 수용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상하이 홍커우구 인민정부가 유태인 난민들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2007년에 옛 '모세 회당(摩西會堂)'을 기반으로 건립한 것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치의 박해와 학살을 피해 2만여 명의 유럽계 유태인들이 상하이로 피신했다. 기념관은 유대태인 난민들과 일제의 침탈에 시달린 상하이 시민들이 함께 서로 도우며 험한 세월을 건너온 생생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모세 회당은 상하이에 남아 있는 두 개의 유태인 회당 터 중 하나로 1928년 러시아 유대인들이 지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상하이 유대인 난민들이 종교의식을 거행한 장소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2007년 3월, 홍커우구 인민정부가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원본 건물 도면을 기반으로 전면 수리하여 당시 건물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전시관으로 들어서니 1층 현관에서 좁고 높은 계단이 2층으로 인도한다. 계단 위 천정엔 1993년 라빈의 모세회당 구지 방문, 1994년 난민기념관 건립, 1951년 중국거민협회 성립, 1943년 '무국적 난민 거주구역' 설립,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1938년 유대 난민 상하이 피난, 1938년 '수정지야(水晶之夜)', 1935 뉘른베르크 법안, 1933 반유태인 법안 발포 등 유태인들이 상하이에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된 역사적 사건의 연대기를 LED 등이 조명하고 있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나치당원 등 독일인들은 독일 전역의 유태인 가게를 약탈하고 시나고그에 방화를 했다. 이날 밤은 당시 유태인 상점 진열대의 깨진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가득 메워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후 본격적인 탈출이 시작되어 1938-1940.6월 중 1만7천여 명이 이태리,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북유럽 국가의 여러 항구를 출발하여 뱃길로 상하이에 도착했다.
뱃길 피난 항로는 함부르크, Trieste, 베니스, 제노나, 나폴리, 말타 등을 출발하거나 경유하여 수에즈 운하나 아프리카 희망곶 지나고 뭄바이, 콜롬보, 자바 싱가포르, 마닐라, 고베 등을 거쳐 홍콩, 상하이, 칭다오, 텐진, 대련 등에 이르는 멀고도 먼 고단한 행로였다.
1940년 6월 이태리가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해상 탈출로가 끊기자 유태인들은 시베리아 대륙을 건너고 중국 동북지역을 거쳐 1941년 6월까지 약 천 명의 유대인이 상하이로 들어왔다.
1941년 6월 독-러 전쟁이 개시되어 육로마저 차단되었는데 소련과 중국 동북 지역의 유태인 피난민 일부가 상하이로 왔고, 그 후 1941.12.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더 이상 상하이로의 유태인 피난민 유입은 없었다.
유태인 피난민들은 상하이뿐 아니라 카이펑, 홍콩, 하얼빈, 텐진 등으로도 유입되어 피난민 공동체를 이루었다.
북송 왕조는 수도인 개봉에 유태인들이 살도록 허락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전통을 지키도록 했으며 유태인들을 왕족 이름인 조(趙)로 칭했다. 명나라 때는 유태인 공동체가 번성하여 70개 성씨에서 73개 씨족으로 확대되어 500여 가구가 넘었다.
유태인의 홍콩 유입 배경은 1차 아편전쟁 후 1842년 맺어진 난징 조약이다. 조약에 따라 중국의 폐쇄 정책이 종식되자 사순 가문과 카두리 가문으로 대표되는 일단의 유태인들이 바그다드 등지로부처 홍콩으로 들어왔다. 1930년대 이후에는 반유대주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홍콩으로 피난한 유태인들이 유입되면서 홍콩의 유태인 공동체는 빠르게 확장되었다.
하얼빈에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 시베리아 횡단선의 연장선으로 중국동부철도가 완공된 후 많은 유태인들이 동유럽에서 중국 동북부로 이주하면서 건설 노동자들 중 많은 유태인들이 하얼빈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하얼빈에는 한때 최대 2만 명이 넘는 유태인이 살았고 사원, 쇼핑몰, 은행, 병원, 극장, 도서관, 담배 공장, 양조장, 자선 단체, 보험 회사, 출판사 등을 운영하며 완전한 유태인 공동체가 도시에 설립되었다.
아편전쟁 후 1860년 톈진이 강제로 개항된 후 유럽 각국의 상인들과 함께 유태인들이 톈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 1900년 톈진을 침공한 러시아 군대에 속했던 유태인들과 러시아의 10월 혁명 몰려든 피난민들 중 상당수가 텐진으로 유입되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이 발간한 '유태인 연감'에 따르면 1935년 톈진에는 약 3,5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념관은 교실처럼 길쭉한 장방형 2층 건물로 계단 위 2층부터 시작하여 아래층으로 되돌아 나오며 관람하도록 루트를 구성해 놓았다.
