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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Dec 22. 2019

이 시대의 자낳괴들이 유튜브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

2편 - 소련여자가 자본주의를 대하는 태도

1. 나다, 크리스.

소련여자의 화려한 시작, 호날두의 노쇼 사태에 분개하며 그의 유니폼 티셔츠를 태우는 크리스. (출처: YouTube)

유튜브가 보편화되면서 기믹(gimmick)이라는 단어도 일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관심을 끌기 위한 장치'로 해석되는 이 단어는 유튜버를 비롯한 엔터테이너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소비되기 위한 독특한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뜻한다. 본디 기믹은 메인 콘텐츠를 보조하는 부차적인 요소로 기능하지만, 때로는 '콘셉트에 잡아먹힌 괴물'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기믹 자체를 콘텐츠로 내세우는 유튜버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지금 소개하는 유튜버 '소련여자'도 기믹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떠오른 사례인데, 그의 채널은 2019년 7월 31일에 첫 영상을 게시한 이래 2019년 12월 기준으로 70만을 선회하는 구독자를 보유하는 놀라운 성장세를 이루어냈다.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으로서 '헬조선'의 기상을 이어받은 한국인 2-30대와 유대하고자 스스로를 '소련'여자로 칭하는 크리스. 그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까.


2. 전반전 - 유사 한국인이 연호하는 'B급 (혹은 A급) 국뽕'

크리스는 본인이 동양학과를 전공했다는 주장의 명분을 내세우며 일본 불매운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다. (출처: YouTube)

크리스는 2019년 7월에 있었던 '호날두 노쇼 사태'를 비판하며 팬으로서 소장하고 있던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모습을 찍은 영상으로 유튜브에 첫 등장한다. 날 것의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해당 영상은 '외국인이 한국인과 함께 분노한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한국인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다. 시청자의 반응에 고무된 크리스는 며칠 뒤 '외국인이 호날두 한국 노쇼를 해외 언론에 알린 이유'라는 제목의 두 번째 동영상을 통해 각종 외신에 호날두의 비신사적 행동을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음을 알렸고, 외국인인 그가 한국인과 동일한 정서적 입장을 취하며 행동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때 일부 사람들이 한국인에게 잘 보여서 뜨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크리스를 비난하지만, 크리스는 추후 업로드한 동영상에서 이를 소탈하게 인정하며 그를 향한 도발을 깔끔하게 무력화한다.


한편 이 무렵 동영상과 더불어 소련여자 채널의 재생목록이 화제가 되었는데, 사회주의 냄새가 풍기는 선동적인 어휘를 무심하게 적어놓은 목록명이 그것이다. '투쟁'과 '숙청'이라는 강렬한 어휘 선택은 그의 출신 배경을 상기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하며 크리스가 현재 지니고 있는 기믹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여기서 그의 영민함이 드러나는데, 사실 정황상 한국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것으로 보이는 크리스에게 한국인과 비슷한 정서를 기대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과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한국인과 어느 정도 분리시킴으로써 미묘한 소구점을 만들어 낸다. 한국말이 서투른 척 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투쟁과 숙청이라는 어휘는 결국 의도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고, 동영상 섬네일의 붉은 바탕체 폰트나 프로필 사진에 새겨진 낫과 망치 문양, 영상에서 심심치 않게 휘둘러 주는 무기류 소품 역시 사회주의와 외국인의 신분을 상징하는 B급 기믹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소탈한 걸 크러시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으니, 모든 요소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가짓수가 많아졌지만, 채널 개설 초반에 화제가 되었던 '투쟁'과 '숙청' 재생목록. (출처: YouTube)

