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芒種)이 지났으니 절기는 보릿고개를 넘긴 셈이다. 뺑치고개를 지나 여주 옛 고달사 터에 도착했다. 허허벌판처럼 너른 옛 절터가 자리한 상교리를 우두산(牛頭山)과 고래산(高崍山)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혜목산이라 불리던 우두산 자락에 안겨있던 옛 고달사는 통일신라 때인 764년에 창건된 사찰이라 한다.
산기슭 앞 평평한 터에 축구장 5개 넓이 절터가 남아 있다. 무릎 높이 축대로 구획된 텅 빈 절터를 불당 대신에 우두산 푸른 숲이 내려와 채우고 있다. 탐방로를 따라 그 허허롭고 적막한 절터로 들어가 옛 영화의 편린처럼 남아있는 석조 수조, 석조대좌, 원종대사 탑비 등을 차례로 둘러본다.
절터 서편의 장방형 큰 수조는 온전한 돌 하나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한때 승려 수가 1500여 명이나 되었다는 사찰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 뒤 동편 보물 제8호 1.5m 높이 석불 대좌는 사라진 주인을 기다리는 듯 긴 세월을 꿈쩍 않고 지키고 있다.
절터 한가운데 975년 건립된 보물 제6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새로 세운 탑신과 함께 위엄스레 서있다. 1915년 여덟 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단다. 용머리처럼 험상 굿은 귀부의 머리, 역동적인 구름무늬 장식의 이수 등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이어지는 형식이란 안내문 설명이다.
"두 사자가 마주 앉아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의 어둠에서 밝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오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100museum>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보물 제282호 쌍사자 석등을 웹 검색으로 살펴보았다. 포효하듯 일어서서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앞 시대의 석등과는 다른 모습이다. 박물관 블로그에 묘사된 석등 모습에 이견을 달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절터 위 산기슭에서 유려한 모습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제7호 원종대사 탑을 빠트리고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옛 절터 뒤에 소담한 규모의 극락전, 삼신각, 요사채, 다향정이 자리한 절집 고달사가 자리한다. 마당 입구 좌우에 싯다르타가 깨우침을 얻은 보리수 인양 큰 뽕나무가 한 그루씩 서있다.
나무 밑에 오디가 수북이 떨어져 깔려 있다. 바닥 깔개라도 깔아 놓으면 금세 양동이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모을 수 있지 싶다. 마침 톡 하고 떨어지는 오디 한 개를 주워서 입속에 넣어 본다. 낫 한 자루 들고 쇠꼴 베러 논밭두렁과 산기슭을 헤매던 시절이 스친다. 잘 익은 오디가 열린 뽕나무라도 만나는 날이면 망태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은 다디단 오디 맛에 잠시나마 잊곤 했었다.
'다향루'란 편액이 달린 정자에서 세 사람이 느긋하게 차를 들며 담소하고 있다. 극락전에서는 망자를 위한 제를 올리는지 징을 치며 경을 외는 소리가 적막한 고요를 깬다. 사라진 대사찰을 대신해서 작은 절집이 고해를 건너는 중생들의 타는 목마름을 축여주는 감로수 역할을 하고 있다.
극락전과 삼성각 옆 물이 마른 개울 건너 우두산 정상으로 가는 들머리에 '혜목산 등산로' 표지가 나무 밑동에 기대어 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부리에 먹이를 물고 앞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반포지효(反哺之孝)를 실천하려 저리 부지런한 것일까?
폭신한 흙길을 800여 m 오르니 우두산에서 병치 고개로 내리 뻗는 능선이다. 병치 고개는 새색시가 고달픈 시집살이를 벗어나고자 넘어 뺑소니를 쳤다는 전설과 과부를 보쌈해서 넘던 고개라 붙은 이름이라는 그 '뺑치고개'일 터이다.
너른 평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흥건한 이마의 땀을 수건으로 훔쳐냈다. 난간이 달린 양팔 넓이 나무계단이 능선을 따라 100여 m 놓였다. 산정 쪽에서 내려오는 산객 서너 명과 지나쳤을 뿐 한여름처럼 햇빛이 내려쬐는 정오의 산중은 인적이 드물다.
땀 냄새에 끌려 따라붙었던 날파리는 솔솔 바람이 부는 능선으로 접어들자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갔다. 오르내림이 있는 능선을 따라 숲은 수종이 바뀌기도 하고 쭉쭉 곧게 뻗은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한 가족인 듯 어울려 군락을 이루는 곳도 있다.
해발 489m 우두산 정상은 주 능선에서 뒤로 살짝 물러나 앉아 있다. 무릎 높이 표지석을 평상 둘 벤치 셋이 둘러앉아 있는 정상엔 큰 키의 노송들이 빙 둘러 서있어 아늑하다. 전망이 트여 시야가 시원하다. 줄기 사이로 멀리 여주시와 남한강 위로 놓인 세종대교도 보인다.