첫 전시실 입구에서 1938-1940년간 비엔나주재 중국총영사였던 허펑샨(何凤山,1901-1997)의 흉상과 그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 맞이한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치하에 들어가자 18만 명의 유태인들은 처형의 위기에 직면한다. 호펑샨은 그의 동료와 함께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던 외국으로의 탈출을 돕기 위해 유태인들에게 중국행 비자 발급한다. 그 후 "생명의 비자"로 불리게 된 비자의 발급자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 2001년 이스라엘 정부는 호펑샨에게 '국제의인 의인장(义人奘)'을 수여했다고 한다.
자신이 운영하던 폴란드 군수공장의 유태인 1,100여 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낸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1908-1974)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전후 나치당원이자 군수품 제조업자로 전쟁 범죄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살아남은 유태인 근로자들의 진정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그로 인해 생명을 구한 유태인들이 쉰들러에게 선물했다는 금반지에 적힌 글귀가 마을을 울린다.
"한 사람을 구함은 세상을 구함이다."
리투아니아 Kaunas 주재 네덜란드 대리 영사 Jan Zwartendijk(1896-1976)는 1940년 7월부터 8월까지 유태인 난민 2,345명에게 네덜란드령 서인도 제도행 비자를 발급했다. 리투아니아에는 1939년 10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약 15,000명의 유태인 피난민들이 피신해 있었던 것이다.
카우나스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 스기하라 치우네도 1940.7-8월 말까지 수천 건의 일본 경유 비자를 발급하여 2,330명의 유태인 난민이 일본 북부 쓰루가 항으로 입국했다. 1941년 이들 중 약 1,100명이 일본을 떠나 북미와 남미, 약 1,200명이 상하이로 각각 떠났다.광기의 전란 시기에 몇몇 외교관이 처형의 위기에 처한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을 자유와 삶으로 인도한 것이다.
1943년 2월 18일, 상하이 주둔 일본 점령군은 "무국적 난민의 거주 및 사업에 관한 통지"를 공포하고, 유대인 난민 제한 주거지역을 설정하여 많은 유태인들이 지정된 주거 지역 밖에 있던 거주지와 직장을 포기해야만 했다.
복도를 따라 교실처럼 나란히 자리한 교다음 칸 전시실로 들어서니 "Bitter-sweet Memories"라는 표제처럼 상하이 유태인 난민들의 쓰디쓰지만 결코 잊을 수 없었을 당시 생활상을 조명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곤궁한 피난지에서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새 생명이 탄생하는 등 삶을 이어갔다. 더불어 기초 교육과 종교 직업 교육, 유대인 신문과 각종 잡지 발행, 유태인 클럽 구성, 연극활동, 미인대회와 체육대회 개최 등 디아스포라(Diaspora)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간 것이다.
그중에는 당시 상하이 거리의 삶을 붓으로 기록한 귀머거리 화가 데이비드 블루흐(David Ludwig Bloch)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1941년 한 청각 장애인 모임에서 Kessing이라는 중국인 소녀를 만나 첫눈에 반해 1946년 결혼했다. 그는 '인력거', '거지', '중국 아이들' 등 당시 상하이 구석구석 다양한 계층의 삶의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1942년 12월 상하이 태평출판사에서 <인력거> 등 그의 그림 60점이 수록된 앨범을 출판하기도 했다.
작은 가든이 딸린 커피숍 사진은 고난 속에서도 소소한 여유로 위로를 삼던 유태 난민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 준다. 1939년 상하이로 피난 온 유태인 루돌 프 모스버그 부부가 창양로(长阳路) 입구 작은 건물을 구입하여 '백마카페관(白马咖啡馆)'를 열어 유태인 난민들의 중요 한 일상 모임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201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복원한 백마카페관이 길 건너 난민 기념관 맞은편에 자리한다.
다음 전시실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되어 지리하게 이어간 태평양 전쟁의 역정을 담은 영상이 한쪽 벽면 전체를 길게 차지하고 있다.
1945년 7월 17일 밤, 미군 B-29 폭격기가 홍커우 한정 거주지역을 폭격했다. 일본군이 이곳에 태평양 일본전함에 작전을 지령하는 해군 지휘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 공습으로 난민 중 31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쳤으며, 중국인 사상자도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시물은 공습의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 협력하여 사상자들 구난에 손발 벗고 나선 중국인과 난민들의 인류애를 조명하고 있다.
전시실을 가득 채우며 반복 재생되고 있는 나나 무스쿠리의 노래 <오버엔 오버; Over and over>의 노랫가락이 감미롭다.