이후 광복절을 맞이하여 소련여자 채널에는 '일본 불매운동 외국인 반응'이라는 5번째 동영상이 올라온다. (여기서도 크리스는 본인이 외국인임을 강조하며 의식적으로 '유사 한국인'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크리스의 영상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영상이기도 한 본 영상은 한창 한국에서 몰아치기 시작한 일본 불매운동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전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본인이 동양학과를 전공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자신의 연구자료를 보여준다. 의심론자들이야 그의 전공과 논문에 대한 진위성 여부를 따지겠지만, 나는 이 영상이 이후 소련여자 채널에서 등장하게 될 기믹 놀이 속에서도 크리스의 순수한 양심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 영상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크리스의 영상들이 상당수 감정의 영역에 기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이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는 애국심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을 기피하는 심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화요소를 열거하며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에 대한 문화 이해도를 집요하게 체크하는 뭇 대중들의 모습에서 약소국 시절의 구태를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이 애국심을 맘껏 드러내도 괜찮은 국제적인 무대에서는 그 누구보다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우리네 모습에서 결국 '국뽕'은 기회만 되면 언제라도 발산할 준비가 되어있는 숨겨진 끼와도 같은 것이다. 소련여자 크리스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했고, 유사 한국인의 입장에서 국뽕을 대리 방출함으로써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비록 채널이 B급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지만, 과연 애국심에 순수하게 'B급'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후 크리스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발돋움한 손흥민이라는 추가 국뽕 요소를 선보인 다음, 그간 착실히 쌓아 온 기믹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기믹 놀이를 시작한다.


3. 후반전 -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호령하는 위풍당당함

아이폰 신형 모델을 광고하는 척하더니 동영상 말미에서 한국의 대기업에게 도도하게 러브콜을 요구하는 크리스. (출처: YouTube)

크리스는 자신의 채널명을 소련여자로 지은 것에 대해 '자신은 영국남자(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국 문화 콘텐츠를 선보이는 대형 유튜브 채널)처럼 성공한 유튜버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인이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모습이라니. 물론 2019년의 러시아를 사회주의로 등가 시키는 것은 얄팍한 고정관념임을 안다. 하지만 기믹이 이미지로 먹고사는 술책임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그러한 연상작용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당사자가 의도한 바일 테다. 크리스는 자본을 좇고자 채널 초창기부터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나는 n만 명까지만 데리고 간다'는 요한계시록 스타일의 선동 발언으로 구독자를 모집하기도 하고(그리고 동영상이 추가될 때마다 급속하게 불어나는 구독자 수 덕택에 n만 명의 범위를 늘려나가는 웃음 유발 포인트는 덤이다), 동영상 길이를 늘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배속을 늦추거나 국가적 요소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마냥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가벼운 수준이었고, 한창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를 바라보는 팬심이 그러하듯 너그러이 용인되는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2019년도에 거론할 수 있는 국뽕 요소가 1차적으로 소진되자, 크리스는 한국의 일상적인 요소나 한국의 밈 요소를 외국인의 시선과 특유의 허세 넘치는 화법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콘텐츠 제작방향을 선회한다. 이는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되는 채널의 한계를 극복하고 영상 회전율을 손쉽게 높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판단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B급 정서가 더욱 가속화되는데, 바로 욕설이다. 크리스의 영상은 그가 말하는 워딩과 편집자의 자막이 고의적으로 불일치하게 함으로써 그 간극이 빚어내는 개그를 주로 사용하는데, 그 워딩을 처리하는 방식 중 하나가 크리스가 내뱉은 욕설을 편집자가 자막으로 순화하는 것이다. 선 넘는 크리스를 편집자가 억제한다는 콤비 플레이. 혹은 전반적인 한국말은 다소 어눌해도 비속어는 찰지게 구사하는 외국인. 물론 재미는 있지만, 때때로 예의 개그 효과를 노리고자 고의적으로 불필요한 감정을 배설하는 듯한 연출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철저하게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로 분한 자아의 부작용이다.


