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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르고 Jan 05. 2024

<더 좋은 곳으로 가자>를 읽고.

존버보다 요버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지나가며 황톳빛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뒤를 푸른빛 블라우스를 입고 도트 무늬의 반바지를 입은 여자 아이가 울며불며 ‘엄마~’ 하고 뒤쫓는다. 겨우 대여섯 살 난 꼬마가 그 버스를 따라잡을 리 만무하다.  달리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꼬마는 결국 흙먼지 속에 주저앉아 목놓아 엄마를 부르며 운다. 이것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는 내 어린 시절 단상이다. 어린 동생을 둘러업은 엄마와 아빠는 나를 할머니 댁에 맡겨놓고 ‘민중’과 ‘노동자’가 밀집한 곳을 향해 기꺼이 몸을 실으셨다. 이후 나는 어떻게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의 기억은 마치 오래된 유령처럼 아직까지 나의 곁을 맴돌고 있다. 

  엄마, 아빠의 그 ‘민중과 노동자’ 덕에 나의 유년기는 다소 쓸쓸했고 이것은 비단 내 유년기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내 이유 모를 결핍과 친구해야 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무엇을 하나 살 때 이것이 꼭 필요한지, 안 사도 큰 지장이 없는지’, 가성비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태도. 즉 음악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형편을 생각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주요 과목을 선택했고,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장 경제적이고 환영받을만한 선택을 하며 아무거나 라는 말로 나의 선호도를 흐릿하게 만들어 종래엔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 나 조차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사회 시간,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과연 평등한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어린 나의 눈에는 우리 부모님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평등하다 느끼지 못해 열심히 내 나름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불평등하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옆 친구의 생각을 곁눈질했는데 그 친구의 답인 즉슨 ‘평등하다. 부자인 사람들은 그만큼 노력을 해서 소득을 얻을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보다 노력이 덜했기 때문이다.’라는 게 아닌가.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혈관을 타고 나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회고해 보건대 그 감정은 ‘화’라기보다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가난의 이유가 단 하루도 어린 자녀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일을 하는데도 내 부모님의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결론으로 도달했다는 것에 충격으로 휩싸였다. 때문에 곧 나는 그토록 숨기고픈 결핍이 드러날까 두려워 누가 볼세라 종이가 뚫어지도록 지우개로 벅벅 문질렀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나의 결핍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 하면 좋을지. 그러다 책을 읽으며 발견했다. 

문화적 유산! 그래, 바로 이거다. 지긋지긋하고 끈질기게 나를 열등감의 늪으로 빠뜨리던 문화적 유산. 

바로 이 문화적 유산의 차이를 어릴 때부터 실감했다. 방과 후 놀러 간 친구 방 화장대에서, 그 화장대 위 선크림에서.      



   

   책을 읽으며 유년기 결핍으로 휩싸였던 내 안의 어린 자아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책의 응원에 힘입어 비로소 이렇게 위로하게 되었다. 

   그때 너의 허기는 네 잘못이 아니란다. 세상에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차이라는 게 있어. 처음 너에게  주어진 환경은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고 그저 여러 가지 우연의 합일뿐이야. 그 덕에 너는 20년 후에 책과 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리고 무언가에 꽂히면 유난히도 깊이 탐구하는, 이른바 ‘덕질’ 은  네가 어려서, 또는 혹자의 이야기대로 ‘다정도 병인 금사빠’라서가 아니라 그때의 네가 삶을 견디기 위해 필요했던 비현실적 현실이었단다. 라고...     


   몇 해 전 효리언니도 말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 자신이 기특해 보이는 시간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작가 역시 조언한다. 자존감이란 객관적인 조건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기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서 나온다고. 마치 이 책을 통해 작가는 힘겨운 청춘들에게 미련하게 존버하지 말고 요령껏 버티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임명장 받을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던 내가,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더 이상 미련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쌓아 올린 결과를 마주하던 날의 만족감과 대견함도 결코 잊지 못한다.(물론 이 마음은 발령과 동시에 땅에 떨어졌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작더라도 노력해서 성과를 낸 일들에 대한 기억을 쌓아가는 일상에서 비롯된다. 그래, 이렇게 똥글을 쓰더라도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을 남기는 내가 기특하다. 이제 나는 과거의 어둠은 묻어두고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도움닫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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