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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인산 Jun 30. 2024

설악 공룡능선 번개산행

관문(關門)에 들어간 후 삼십구 년 여의 긴 항해를 마치고 어제 퇴임식을 가졌다. 포항에서 짐을 챙겨 칠백 리를 달려 집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거실은 펼쳐 놓은 짐으로 어수선한데 서둘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럴 의욕도 솟질 않는다.


오후에 P와 차를 몰고 속초로 향하고 있다는 B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새벽 설악산 소공원을 출발해서 공룡능선 코스 원점회귀 등반을 할 요량인데 함께 하자고 한다. 퇴임식을 한 지 만 하루 만에 뜻하지 않은 즉석 원정산행 제의에 망설이고 있는데, 아내가 딱히 해야 할 일도 없으니 다녀오라고 한다.


설악산, 그것도 험하기로 이름난 공룡능선을 이처럼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따라나서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학과 직장 생활을 같이 한 스스럼없이 막역한 오랜 친구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속초로 달려가겠노라 화답했다. 작년 팔월 말 두 해 반의 중국 주재관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후에 설악산 산행을 벼르고 있었던 터 이기도 했다. 서둘러 16:50 성남발 속초행 버스표를 예매하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터미널로 향했다. 주춤주춤 정체가 심하던 도로는 시내와 외곽순환로를 벗어나 서울양양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막힘없이 뚫렸다.


내촌천이 홍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화양강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던 버스는 두촌면에서 장남천으로 아름을 바꾸는 홍천강 강변을 따라 난 44번 국도를 타고 거침없이 달린다. 신남 인제를 지나 원통버스터미널에서 군인 병사 등 두어 명을 내려준 버스는 이내 속초로 향한다. 언북천의 지류인 북천을 따라 난 도로를 달려 미시령 터널을 지나면 곧 속초에 닿을 것이다. 시원스러운 동해 바다가 그리울 때면 매년 한두 차례 차를 몰아 달려가던 길이다.


속초버스터미널에 내려 설악산소공원 바로 아래 자리한 리조트에 도착하니 설악의 산자락에 안긴 마을은 온전히 어둠에 잠겼다. 친구들과 반갑게 악수했다. 햇수를 꼽아 보니 4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얼굴들인데, 어제 본 얼굴인 듯 편하고 반갑다. 슈퍼에서 산 컵밥으로 저녁을 대신하며 주고받는 대화가 개울물 흐르듯 쾌활하고 즐겁다. 그리 늦은 밤은 아니지만 내일 새벽 1시 반경 기상해서 새벽 산행을 하기 위해 그간 나누지 못했던 얘기는 내일로 미루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한 시 반경 일람 소리에 짧지만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서 각자 배낭을 꾸리고 즉석 팥죽으로 배를 채운 후 설악산소공원 주차장으로 이동해서 차를 세웠다. 권금성과 달마봉 등 좌우 산군에 둘러싸인 소공원에서 신흥사 쪽으로 난 길은 온전히 어둠에 묻혀 있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망망대해 쪽배처럼 외로이 떠있는 하현과 총총 빛나는 별들이 입에서 저절로 감탄과 웃음이 흘러나오게 한다. 은하수 흐르는 푸른 하늘에 쪽배를 저어가듯 걷는 길에 산바람이 시원스레 몸을 스친다.


동행은 '조계선풍시원도량설악산문(曹溪 仙風始源道場雪嶽山門)'이라는 편액이 걸린 산문과 신흥사 일주문 앞에서 랜턴 빛에 의지해서 산행 시작점 인증 숏을 남기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흥교를 건너 어둠에 고요히 묻혀 있는 신흥사를 비껴 지날 무렵 이정표가 비선대까지 2.3km라고 알린다. 쌍천 위에 걸린 설원교(雪源橋)를 건너자 계곡 물소리가 앞서간 친구들을 대신하여 동행하자며 소곤댄다.


마고선(麻姑仙) 등 신선들이 함께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는 와선대와 마고선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비선대(飛仙臺)는 어둠에 묻혀 있어 안내문을 랜턴 불빛으로 한 번 비춰보고, 친구들을 쫓아 03:20분경 본격적인 산행 기점인 비선대 지킴터를 통과했다. 마등령으로 오르는 길과 천불동 계곡으로 가는 길 중 오른쪽 마등령 쪽으로 길을 잡으니 다짜고짜 가파른 자연석 계단길이 시작된다. 마등령 삼거리까지는 3.5km 가파른 비탈길로 네 시간 전후의 힘겨운 산행이 될 것이다. 앞서 치고 나간 P와 달리 B는 출발 시 호기롭던 모습은 간데 없이 천천히 걷는 나와 보조를 맞춰 신발끈을 다시 조이고 간간이 물로 목도 축이며 고도를 높여 갔다.