사실 크리스의 자본주의 찬양이 가장 긍정적으로 빛을 발한 순간은 바로 '성공한 사람의 아이폰 11 Pro 언박싱' 편이다. IT 전문 유튜버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무성의하게 아이폰을 언박싱하던 크리스는 동영상 말미에서 한국 기업인 삼성과 LG에게 '나한테 광고 줄 기회를 준다'며 도도하게 러브콜을 요구한다. 마치 처음부터 아이폰을 무성의하게 언박싱했던 것이 마지막 순간을 위한 큰 그림인 양 말이다. 나는 이 영상 편이 영상 자체는 질적으로 뛰어나지 않지만 크리스의 모습이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게으른 욕망을 정확하게 모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이후 크리스는 실제로 삼성의 신형 모델 휴대폰을 비롯해 각종 기업의 러브콜을 잇달아 받으면서 특유의 B급 정서를 가미한 광고를 동영상에 삽입하게 되는데,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호령하는 러시아인'이라는 기믹을 훌륭하게 달성한 셈이다.


4. 그럼에도, 따뜻한 인간 크리스

시베리아 방문을 기록한 일상 비디오 로그. (출처: YouTube)
한국의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수능 영어영역을 비판하는 크리스. (출처: YouTube)
동영상에 자신의 처지를 힘들어하는 내용의 댓글을 단 수험생을 위해 크리스가 달아준 따뜻한 답변. (출처: YouTube, 쭉빵카페, 더쿠)

소련여자의 또 다른 서브 콘텐츠로는 자국 러시아의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이 있다. 가벼운 지식을 얻어갈 수 있고 일상 비디오 로그의 경우에는 가족과 지인들이 등장하다 보니 도발의 정도가 옅고 보다 인간적인 크리스의 면모를 접할 수 있어 선호하는 콘텐츠다(물론 그 와중에도 열심히 스폰서 받은 광고를 녹여내긴 한다). 또한 수능을 앞두고 한국 수능 영어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영상을 올렸는데, 수험생 신분의 한 유저가 작성한 댓글에 크리스가 따뜻한 답변을 달아주어 모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처럼 앞으로도 크리스가 기믹으로 흥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어 주었으면 좋겠다. 기믹에 기인한 일회성 발언은 뱉고 나면 그만이지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건네 준 삶의 조언은 평생 잊히지 않는 가치 있는 행위인 것이다.


5. 결론

크리스의 기믹은 한마디로 '금발머리 유사 한국인이 2-30대 한국인이 지닌 자본주의적 욕망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이를 자신의 일상에 공격적으로 모사함으로써 재치와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른 인종과 국가라는 출신 배경을 활용한 로컬라이징 사례는 제법 많지만, 단기간에 소규모 인력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유튜버는 크리스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내용물의 대부분을 기믹으로 벌충해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채널 지속성의 관점에서는 이를 마냥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기믹은 시간이 누적됨에 따라 결국 식상함과 피로도의 누적을 야기하며, 기믹의 정도가 지나치게 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진정성의 함정을 파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그의 최신 영상을 보노라면 내가 알던 크리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초창기와 달라진 듯한 모습에 아쉬움이 남는다. 크리스가 유튜버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꾼다면, 꼭 그의 B급 정서나 욕설과 결부 짓지 않더라도 콘텐츠의 질적 향상은 그가 반드시 이뤄내야만 하는 숙제다.


우리는 크리스를 비롯하여 기믹으로 흥하는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질투할 수도 있고 시대를 잘 탄 풍운아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누구나 창의적인 콘셉트와 콘텐츠 하나만으로도 한탕 치고 빠질 수 있는 춘추전국 풍운아의 시대가 아니던가. 이 시대의 자낳괴들이 판치는 현실에서 또 다른 자낳괴인 우리는 엔터테인먼트의 영역과 꼰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윤리의식의 어디쯤에서 모호하게 헤엄치고 있다. 옳은 정반합의 흐름을 도출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항상 건강하게 깨어있기를 바라며, 크리스의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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