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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ul 14. 2024

오봉산 오르며 지리산을 꿈꾸다

춘천 오봉산과 청평사


장마가 주춤거리며 잠시 물러난 주말이다. 일기예보를 주시하던 친구 M이 춘천 쪽으로의 산행을 제의해 왔다. 늘 산행을 같이하던 H 외에 B도 이번 산행에는 동행하기로 했다. 8월 초 네 명이 함께 하기로 한 이박삼일 일정의 지리산 산행에 앞서 준비물과 구체적 일정 등 산행계획을 조율하자는 의미도 부여했다.


암사역에서 M의 차량에 탑승하며 합류한 우리 일행 네 명은 미사대교를 넘어 덕소삼패를 지나고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따라 춘천의 청평사로 향했다. 화도와 서종대교를 지나 북한강을 건너고 자욱한 안개에 정수리 부분이 파묻힌 산군들을 스쳐 지나니 산수화 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 운치가 있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휴가철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가평 휴게소 주차장은 차량들로 빈틈이 없어 보인다.


배후령터널을 지나 청평사로 달리는 길 주변 산군은 여전히 안개에 덮여 있다. 산줄기를 휘돌며 구불구불 이어지던 길은 오봉산과 부용산 사이로 난 배치고개를 넘어서 청평사 주차장으로 인도한다. 소양강댐 쪽에서 유람선을 타고 소양호를 건너는 방법 외에 이 길은 청평사로 통하는 유일한 육로인 셈이다.


오봉산은 1봉부터 5봉까지 차례로 나한봉, 관음봉, 문수봉, 보현봉, 비로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전국의 여러 오봉산 중 산림청과 블*야크 지정 100대 명산에 속하는 산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오늘의 산행은 청평사주차장을 출발하여 오봉산 정상이자 1봉인 해발 779미터 비로봉에 오른 후 4~1봉을 거쳐 계곡을 따라 청평사로 내려서는 약 11km에 이르는 코스다.



오전 09:15경 주차장을 출발하여 계곡 위에 놓인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서 오봉산 줄기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했다. 해발 250여 미터에서 시작된 산행을 가파른 계단 경사길에 이어 머지않아 수직에 가까운 첫 암벽 구간을 내놓는다. 로프를 잡고 긴 암벽 위로 올라서니 해발 380미터로 고도가 100여 미터나 올라갔다.

 

이어지는 평탄한 능선이 갑자기 시작된 첫 번째 난코스에 미처 적응되지 못한 몸을 추스르고 가빠진 숨을 고를 여유를 준다. 층층 경사진 능선의 세 번째 암벽을 올라서니 정상에서 갈라져 뻗어 내린 산줄기들 사이에 아늑히 자리한 청평사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가 더욱 또렷하고 은은하다. 암벽 끝에 소양호를 둘러싼 산군을 배경으로 한 그루 고사목이 서있다. 껍질이 버껴지고 힘줄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모든 번뇌와 짐을 내려놓고 해탈한 듯한 모습이 자못 의연하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양호를 보면서 "한반도를 중국 길림성 쪽에서 바라본 형상"이라는 M의 말에 맞장구쳤다.  


대학시절 세불회 동아리 활동을 했던 B는 청평사 독경 소리에 맞추어 반야심경(般若心經) 첫 구절을 중얼거린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알려진 고행을 마다하지 않는 구도자처럼 우리도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는 심경의 마지막 주문을 갈구하며 이처럼 고된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산행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산행 중 시시각각 밀려드는 고통과 싸우거나 경이로운 자연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세상의 온갖 욕망을 잠시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내 안의 욕망과 관심이 투영된 이미지(相)일 뿐이다."

_한형조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일행은 산줄기 위쪽으로 멀찍이 사라져 보이지 않고 초입에서 만났던 노 부부 산객이 암벽 아래쪽에 모습을 보인다. 늑대 울음처럼 '우 우 우~' 목구멍에서 깊은숨을 토해내며 소리쳐 본다. 깊은 바닷속으로 잠수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서 숨비 소리를 토해 내는 해녀들처럼 계속되는 가파른 비탈에 지쳐 힘겨워하는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보려는 의도다. 어쩌면 능선에 올라선 노루가 길게 목을 뽑고 두리번거리는 것이나 늑대들이 우우하며 우는 것도 같은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는 억측스런 생각이 들었다.



힘겨워하는 몸을 채근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먼저 도착한 일행이 기다리는 소요대(逍遙臺)로 올라섰다. 머리에서 모자 창으로 스며든 땀이 아침 햇살에 겨울날 처마의 고드름이 녹듯 뚝뚝 방울방울 떨어진다.


소요대는 네댓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에 청평사가 한눈에 들어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 왔다고 한다. 그 가장자리 절벽에 위태하게 자리 잡은 소나무 가지에 '배꼽봉 688.4'라는 표지가 이 봉우리의 이름과 높이를 알려준다. 한편 안내문은 조선 전기 보우 스님이 이곳을 찾아 노래한 시도 한 수를 소개하고 있다.