Over and over I whisper your name
Over and over I kiss you again
I see the light of love in your eyes
Love is forever, no more good-byes
_ 노래 <Over and over> 中
제2차 세계대전 중 약 600만 명의 유태인 살해되었는데, 상하이로 피난한 2만 명 중 1,700여 명이 전쟁의 포화나 질병 등으로 인해 사망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생존했다고 한다. 1945.8월 일본이 항복하고 그해 9월 3일 홍커우 유태인 지정구역은 정식 철폐된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대부분의 유태인은 귀국하고 1957년경까지는 약 100명의 유태인만 상해에 남았다고 한다.
이어지는 전시실에는 전후 생존자들이 전하는 상하이 난민 시절의 기억과 증언이 이어진다.
1938-1947년 피난지 상하이 훙커우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쇼샤나(R. Shoshana)는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쟈오창(趙强) 감독 다큐멘터리 <쇼샤나>에서 99세의 그녀는 지혜와 관용으로 전쟁 중에도 평화로운 피난생활을 할 수 있게 도움을 베푼 중국인에게 각별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1943년 모세 회당에서 처음 만난 샤피로(Szapiro)와 에블린(Eveline)은 1948.2.10일 같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011년 92세 할머니가 된 에블린과 그녀의 자손들이 담긴 사진과 결혼 당시 29세였던 에블린의 빛나는 젊음이 담긴 사진이 한 개인과 가족의 위대한 여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다큐처럼 인상 깊게 다가온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1938-1947년 기간 상하에서 피난생활을 한 HorstEisfelder(1925-2023)는 피난지 상하이 시절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중 1947년 초 유태인 피난민을 가득 태우고 미국을 향해 상하이를 출발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오래도록 눈길을 잡는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징용, 징병, 해외 독립운동 등 갖가지 사유로 일본, 중국, 만주 등지로 흩어졌던 동포들이 광복이 되자 귀국의 길에 올랐는데, 그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노래 <귀국선>은 당시고국으로의 귀환의 감격과 환희를 잘 담고 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_ 손노원 작사 <귀국선> 中
기념관 밖으로 빠져나오면 마당을 중심으로 모세 회당, 기념품점, 유태인 난민군 부조상, 그리고 '상하이 유대난민 명단 벽'이 자리한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유대인 난민 소냐(Sonja Mühlberger)가 수집한 당시 난민 1만 3천 명 명단을 2014년에 새겨서 세운 것으로, 2020년 기념관 확장 공사 완료된 후 명단 벽'에 오른 이름은 18,578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기념품점과 모세 회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1994년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가 기념관을 참관한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하이 국민의 탁월한 인도적 쾌거"라고 남긴 중국인에 대한 감사의 글이 모세 회당 옆 벽면에 새겨져 있다.
유태 난민 기념관을 뒤로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이곳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이 떠오르며 규모, 전시물, 관리상태, 방문객 등이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1919.4.11일부터 1945년 8월까지 상하이, 항저우, 쩐장,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양, 치장을 거쳐 충칭에 이르는 26년 4개월에 걸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대한 대장정이 제대로 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귀로에 오른다.
[에필로그]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난을 오기 훨씬 전에 상하이로 진출한 유태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 ‘사순(Sassoon)’과 ‘커두리(Kadoorie)’ 가문으로 상하이에서 강력한 유태인 제국을 건설한다.
사순 가문은 아편전쟁 결과 중국이 강제로 개항되고 아편 판매가 합법화되자 아편 사업에 뛰어들었다. 1850년 데이비드 사순의 둘째 아들인 일라이어스 사순이 상하이에 발을 디뎠고, 19세기 후반중국에 유입된 아편의 70%를 점한 사순 가문은 아편 무역으로 1억 4천만 냥을 벌었다고 한다. 이는 청일전쟁 당시 청조의 1년 예산 4천만 냥의 3배를 넘는 거대한 액수다.
인도에서 상하이로 가문의 거점을 옮긴 데이비드 사순의 손자 빅터 사순은 상하이의 부동산을 대량으로 사들여 상하이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평화(Peace) 호텔’의 전신 ‘캐세이 호텔’을 짓는 등 상하이를 현대적인 도시로 바꾸는데 일조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고 히틀러가 유태인을 추방하기 시작하면서 갈 곳 없는 유태인들이 피난처로 찾은 곳이 곧 사순 왕국이었던 상하이였다.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를 접수한 후 자본가 탄압, 외국 기업에 막대한 세금 부과,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 등을 버티다 못해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사순과 커두리 가문의 상하이에서의 영화는 막을 내린다.
* 조너선 카우프만의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원제 The Last Kings of Shanghai)> 내용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