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 탄천-여수천-갈마치-중대천-경안천-오산천-신현천-태재-분당천-탄
입추가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더위는 여전히 계절의 왕좌를 움켜쥐고 있다. 입술에 붙은 밥알조차 무겁다는 속담이 실감 나는 삼복의 중심. 나는 그 더위 한복판을 자전거로 헤집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하천길 탐방’이라는 모토 아래 라이딩을 시작한 지 몇 달이 흘렀다. 탄천 주위를 맴돌던 바퀴자국은 어느새 경안천, 곤지암천, 양재천, 여수천, 오산천, 신갈천 등으로 거미줄처럼 지도 위를 수놓고 있다. 오늘은 그 흐름을 한데 엮어 원점으로 돌아오는 40~50km 순환 코스를 밟아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 탄천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달리고, 또 누군가는 조용히 운동기구에 몸을 맞긴 채 숨을 고른다. 여름을 견디는 이들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지만, 주말의 아침을 맞이하는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평온함이 묻어 있었다.
여수천으로 접어드니 해가 고불산 능선을 물들이며 서서히 머리를 내민다. 연못에 연꽃이 가득 피어난 섬말공원을 지나자 여수천은 갈현천으로 이름을 바꾼다. 천변도로는 사라지고 마지로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고글과 헬맷을 고쳐 쓰고 마음을 다잡는다. 길옆에 늘어선 화원 온실은 불경기 탓인지 절반이 비어 있다. 순간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에, "잠깐 지나가는 비겠지" 하며 페달에 힘을 주었다.
갈마치 고개로 오르는 길, 뒤쪽에서 로드 바이크 라이더들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스쳐 지나간다. 그 꽁무니에 붙어 페달을 밟다가 이내 안장에서 내려 핸들을 붙잡고 고갯마루로 향한다. 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고개를 넘는 결기 넘치는 저들이 진정한 라이더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때론 라이더이자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하이커이기도 하다. 경사가 느슨해진 비탈에서 안장에 올라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까마귀들이 치어링이라도 하듯 울어댄다.
광주시로 접어들며 순암로(順庵路)로 이름을 바꾼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순간, '육교 정신'이라는 오래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오르막은 고되지만 내리막은 빠르다는 그 단순한 삶의 진리처럼, 우리들 인생도 꼭 그렇기를 바래본다. 두 바퀴는 페달을 밟을 필요도 없이 시원하게 속도를 낸다.
*순암((順庵)은 《동사강목》을 편찬한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77)의 호로 광주 덕안에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문하생들을 양성했다. 이 부근에 그의 사당과 묘가 자리하는데, 순암로((順庵路)는 그를 기리기 위해 붙인 길 이름으로 보인다.
맞은편 차로로 줄지어 오르는 장례 차량 행렬과 마주친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며 중대천 물줄기가 시작되는 삼동으로 내려섰다. 기어를 최고 단으로 올리고 바람을 가른다. 물빛공원을 지나며 자전거길이 없는 구간은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밀며 걸었다.
중대천을 벗어나 경안천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노란 닥풀꽃이 고개를 내밀며 반겨주었다. 중대천은 비닐하우스 농장 너머로 거대한 아파트촌을 내놓으며 직리천과 하나로 합쳐져 경안천으로 안겨 든다. 경안천에 다다르자 초록의 풀숲이 물길을 이불로 감싸 안듯 품었고, 안개는 어느새 강렬한 햇빛에 자취를 감췄다. 기록계를 보니 약 16km를 달려왔다. 선크림을 덧바르고 경안천을 거슬러 오르며 오산천으로 향한다.
한동안 발아래 자전거길과 경안천 너머 정광산 능선을 조망하며 제방길을 따라 달렸다. 참새 떼가 경주라도 하려는 듯 머리 위로 낮게 날아간다. 고산천 합수부에서 전거길로 들어섰다. 키 높이 수풀 사이로 새로 깔린 아스팔트길 자전거도로를 달리고, 양근교회 부근에서 수중보 위로 놓인 보도를 따라 경안천을 건넜다.
다시 경안천교를 건너 문현로를 따라 오산천 하구인 모현교회까지 달렸다. 아카시 가로수가 고마운 그늘을 드리워준다. 왕산교 밑을 지나니 오산천으로 접어들기 전 그 모퉁이에 자리한 느티나무 쉼터 벤치에 앉아 빵과 음료로 허기를 채웠다.
