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m 여행

독일의 봄을 기다리며

by 라온재

3월의 세 번째 토요일, 올해는 봄이 유난히 게으름을 부리는 모양이다. 아침 8시,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울름의 공기는 뺨을 차갑게 때렸다. 하지만 지난주와 달리 오늘은 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마시는 차가운 아침 공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 즉 도파민을 샘솟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으니까. 역을 등지고 오늘 여행의 첫 번째 미션 수행지인 울름 대성당(Ulmer Münster)으로 향했다. 길 끝에서 어렴풋이 거대한 탑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냄새가 있었다. 바로 갓 구운 빵 냄새다.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이 유혹적인 향기는 점점 진해졌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 마침 성당 앞 광장에서 주말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광장에 들어서니 트럭들이 줄지어 자기만의 보물들을 진열하고 있었고, 그 활기를 보자마자 직감했다. 아, 오늘 여행은 적어도 굶주릴 일은 없겠구나. 아주 맛있는 여행이 되겠어!


가까이서 마주한 성당의 탑은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겨우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은 여기저기 한참 수리 중인 모습이다. 내부 입장은 10시부터라길래, 그동안 울름의 구석구석을 탐험해 보기로 했다. 울름은 도나우강과 연결된 운하가 참 많은 도시다. 과거엔 이 물길이 중요한 물류의 통로였을 것이다. 성당 근처의 피셔피어텔(Fischerviertel)에 들어서자 운하 위나 주변으로 예쁜 고택들이 나타났다. 아침 일찍 산책 나온 연인들은 이 동화 같은 풍경을 담느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운하의 물소리는 마치 깊은 계곡에 와 있는 것처럼 시끄러울 정도였다. 한편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운하를 청소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화려하게 페인팅 된 시청 건물은 자기도 좀 찍어달라는 듯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참을 돌다 다시 뮌스터 광장(Münsterplatz)으로 돌아오니 시장은 이미 절정이었다. 꽃, 빵, 채소, 치즈, 소시지, 생선, 그리고 길거리 카페까지. 시장 구경만큼 사람 냄새 나는 재미가 또 있을까. 아까 맡았던 빵 냄새에는 벌써 내성이 생겼는지, 이제는 소시지 굽는 냄새가 나를 불렀다. 큼지막한 소시지에 채소를 듬뿍 넣어 파는 길거리 음식을 이미 입에 물고 있었다. 역시 독일은 현금박치기의 나라다. 지난 여행 때 유로화가 없어 고생했던 기억에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다만,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유로화 지폐는 어쩐지 돈이 아니라 보드게임용 종이 같아 보여서 자꾸만 씀씀이가 헤퍼지는 부작용이 있다. 시장에는 치즈 가게가 참 많았는데, 치즈 먹는 법을 모르는 나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독일 사람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투박한 장바구니를 들고 다녔다. 자전거를 탄 여성들도 많았고, 인위적인 화장보다는 본연의 순수한 얼굴을 한 이들이 많아 무척 건강해 보였다.


드디어 성당 문이 열렸다. 외부는 화려한 석조 조각들로 빼곡했고, 내부는 말 그대로 웅장했다. 유럽 성당들이 대개 비슷한 돔 형식을 취한다지만, 울름의 디테일은 유독 날카롭고 섬세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일단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며 입을 벌리게 된다. 중세 종교인들이 이토록 거대하게 교회를 지은 이유는 아마도 인간을 압도하여 신의 권위를 보여주려 함이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모든 관광객은 그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사진 한 장이라도 더 건지려 분주했다.

자,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회 탑을 정복할 시간이다. 성당 입장은 공짜지만, 탑에 오르는 건 통행료를 내야 한다. 주탑 주위를 감싸는 네 개의 회오리 계단을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데, 길폭이 딱 한 사람 지나갈 정도다. 사암으로 된 돌계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녔는지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높이가 높아질수록 조형물 사이로 보이는 지상의 풍경은 점점 아득해졌고, 어느새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벽면의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손이 닿는 석조물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타서 까맣게 반질거렸다. 마지막 단계에선 거의 두 손으로 양쪽 벽을 짚으며 기어 올라갔다. 인간은 왜 이토록 높은 곳에 집착하는 걸까. 아마도 옛사람들은 한 걸음이라도 더 하나님 곁으로 다가가고 싶어 이 가파른 길을 천국 가는 길이라 믿으며 올랐을 테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울름은 평화로웠고, 더 위로 향하는 좁은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그곳의 계단 역시 닳아 있었다. 신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그토록 지독했다.


광장을 지나 다시 운하 길을 따라 도나우 강변을 걸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 곡을 흥얼거리며 다리를 건넜다. 강 건너 노이울름의 작은 성당 마당도 주말 시장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울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아인슈타인의 흔적도 찾아 나섰다. 아인슈타인 가족 뮤지엄이라는 곳은 유료인데 사진과 그림 몇 장뿐이라 살짝 허탈했다. 특히 로켓과 조개 위에 아인슈타인이 메롱을 하고 있는 조형물은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참 난해했다. 유대인으로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 천재의 고단한 삶을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조롱일까. 역 앞 출생지의 조형물조차 아무 설명이 없었고, 그 옆의 꽃가게 주인은 마치 아인슈타인이 누군지 모른다는 듯 무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비블링겐 수도원(Wiblingen Abbey)은 공사 중이라 화려한 성당 내부는 포기해야 했지만, 대신 그 유명한 라이브러리를 만났다. 먼지 쌓인 오래된 책들이 망 너머로 가득했고, 천장의 화려한 장식들은 넋을 잃게 했다. 다만, 저 화려함이 진짜 원래의 것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인쇄된 월페이퍼로 복원된 것인지 헷갈릴 만큼 매끈했다. 그래도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번쩍이는 귀족의 모습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는 블라우보이렌(Blaubeuren)의 블라우토프(Blautopf)였다. 석회 입자가 섞여 짙은 파란색을 띠는 이 신비로운 샘은 사실 동굴과 연결된 입구라고 한다. 요정의 전설이 전해 내려올 법한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초록색 타일의 수도원 첨탑과 독일 전통 목조 주택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고생해서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다만,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꽤 난도가 있는 곳이었다.


겨우 울름으로 돌아오니 기온은 더 떨어졌고, 돌아가는 기차는 20분이나 늦어졌다. 역에서 한 시간 넘게 떨며 깨달았다. 아, 해가 지니 봄은 아직 출근도 안 했구나. 오늘 하루, 대성당 탑을 오를 때의 짜릿한 공포와 도나우 강변의 평화로움이 머릿속에 교차한다. 문득 의문이 든다. 도시 규모에 비해 왜 이리 성당들은 과하게 웅장한 걸까. 아마도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누리던 그 시대의 욕망이 이 거대한 돌덩이들을 하늘 높이 쌓아 올린 것이리라. 그 덕분에 오늘날의 나 같은 여행객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 그것도 나름의 역사적 공헌이라 해야 할까.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여행의 일부로 느껴지는, 참으로 독일스러운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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