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로 나미에와 위저의 사례에 대한 엉뚱한 단상
한 가수의 디스코그래피를 망라하다 보면 베스트 앨범에 수록된 곡이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편곡으로 수록된 경우를 접할 때가 있다. 기존 정규 앨범 구매자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저작권을 둘러싼 어른들의 사정일 수도 있겠으나, 나처럼 원곡 그대로의 감성을 소장하고 싶은 '순혈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썩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아무리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흥행한다고 해서 우리 순혈주의자들은 원곡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신진 아티스트가 내놓은 재해석본에 쉽게 귀를 내어주지 않는다. 참가자의 능력과 개성을 어필해야 하는 경연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들의 편곡은 거의 항상 원곡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친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권위적인 순혈주의자에게조차도 '원곡'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다. 이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원곡의 정의는 그 곡의 실제 기원에 기반하기보다는 그가 특정한 곡을 언제 처음 접했느냐에 근거한다. 알고 보니 원곡이 따로 있고 본인이 처음 접했던 곡이 리메이크였을 경우, 순혈주의자들이 처음 접했던 리메이크 곡을 버리고 원곡으로 갈아탈 것 같은가? 뒤늦게 원곡을 접한 경험이 압도적이지 않고서야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리메이크곡이 그들만의 원곡인 셈이다. 우스갯소리로 서두를 떼긴 했지만, 그만큼 편곡이 음악에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곡의 기초 뼈대를 형성하는 것은 선율과 가사이지만, 동일한 뼈대를 두고서도 편곡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곡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감상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여기, J-POP의 여왕이라 일컬어졌던 아무로 나미에의 은퇴 베스트 앨범 <Finally>와 청춘진행형을 달리는 관록의 밴드 Weezer의 커버 앨범 <Weezer (Teal Album)>이 있다. 나는 서로 전혀 접점이 없는 두 아티스트를 편곡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가 2017년 데뷔 25주년을 맞아 은퇴를 선언했을 때, 뒤이어 신곡을 포함해 그의 업적을 총망라한 베스트 앨범 <Finally>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다. 이 앨범은 아무로가 '자신다운 은퇴'를 맞이하기 위해 앨범에 수록될 곡들의 보컬을 상당수 다시 부르고 일부 곡들은 새로이 편곡을 거친 버전으로 수록되었는데, 편곡이라고 해서 곡의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원곡과 거의 동일한 악기 소스를 배치하되 튠을 살짝 보정하고 매만지는 정도로만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원곡의 감상은 해치지 않으면서 청자에 따라서는 원곡보다 나은 경험을 선사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ミスター U.S.A.>를 비롯하여 그가 커리어 초창기 걸그룹으로서 활동할 때의 곡을 들어보면 카랑카랑하고 앳되었던 원곡의 목소리가 성숙한 보컬로 대체됨으로써 안정적인 감상이 가능하며, <Past < Future> 앨범에 수록되었던 <Dr.>는 악기 소스에 리버브를 입히고 공간감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등 앨범의 테마인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보존하면서도 원곡의 다소 마니악한 분위기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알앤비 넘버 <Baby Don't Cry>, <Get Myself Back>은 원곡에 악기 소스를 더하고 미묘하게 피치를 올려 편곡함으로써 회춘의 인상마저 안겨준다. 이 정도의 소소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는 나 같은 순혈주의자들도 수긍하고 쌍수 들어 환영할만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3CD의 분량에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를 모두 욱여넣을 수 없어 누락된 곡들에 대한 아쉬움이 유일한 불만이라고 해야 할까.
편곡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존하고 적절하게 계승한 이 앨범은 일본 헤이세이 시대를 마감하는 시대적 유감(有感)과 박수칠 때 떠나는 그의 아름다운 행보가 시너지 효과를 내어 오리콘 차트 기준 2017년 및 2018년 연간 판매량 1위에 총 판매량 230만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위저(Weezer)가 2019년에 깜짝 발표한 <Weezer (Teal Album)>은 오리지널 곡을 싣지 않은 100% 커버 앨범이다. 후에 짧은 기간을 두고 연이어 발표한 <Weezer (Black Album)>이 등장하면서 다소 여론이 만회되기는 했으나, 청록색 앨범에 대한 일부 평단의 반응은 혹독했다. 이 앨범은 자신들의 곡을 리메이크한 셀프 커버 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곡들이 원곡의 편곡을 최대한 복사하는 방향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하필 전작 <Pacific Dream>이 상업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Weezer'라는 셀프 타이틀을 달고 나왔음에도 본 작의 오리지널리티가 부재하다는 점은 과거의 유산에 기대어 밴드의 수명을 가까스로 연명하려는 시도로 비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곧바로 Black Album이 나옴에 따라 Teal Album은 정규 앨범의 이름을 단 이벤트성 앨범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나름의 위치를 점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이들의 헌사가 평가절하된 것은 아닐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청록색 앨범의 시발점이 된 싱글 <Africa>도 그러하지만, 앨범 전체를 들어보면 원곡의 편곡이 거의 동일하게 재현되기에 이질감은 덜하나 냉정히 말해 원곡에 비해 다소 총기가 죽어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보컬 리버스 쿼모의 성향에 맞추어 키를 조절하고 장르가 다른 일부 곡들을 밴드 사운드로 재현하면서 생긴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곡에 대한 존중을 최우선으로 여긴 결과 원곡이 의도한 것 이상의 과욕을 부리지 않아 생긴 결과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청춘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들이기에 Teal Album에서 보인 태도는 밴드 특유의 영 스피릿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밴드가 쌓아온 관록의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위저 역시 순혈주의자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이러한 발칙한 실험을 행한 것은 아닐지 감히 추측해 본다. 그들의 전매특허인 셀프 타이틀 연작 대열에 커버 앨범인 본작을 합류시켰다는 것은 그들이 청록색 앨범을 제작하면서 단순히 흘러간 옛 가요의 명성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비겁한 태도로 임하였음이 아닌 순혈주의자로서 헌사하고픈 마음가짐으로 떳떳하게 앨범 제작에 임하였음을 드러내려는 취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 앨범을 두고 비록 평단은 혹평했을지언정 그들의 헌사만큼은 일류였다고 의견을 보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