길 오른쪽 200미터 지점의 금강굴은 어둠을 핑계로 건너뛰었다. 장군봉 아래 너럭바위 위에서 배낭을 내리고 아래쪽 긴 제방처럼 뻗은 능선 위에 높이 뜬 하현을 바라보며 잠시 바람에 몸을 맡긴다. 생애 첫 설악산 산행이라는 34세 동감 나기 산객 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파른 비탈은 자주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게 한다. 04:20경 바닥에 걸터앉아 붉은 기운이 완연한 속초 바다와 도시의 불빛을 조망했다. 동해바다의 도시 속초는 다양한 방향에서 설악의 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설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설악산 또한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다채로운 모습의 속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한다. 관계는 모름지기 이처럼 서로를 빛나고 돋보이게 하는 관계여야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 터이다.


계단도 없이 길이 험해지고 바다 위로  떠오른 붉은 태양이 아침노을을 바다 위 하늘에 낮게 드리웠다. 고도가 높아지고 좌우로 트인 능선을 지나며 공룡능선과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히 드러난 울산바위, 속초시와 넓게 펼쳐진 바다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등령 2 쉼터 고개에 올라서니 오른편에 보이는 도깨비 뿔처럼 우뚝 솟은 세존봉이  인상적이다. 돌이 쏟아져 내린 너덜길, 흙길, 비탈길 등 거친 길은 수목 사이로 공룡능선의 거친 골격과 근육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세존봉 아래 마등령 갈림길 1km 지점에서 배낭을 내리고 목을 축이며 잠시 다리를 쉬게 하는데 금세 땀이 식어 등짝이 서늘하다.


해발 1,129미터 능선 고갯마루를 지나 예상한 대로 오전 7시경 공룡능선의 기점인 해발 1209미터 마등령삼거리에 닿았다. 다섯 해 전 산행 때에는 한계령에서 출발하여 대청 중청 소청과 공룡능선을 지나고 이곳을 거쳐 오세암 쪽으로 내려갔었다. 앞서 일찌감치 올라와서 기다리던 P와 합류하여 배낭을 내리고 떡과 과일 등으로 아침을 들었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나한봉을 바라보며 그 우측 아래로 난 길을 따라 4.5km 길게 이어진 공룡능선 구간으로 들어섰다. 조망이 터인 능선마루를 지날 때면 우측으로 위용을 드러내는 용아장성, 좌측으로 우주선처럼 둥근 태양 아래서 햇빛을 반사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쌍천과 용촌천 등의 장관이 눈에 들어온다.


나한봉을 휘돌아 큰새봉으로 향한다. 암봉 아래 그늘이나 시야가 트인 공간마다 산행을 멈추고 쉬고 있는 산객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오르내리는 가파른 비탈과 너덜길 등 험한 등로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큰새봉 암봉 아래 암벽에는 산객들의 소원이 담긴 돌탑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산행 초입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산객 중 한 분은 에델바이스와 같은 속에 속하는 솜다리를 보았다고 귀띔한다.


큰새봉을 우회하여 지나고  바람이 좋은 능선의 너른 공터에 앉아 넉넉하게 휴식을 취했다. 큰새봉과 1275봉 사이에 V자 모양으로 능선 아래쪽으로 깊이 파인 지점에 우뚝 서있는 '킹콩바위' 근에는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산객들이 여럿 모여 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킹콩바위와 시원스레 펼쳐진 비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여러 장 남겼다.


1275봉으로 향하는 긴 오르막 경사진 자연석 돌계단길이 온몸의 진을 빼고 땀을 쏟게 한다. 돌계단에 앉아 날개를 활짝 펼친 모량새의 지나온 큰새봉과 우측 우뚝 솟은 1275봉을 차례로 올려다본다. 암벽에 드러난 부조처럼 기묘한 형상들을 두고 광어, 승천하는 용머리, 두더지 등 제각기 제 나름의 이름을 즉석에서 붙이며 서로의 동의를 구해보기도 한다. 1275봉을 비껴 지나면 급전직하 내리막길이다. 노인봉으로 가는 길목 바람골은 울산바위를 온전히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 이기도 하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시리다. 앞쪽 높이 솟은 노인봉 암봉 위에 어떻게 올랐는지 산객 한 분이 바윗돌처럼 서있다.


촛대바위를 지나자 거대한 고사목 한 그루가 흰 골격만 드러낸 채 비탈길 아래로 거꾸로 드러누워 있다. 어느 때 닥쳐온 폭풍설이나 거센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는지 오래도록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공룡능선 심벌 중 하나인양 예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인봉 쪽으로의 진행은 봉우리 우측 아래로 깊이 내려가서 우회하는 길로 내려간 만큼의 오르막을 다시 내놓는다.