편의점에서 물을 보충하고 9시경 오산천으로 접어들었다. 예전에 정몽주의 능묘를 지나 오산천의 발원지까지 라이딩을 했었지만, 오늘은 오산천 중간쯤에서 신현천으로 접어들 것이다. 오산천 우측으로 멀찍이 떨어진 오포로 차도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수렁게천이 오산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서 차량 통행이 적은 문형동림로를 거치는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에서 갈라지는 포은대로 1272번 길은 좁은 비탈길을 따라 문수산 능선 고개를 넘는 대가를 요한다.
비탈 위 전원주택촌이 축대 위에 아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갯길 초입의 한국판소리보존회 용인지회 건물 뒤 텃밭에는 파가 총총 자라고 산기슭의 밤나무는 실한 밤송이를 성성히 달고 있다. 페달에 발은 얹고 해발 150미터 능골고개 고갯마루를 넘었다. 고갯마루를 지나자 어김없이 내리막길을 내놓는다. 얼굴로 달려들던 날파리 떼는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는 내리막길에서 모두 떨어져 나갔다. 포은이 잠들어 있는 문수산 북변 산자락에 자리한 동림 2리 마을을 관통하여 다시 오포천변으로 다가서자, 서로사랑교회 맞은편에 신현천 하구가 보인다. 신현천변 능평로로 들어섰다.
돌담에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성경 말씀이 적힌 신현천 위 다리 건너에 능평성당의 팔 벌린 예수상이 눈에 들어온다. 성당 초입에 옆구리에 창 뚫린 자국이 선명한 예수를 무릎 위에 앉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형상화한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자리하고 있다. 구원자 예수는 안토니아 요새에서 행해진 재판에서 십자가 형을 선고받고, 골고다 언덕까지 약 600~700m의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거쳐 갔다.
언덕 위 성당까지 예수 고난처 조각상이 1처부터 14처까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고 향하던 언덕, 골고다 언덕처럼 높은 곳에 능평성당이 자리한다. 널찍한 주차장 한편엔 성 미카엘 상, 느티나무 그늘이 드리운 쉼터엔 성 모자 상이 각각 놓여있다. 문틈 새로 미사 중인 신부님의 성경 낭송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본당을 뒤로하고 라이딩을 이어간다.
라이딩의 막바지, 수령 250년 느티나무가 자리한 능평 2통 입구의 신현천 옆 정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이 마을은 조선 초기에 남한산성으로 가져가는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창(倉) 뜰'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 느티나무 아래에는 '능곡 의병 전투지' 제하의 안내판이 서있는데, 그 내용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로 94 일대는 1900년 8월 31일에 20여 명의 의병이 광주 오포읍 능곡의 무명산에서 일제 경찰관수비대와 교전을 벌인 곳이다. 오성초(吳成楚) 부대로 추정되는 200여 명의 의병이 능곡에서 보병대와 교전한 뒤 판교 쪽으로 후퇴한 것으로 파악된다."
능평로와 함께 휘돌며 흐르는 신현천은 경사가 가팔라서 물소리가 우렁차다. 선친이 잠들어 계신 문형산 남단의 느슨한 오르막길을 안장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올랐다. 태재로는 우후죽순처럼 급격히 늘어나는 아파트와 빌라촌에 비해 도로 확충이 미미한 탓에 평소처럼 지나는 차량들로 넘쳐 난다.
광주시와 성남시를 경계 짓는 태재고개를 지나서 서현로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달렸다. 길가에 앉아 있던 비둘기 무리 중 한 마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자전거 페달에 부딪혔다. 무사하기를 바라며, 핸들을 율동공원 쪽으로 꺾으며 줄어들 줄 모르는 스피드를 늦추었다.
율동공원을 거쳐 분당천으로 접어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며 더위가 차오르는 시각 율동공원 산책로와 분당천변 산책로는 인적이 뜸하고 매미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온다. 분당중앙공원 분당천 위에 걸린 보도교 아래에서 안장에서 내려 마지막 남은 물을 들이켜며 아우성치는 갈증을 풀었다. 쉬엄쉬엄 40km를 달려왔다. 예상했던 거리를 다 채우고 탄천을 거쳐 집까지 5~6km 남짓 거리를 더 달려야 했다.
절기는 입추를 코앞에 두었지만 계절은 아직 여름 한복판이다. 어쨌거나 계절은 구르는 자전거 바퀴처럼 쉼 없이 돌고 돌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문득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되,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하라.”는 송나라 철인(哲人) 황정견의 처세훈이 떠오르는 날이다. 여느 때의 루틴처럼 집 앞 마트에서 막걸리 한 병을 사들며 라이딩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