봄이 깊어 꽃이 땅에 무늬를 놓을 때

소요대를 찾으니 산허리 쪽으로  

비틀어졌네

하늘이 푸르러 뜬 구름은 걷히고

산이 개어 묵은 안개가 사라지네

구천은 멀리 낮은 곳에 있도

삼신산은 아득하여 부르기 어렵네

한번 삭막한 참선의 적적함을 달래니

유유히 흥이 나 저절로 풍요로워지네

_ 보우 스님 <소요유적(逍遙遺寂)>


소요대를 뒤로하고 산정으로 향하는 길은 다시 암벽을 내놓는데 양쪽 암벽 사이 좁은 통로 위에 바위가 덮여 하늘로 오르는 터널처럼 생긴 구멍바위, 일명 홈통바위가 기다리고 있다. 몸을 한껏 수그리고 암벽에 박힌 디귿자형 철심을 밟으며 구멍바위를 통과하는 묘미가 색다르다.


뒤따라 홈통바위를 통과하는 산객에게 사진을 찍어 주었다. 소요대에서 만난 홀로 산객으로 우리 일행과 동일한 코스로 산행을 한다고 했었다. 본가인 전주에 멀리 떨어진 양구에서 업무차 거주하며 틈틈이 산행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산에서는 작은 친절과 배려에도 초면이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인 양 느껴지기 때문에 산우(山友)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홈통바위 통과하여 암릉 위에 올라서서 뒤돌아보니 탯줄을 너무 길게 자른 듯 멀직히 떨어져 앉아 있는 배꼽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요대에서 5봉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면 춘천소방서에서 세운 안내판이 지나고 있는 지점이 '오봉산 3 지점'이라 하고, 곧이어 이정표가 정상까지 '0.05km', 즉 지척인 50미터라고 알린다. 산행 두 시간 10여 분만인 11:25경에 해발 779미터 오봉산 정상에 올라섰다. 암벽과 가파른 계단 등을 수차례 오른 산행의 수고로움이 보람으로 바뀌고 성취감이 밀려들며 피로가 바람에 깨끗이 날려가 버린 듯하다. 각기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정상 표지석 옆에서 인증 숏을 남기는 여러 산객들의 뒤를 이어 우리 일행도 스마트 폰에 추억을 담았다.  


오봉산의 다섯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으니 앞으로 차례로 이어질 4~1봉까지의 산행은 특별히 힘든 구간이 없기를 기대하며 4봉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별다른 조망이 없던 5봉과 달리 능선은 툭 트인 전망을 한 번 내놓더니 암릉을 한 번 내려갔다 다시 올라서니 촛대처럼 높이 솟은 바위 꼭대기 틈새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데 그 옆에는 '청솔바위'라 표기된 번듯한 표지석까지 놓여 있다.


청솔바위를 지나 얕은 오르막을 오르면 4봉 정상까지 '50미터'라고 알리는 이정표가 4봉으로 인도한다. '0.05km', '50m' 등 짧은 거리임에도 숫자 5가 들어간 이정표가 많은 것이 '오봉산의 콘셉트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며 미소를 짓게 한다.  표지석 옆에서 인증 숏을 남기고 4봉을 훌쩍 스쳐 지났다.


뿌리를 드러낸 참나무 앞에 표지석이 자리한 3봉도 그냥 스쳐 지나고 느슨한 내리막길 능선으로 접어든다. 물에 풍덩 빠졌다가 나온 듯 온몸은 땀이 흥건하다.  

2봉으로 가는 길 중간 벤치가 놓인 널찍한 능선에 호젓한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허기를 달랬다. 바나나, 귤, 방울토마토, 견과, 떡, 주먹밥, 육포 등 각자 준비해 온 다양한 음식이 기운을 돋워준다.


마지막으로 남은 1봉으로 난 긴 능선은 사방이 고요하다. 들머리에서 1봉으로 오르던 길이 수차례 암벽과 마주하는 고행의 길이었다면, 폭신한 흙을 밟으며 걷는 숲이 무성한 평탄한 이 구간은 명상의 길이라 해도 좋을 만하다. 음식을 한 가지씩 비우다 보니 배낭 무게도 많이 줄어들어 어깨와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나한봉으로 불리는 오봉산 제1봉 정상이 대머리처럼 넓게 흙을 드러낸 채 우리를 맞이한다. 당초 팔봉산과 오봉산 1일 2산 계획을 결행했더라면, 이곳에서 0.3km 거리 지척인 배후령에서 시작하여 오봉산 1~5봉을 거쳐  배후령으로 회귀하는 및및한 산행이 되었을 것이다. 계획을 오봉산 종주 원점회귀 산행으로 바꾸어 청평사주차장에서 1봉까지 구간의 절경, 청평사와 청평사 계곡 등을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봉 바로 아래 능선의 청평사 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로 되돌아 내려와서 청평사 쪽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지루하게 느껴지던 급전직하 가파른 내리막길이 좁은 계곡을 내놓는데, 흐르는 찬물로 얼굴의 땀을 씻으니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이다.