고래산 쪽 능선은 한동안 급강하하듯 가파르다가 완만해진다. 능선을 넘는 송전탑 주위에 칡넝쿨이 무성하다. 높이 솟은 지형지물을 타고 오르려는 본능 때문인지 산행 중에 만나는 송전탑 주변에는 여지없이 칡이 무성했다. 타고난 본능을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우두산과 고래산 사이 안부는 골프장과 접해있다. 지평면 대평리와 상교리를 잇던 고개 국사령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통행로의 역할을 잃었다는데 지금은 그 흔적 조차 희미하다. 뺑치고개를 넘어올 때 가로질러온 골프장을 비롯 야트막한 산이 많은 이 주변에만도 열서너 개의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금수강산이 온통 골프장으로 뒤덮일 지경이다.
안부를 지나 내딛는 고래산 능선은 가파르다. 고달산(高達山)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고래산, 그 이름의 유래가 동쪽 기슭에 고려장 굴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은 섬뜩하다. 대평저수지 쪽에서 바라본 모습이 고래 등줄기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을 믿고 싶다. 들머리에서 본 날짐승 까마귀에게 조차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산길 곳곳 간간이 비둘기 날개 털이 널브러져 있어 고요한 이 산중도 삶과 죽음이 오가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현장임을 알 수 있다. 번갈아 나타나는 참나무 숲과 노송 숲이 울창하다.
몇 차례 오르내림이 있은 후에 주 능선 뒤로 100여 m 물러서 있는 해발 543m 고래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표지석 뒤 열린 숲 너머로 지평의 여러 마을과 너른 들판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올라갔던 주 능선으로 되돌아 내려와서 옥녀봉을 거쳐 상교리로 향한다. 가파른 지그재그 흙길을 한참 동안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고래 머리에서 등줄기로 내리 뻗듯 가파른 길이 등줄기처럼 평평하게 바뀌면서 숲의 바다를 걷는 느낌이 든다.
옥녀봉으로 가는 능선에 들어서면 나뭇가지 사이로 우두산과 고래산을 잇는 산줄기가 고래 등처럼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능선 중간쯤 소나무 줄기에 테이프를 빙 둘러치고 '접근금지'라는 경고판을 달아 놓은 두어 곳은 수직굴이 있는 곳이 아닌가 짐작된다.
표지석이 없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는 해발 419m 옥녀봉을 능선 지나듯 지난다. 우두산과 옥녀봉에 있는 농 바위, 장구 바위, 거문고 줄 바위 등은 고달사 석공이던 남편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옥녀봉에 잠든 옥녀의 영혼을 달래려 마련해준 살림살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어찌해서 전국 곳곳 옥녀봉이라는 산은 대부분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을까?
옥녀봉을 지나서 상교리 쪽으로의 가파르던 하산 길이 주춤하는 곳에 '통정대부 행 중추원 의관 원주 원공'과 그의 부인 묘소가 자리한다. '1828生 1911卒'이라 적힌 비문이 고종 때인 1895년 설치된 중추원에서 법률과 칙령을 심사하던 관직을 역임했음을 일러준다.
묘지 아래 비탈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다. 경사가 잦아드는 마을과 멀지 않은 곳 물이 고인 웅덩이 두어 개는 산짐승들에게 요긴한 식수 조달처요 목욕탕 역할을 하지 싶다.
골짜기를 낀 푹신한 흙길이 상교리 뒤로 산객을 내려놓는다. 띄엄띄엄 자리한 대여섯 농가를 지나 논과 방천 사이로 난 아스팔트 길을 따라 고달사지 쪽으로 걷는다. 농부는 '망종 넘은 보리, 스물 넘은 비바리'라는 말을 잊었을 리 없고, 도랑 옆 곳곳에 놓인 전기펌프는 모내기가 끝난 논으로 쉼 없이 물을 퍼올리고 있다.
금계국과 천인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마을 길을 지나 상교천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다리 옆 논바닥 가운데 솔숲으로 덮인 '신털이봉'이란 이름의 작은 둔덕이 있다. 고달사지 입구에 자리한 자그마한 이 둔덕은 옛날 고달사 스님들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 앉아서 쉬며 신발을 털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집을 지으려는지 그 둔덕 한쪽이 깎이고 평토작업이 한창이다. 옛 고달사의 영화를 짐작케 해주는 전설이 어린 둔덕이 제모습을 잃으면 전설도 사라져 버리지 않을지 안타깝다.
우두산 고래산 옥녀봉을 거쳐 다시 산행 들머리였던 옛 고달사 터로 돌아온 산객도 탁발승 마냥 등산화 흙을 털고 스틱을 접으며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