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여행

by 라온재

독일 생활 두 달 차, 부대 내 호텔이라는 임시 거처를 떠나 드디어 거실 창 너머 숲이 인사하는 아늑한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짐 상자와의 사투가 끝나고 집안에 사람 사는 온기가 돌기 시작하니, 그동안 억눌러왔던 방랑의 DNA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거창한 가이드북이나 분 단위의 계획표 따위는 필요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가보는 솔로 여행의 묘미, 그 첫 번째 목적지는 이웃 동네 하이델베르크였다.

토요일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건 로맨틱한 고성의 풍경이 아니라 쌀쌀한 날씨와 부슬부슬 내리는 비였다. 오전의 하이델베르크 시내는 마치 정지 화면처럼 한산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하이델베르크 성 주변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비 오는 성곽을 우산 하나 받쳐 들고 걷노라니, 세월의 풍파에 허물어진 성벽들이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내부 관람은 불가능했지만, 성을 이루고 있는 붉은 사암(Sandstone)의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질학적 호기심을 발동시켜 보자면, 아마도 이 지역의 오래된 퇴적층 속에 포함된 철 성분이 산화되면서 이런 매혹적인 붉은 빛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붉은 사암에서 풍화된 점토로 만든 기와 또한 붉은 색이다. 가공하기 쉬운 사암 덕분에 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의 지붕과 벽면이 통일감 있게 붉은색을 띠고 있으니, 도시 전체가 거대한 루비처럼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성 한편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바로 커다란 주목나무였다. 고향 소백산 비로봉 정상에서나 보던 그 귀한 나무를 이곳 독일 땅에서, 그것도 아름드리 크기로 여러 그루 마주칠 줄이야. 빗속에서 성벽 너머 하이델베르크 전경을 바라보며 소백산의 정취를 떠올리는 기분은 묘하게 이국적이면서도 포근했다.

시간이 지나자, 고요하던 성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좁은 골목길을 따라 구시가지로 내려왔다. 토요일 오전엔 모두들 느긋해서인지 오픈한 가게도 카페도 별로 없다. 다만 네카어 강가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를 젓는 조정 선수들과 여객선들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어지는 철학자의 길. 칸트나 헤겔 같은 대철학자들도 이 길을 걸으며 심오한 고민을 했겠지만, 나는 그저 마주치는 독일인들의 무뚝뚝함에 대해 고찰했다. 먼저 하이 라고 인사를 건네야 겨우 눈길을 주는 그들의 철벽 매너라니. 하지만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보는 하이델베르크 성의 모습은 성 바로 밑에서 볼 때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아름다웠다.

벌써 5마일을 걸었다. 몸은 덜덜 떨리고 스마트폰 배터리마저 비명을 지를 때쯤, 갓 문을 연 카페에 들어갔다. 충전을 부탁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주인장이 내 몰골이 꽤나 처량해 보였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어준다. 독일인의 무뚝뚝함 속에 숨겨진 츤데레 같은 따스함에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충전을 마치고 무계획의 즐거움을 이어가기 위해 슈바칭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이곳의 정원은 축소판 베르사유라는 별명답게 정교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3월 초라 아직 초록의 싱그러움은 부족했지만, 한쪽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수백 년 된 벚꽃나무가 곧 봄이 온다며 속삭이고 있었다. 정원 한편의 모스크는 또 어떤가. 종교 시설이 아닌 순수하게 심미적인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안내문을 보며, 당시 귀족들의 취향에 새삼 감탄했다.

마지막 여정은 세계문화유산인 슈파이어 대성당이었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웅장한 돔 형식의 성당은 그 존재만으로 압도적이었다. 지하에는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잠들어 있다는 이곳에서 나는 생애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마침 성당 본당에서 성가대의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별도의 스피커 없이도 높은 천장을 타고 흐르는 어쿠스틱 음향과 파이프 오르간의 선율은 과거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들었던 몰몬 태버내클의 감동을 다시 소환해냈다.

성당 밖으로 나오자 민주주의의 현장인 데모 군중 사이로 길게 뻗은 막시밀리안 거리가 보였다. 로마 시대의 흔적부터 개신교(Protestant)라는 이름이 처음 명명된 역사적 장소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이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이었다.

기차를 타고 다시 슈투트가르트 집으로 돌아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니 오늘 하루 무려 21마일을 걸었단다. 비바람 속에서 강행군을 걸었지만 아직 다리는 생생하다, 낯선 땅에서의 첫 여행이 준 도파민 덕분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비록 무모하고 계획 없는 솔로 여행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벚꽃과 성가대의 선율, 그리고 이름 모를 카페 주인의 커피 한 잔이 주는 위로는 그 어떤 완벽한 일정표보다 값졌다. 내일은 따뜻한 집에서 푹 쉬며 다음 주, 그리고 그다음 주에 이어질 또 다른 도파민 생성 여행을 꿈꿔본다. 독일의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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