온갖 고초를 다 이겨낸 노년의 인생처럼 수없이 많은 비탈길을 오르고 내린 끝에 노인봉 언저리에 올라섰다. 동해 방향으로 범봉 화야봉 왕관봉을 거느린 노인봉을 지나면 공룡능선의 절반을 넘긴 셈이다. 작스레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선 탓에 미처 챙기지 못한 스틱을 어제 저녁에 슈퍼에서 사서 챙긴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룡능선 구간의 마지막 고비인 신선봉으로 향하는 비탈길은 뒤돌아서서 지나온 여러 암봉들을 조망하는 즐거움을 준다. 신선봉 아래턱에 올라서니 전후좌우로 모여 있는 공룡능선의 여러 암봉들이 한 폭의 수려한 그림처럼 장관을 펼쳐 보인다. 가히 공룡능선 중에서 뷰 포인터의  백미로 꼽을 수 있을 듯싶다.


무너미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호젓한 숲길로 산새들이 유쾌한 노래로 반겨준다. 산객들 네댓 명이 숨을 고르며 쉬고 있는 무너미삼거리에서 휴식을 취한 후 오후 1시경 비선대 쪽으로 길을 잡아 1.8km 거리 양폭대피소로 향했다. 좌측에 신선봉 우측에 화채봉 능선을 두고 내려가는 길은 계속되는 내리막 비탈이다.


휴가차 한국에 왔다가 공룡능선을 찾았다는 프랑스인 젊은이는 우리 일행보다 훨씬 늦게 소공원을 출발했다는데 짧은 인사를 나누고 우리를 앞질러 금세 시야에서 멀리 사라졌다. 무너미고개 쪽으로 올라오는 산객 두 명은 발걸음이 무거워 보이고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필시 희운각대피소에서 일박 후 내일 아침에 대청봉에 올라 일출을 보려는 산객일 것이다.


한참만에 바닥을 드러낸 계곡 가까이로 내려서서 이백여 미터를 더 내려가니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계곡 옆 등받이 벤치가 놓인 휴게소가 눈에 띄어 반갑기 그지없다. 계곡 위 두 번째 철교를 지나는 길 오른편 삐쭉삐쭉 솟아오른 암봉들이 수많은 첨탑을 세워 놓은 듯 가관이다.


깊게 파인 암곡을 따라 실처럼 가는 물줄기가 길게 굽이치는 음폭포와 에메랄드 빛깔을 뿜는 소가 인상적인 천당폭포가 차례로 나타난다. 철계단에서 스쳐 지나는 젊은 외국인은 독일에서 왔다고 한다. 산행 중 만난 산객들은 주중이라 그런지 은퇴 연령 전후의 남성이 대부분이고 간혹 젊은 여성 산객과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B와 서로 페이스를 맞추기로 하고 쉬다 가다 쉬엄쉬엄 걷다 보니 시간은 늘어나고 지루함이 극으로 치달을 즈음 저 멀리 눈에 들어오는 양폭대피소 건물이 더없이 반갑다. 아끼며 목을 축이던 물도 동나고 없는데 먼저 도착한 P가 큰 생수 한 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화채봉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피소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간이 즉석 비빔밥으로 느지막한 점심을 들었다.


대피소를 뒤로하고 천불동 계곡을 따라 비선대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앞을 턱턱 막아서는 암봉과 암봉 사이를 휘도는 깊게 파인 계곡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양폭, 천당폭포 등  수많은 암봉과 폭포를 차례로 내놓는다. 지친 발걸음은 설악의 산악미를 한 곳에 집약하고 있다는 계곡을 지나면서도 그 경관을 음미할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끝이 없을 듯한 계곡길을 고도를 낮추며 내려가면서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산객들을 보면서 우리가 코스는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에 매달려 흐느적거리는 꼭두각시처럼 터덜터덜 지친 발을 끌며 걷는 B와 보조를 맞추며 비선대 지킴터를 지나고 신흥사를 거쳐 소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이처럼 긴 산행은 처음이라는 B와 함께 공룡능선 코스를 끝까지 완등하고 원점회귀까지 24km여를 장장 열대여섯 시간 만에 무사히 완주하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호기롭게 나선 이번 산행은 산행코스 정보, 랜턴 등 장비, 물과 음식 등 사전에 많은 산행 준비를 한 친구들 덕분에 어쭙잖은 객기로 끝나지 않고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금정 부근에 잡은 숙소에 짐을 내리고 몇 년 밀렸던 얘기와 특별했던 설악산 산행의 감회를 근처 횟집에서 잔을 기울이며 나누었다. 속초의 밤이 그렇게 깊어 갔다.


* 설악산 등정을 함께한 두 친구에게 이 산행 후기를 선사하며 좋은 추억 되길 희망다.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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