청평사까지 2km 여 이어지는 긴 계곡이 시작된 지 약 300미터 지점에 서있는 이정표가 좌측 계곡 상류 440미터 지점에 오층석탑이 있다고 알린다. 힘겨워하는 B는 계곡에서 탁족을 하며 기다리기로 하고 나머지 일행 셋은 배낭을 벗어 놓고 오층석탑을 향해 계곡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기실 이 길은 척번대, 청평선동과 청평식암 각자, 진락공 세수터, 오층석탑을 거쳐 소요대로 올라가는 길로 가파른 경사를 다시 오르자니 곁다리 산행을 하는 기분마저 든다. 곳곳에 나뒹구는 단청 목자재와 기왓장이 주변에 나한전 등 건물 터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척번대(滌煩臺)는 길이 5.5m, 높이 3.3m의 큰 자연석으로 계곡 위아래 바위에 각각 '청평식암(淸平息庵)', '청평선동(淸平仙洞)'이라는 글을 새긴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처럼 많은 이들이 이곳을 수행처로 삼거나 찾아왔을 것이다.


암벽 앞 평탄한 공간에 자리한 오층석탑은 1978년에 청평사 주지를 맡았던 향봉 스님이 탑 아래 있던 적멸보궁과 함께 건립했다고 한다. 그 아래쪽 식암폭포 위의 계곡은 진락공 수도처로 계곡 암반을 움푹하게 파서 이용했다는 세수터도 또렷이 남아 있다. 이처럼 이자현(李資玄)이 머물던 흔적이 많은 것은 폐사되었던 청평사를 1068년 그의 부친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그 자신도 이곳에 은거하며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일 것이다.


B가 여유롭게 탁족을 하며 기다리는 계곡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다시 배낭을 메고 계곡을 따라 청평사로 향한다. 연이어 곳곳에 소를 내놓는 계곡의 초록색 이끼 낀 바윗돌을 밟고 건너며 고도를 낮추어 갔다. 이 구간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감상의 길'이라 이름해도 좋을 듯싶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계곡이 다시 나타나며 청평사 뒤쪽으로 인도한다. 고려 광종 때인 973년 승현(承賢) 선사가 백암선원(白岩禪院)으로 창건한 천년 고찰 청평사는 수 차례의 개증축을 거쳐 조선 명종 5년(1550)에 보우(普雨) 선사가 중창하여 청평사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회전문을 지나고 대웅전 마당으로 통하는  경운루(慶雲樓)의 2층 벽면에는 출가한 후 설잠 스님으로 청평사에서 세향원을 짓고 주석했다는 매월당 김시습, 이자현, 회전문을 건립했다는 보우선사 세 분의 초상화 액자 나란히 걸려 있다.



청평사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회전문을 나서서 계곡 옆길을 따라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그 길을 절반쯤 내려오자 '공주와 상사뱀' 조각상이 구성폭포 아래 탁족을 즐기는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한 넓은 계곡의 너럭바위 위에서 산객의 발길을 잡는다. 청평사 회전문, 삼층석탑, 영지(影池), 공주굴 등에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내용의 '공주와 상사뱀'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조각상 옆 안내문은 그 전설을 아래와 같이 들려준다.


"중국 당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사랑한 청년이 있었다. 태종이 청년을 죽이자 청년은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에 붙어서 살았다. 당나라 궁궐에서는 상사뱀을 떼어 내려고 여러 치료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공주는 궐을 나와서 방랑을 하다가 청평사에 이르게 되었다.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계곡물에 몸을 깨끗이 씻은 공주는 스님의 옷인 가사를 만들어 올렸다. 그 공덕으로 상사뱀은 공주와 인연을 끊고 회전문을 통해 해탈하였다.


이에 공주는 당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청평사를 고쳐 짓고 삼층석탑을 건립했다. 이때 세운 탑을 공주탑, 공주가 목욕한 곳을 공주탕,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난 곳을 회전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설은 집착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인간세상의 온갖 갈등과 고통, 그리고 공덕과 자비, 용서와 화해를 통한 구원의 방편을 은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거운 발을 이끌고 청평사에서 청평사계곡이 부용계곡과 만나는 합수점을 휘돌아 계곡 위에 놓인 출렁다리를 건너 청평사주차장까지 약 2km 거리를 걸어서 원점회귀 산행을 끝맺었다. 주차장 화장실에서 땀을 씻고 차에 몸을 실어 귀로에 올랐다. 중간에 소양강변에 자리한 '샘밭막국수' 식당에 들러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막국수는 메밀을 겉껍데기째 아무렇게나 맷돌에 '막' 갈아 국수틀에 넣고 눌러 뽑는 방식으로 '국수'를 내려 먹은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감자를 재료로 하는 함흥냉면과 달리 메밀을 재료로 한 국수로 찬 육수에 말아먹는 평양냉면과는 형제 격이라 할만하다.


막국수에 곰배령막걸리 한 병을 나눠 한 잔씩 걸치니 더 바랄 것 없는 산행 뒤풀이가 되었다. 산행의 감흥과 팔월 초 지리산 산행계획 등 얘기를 나누다 보니 M의 는 금세 서울 경계로 들어섰다.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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