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피카소는 여성 편력이 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여성만 7명, 스쳐간 여성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새로운 여성에게 반할 때마다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다가 금세 질려서 다른 연인으로 갈아타곤 했다.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여성들은 매번 피카소의 바람으로 버려져서 힘들어했고, 그로 인해 대부분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피카소는 천재적인 화가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불건강한 나르시시스트였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술가 중에는 피카소처럼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심각한 약물중독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에 이르기도 하고, 평생 우울이나 각종 환각에 시달리기도 한다. 종종 상식을 벗어난 괴팍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문제의식을 갖고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 예술가에게는 ‘창작을 위한 고통’이나 ‘창조적인 사람의 성향’으로 받아들여진다. 자기 자신과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행동조차 ‘예술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덕에 창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단언컨대, 창조과정에서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창조적 영감을 얻기 위해 섹스와 술과 마약에 빠져드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영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우울함을 붙잡고 있는 것 또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일 뿐이다. 예술가들이 종종 보이는 상식 밖의 괴팍한 행동은 치료가 필요한 불안한 심리 상태이지, 창조적인 사람들의 성향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창조과정에는 종종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깊이 내면의 나를 만나고 잠재된 가능성을 확장시켜 주는 성장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우리를 파괴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창조는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다’라는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파괴적으로 만들 뿐이다.
심리학자 칙센트 미하이의 조사에 따르면 창조적인 사람들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자신에게 맞는 일상의 리듬을 찾고 최대한 자신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 일정 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잘되든 안되든 작업에 매달린다. 창조적인 몰입을 위해 산책을 하고 정원을 가꾸고 피아노를 치고 달리기를 하며 정신을 맑게 유지하려 노력한다. 결혼생활도 대체로 안정되고 만족스럽게 유지한다. 지속적이고 안정된 관계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창조적인 활동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에너지를 관리하는 방식은 제각각 달라도 창조적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창조적 에너지를 매우 소중하고 철저하게 관리한다.
창조성은 우리를 파괴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창조성은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게 한다. 창조성은 더 온전한 정신으로, 즐거움과 사랑을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도록 안내한다. 창조적 모험에 따르는 난관조차 더 큰 힘에게 내어 맡겨지는 아름다운 영적 경험으로 이끌 뿐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애써 참아야 한다거나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댄다면 그것은 오히려 창조성과 멀어졌다는 증거다. 창조성은 우리를 더 가볍게, 더 명랑하게, 더 우아하게 만들 뿐이다.
창조성, 놀이, 치유, 예술은 한 묶음이다. 힘들고 아픈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옮기면 무거운 짐이 덜어지고 아픔에서 벗어난다. 상담실에 앉아 고통스러운 기억을 꺼내며 눈물을 뚝뚝 흘리지 않아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깊은 치유가 일어난다. 치유(heal)와 전체(whole), 신성(holy)은 어원이 같다. 치유(healing)는 나 자신이 신성함(holy)을 지닌 온전한(whole)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놀이를 통해 내 안의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치유될 때, 나 자신이 본래 온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 그 순간에 신성함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예술 작품 안에는 놀이, 치유, 신성함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놀이, 치유, 예술 어느 쪽에서 접근하든 우리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만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자신을 잊는 경험을 하게 된다. 윤이상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음악은 나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주에는 음악이 흐릅니다. 이 흐르는 우주의 음악을 내 예민한 귀를 통해 내놓을 뿐입니다.” 창조는 내가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표면 아래 존재하는 무언가가 나를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내 생각, 내 감정, 내 욕심, 결국 나라는 존재를 잊어야 한다. 그렇게 나를 완전히 잊고 나를 통해 표현된 결과물에는 역설적으로 가장 고유한 자신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다.
작곡가 스티븐 나흐마노비치는 ‘창조력은 반대 방향의 힘들이 이루는 조화다. 이 힘들은 릴라, 즉 ‘성스러운 놀이’라는 개념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거룩하고 근엄하고 진지해야 할 것 같은 ‘성스러움’과 자유롭고 즐거운 ‘놀이’가 공존하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창조성은 ‘성스러운 놀이’처럼 공존하기 어려운 양극단을 동시에 끌어안는다. 장난스럽고 유쾌한 놀이에서 치유와 신성함, 온전함을 경험한다. 고통과 슬픔에서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나를 놓아버리면 진정한 내가 드러난다. 강하게 대비되는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색이 되듯, 창조성은 양 극단을 통합하고 조화롭게 공존하게 한다.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성은 성스러우면서 성스럽지 않다. 우리가 창조한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혼자 고독하게 애쓰는 동시에 영적인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는다. 우리는 겁에 질려있는 동시에 용맹하다. 예술은 참담한 노동이며 동시에 멋진 특권이다. 오직 우리가 가장 장난스럽고 유쾌할 때 비로소 신성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다가온다.”
나는 창조성이 양극단을 끌어안는 이 역설을 너무도 사랑한다. 창조성은 내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역설이 단번에 나를 짓누르는 심각함에서 건져내어 가벼움과 해방감을 느끼는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내가 창조성에 매료되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진작에 생을 마감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역설 속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아프고 피하고 싶은 상처를 놀이를 통해 가볍게 표현하며 자유로워지기를. 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는 순간에 찾아오는 신성함을 만끽하기를.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엉뚱한 유머를 던질 수 있기를.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동시에 용맹하게 나아가기를. 나를 잊는 동시에 진정한 나를 만나기를. 모든 것이 달려있는 듯 중요하게 덤벼드는 동시에 지금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그리하여 온통 무겁고 심각한 삶을 부디 가볍게, 명랑하게, 우아하게 살아가기를!
참고 : <창의성의 즐거움>, 칙센트 미하이, 북로드
인용 :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에코의 서재
<빅매직>, 엘리자베스 길버트,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