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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Jan 31. 2022

생일과 트라우마가 만나면

원래는 브런치에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방학을 한 이래로 지금까지, 사실상 더는 볼 일이 없는 다 끝난 학급임에도 일부 학부모들과 나누었던 감정적인 기억들이 불쑥 튀어올라 몸서리치게 만드는 순간이 있다. 내가 교직을 그만둘 정도로 치명적인 것들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것들을 트라우마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더는 동일 인물에게 수모를 겪을 일이 없음에도 원치 않게 그런 기억을 되풀이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유쾌할 리가 없지만, 그보다 두려운 사실은 내가 겪었던 것들은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떠도는 극단적인 학부모 갑질의 사례에 비하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나의 무의식은 유비무환 마냥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나를 노출시킴으로써 더한 시련이 와도 버틸 수 있도록 단련이라도 시키겠다는 건가. 씁쓸하다.


교직에서 버티기 위해 나의 감정을 무던함으로 애써 포장해 온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대할 때는 '나는 선생님이고 너는 학생이야'라는 권위에 호소하여 그들을 바꿀 수 있을 거란 헛된 기대라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실상 작년에 처음 접해 본 '학부모의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개입'은 애초에 답이 없었다. 학부모는 내가 지도하고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내가 학생을 관찰하고 느낀 바를 부모와 상담하는 '교육적 지도'는 부모에게 있어 자기 자식만을 미워하고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삐뚤어진 행위'로 변질되었다. 결국 나는 엔간한 것은 그냥 내 선에서 해결하고 부모에게 보고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교사로서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과 더불어 비난과 폭언에 의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구태여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교직 초기에 나름 펄펄 끓어 넘치던 사명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소진해오더니 작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빈사 상태에 접어들었다. (완전한 사망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이 것에 대해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글을 남김으로써 안타깝게 여기고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각한 일중독자인 탓에 '교사 외의 다른 삶'이 없었던 나에게 무력해진 사명감은 아무래도 인생 자체를 따분하게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다. 내향적인 성격이지만 그래도 한때는 만남의 장소로 집을 제공할 정도로 사교 활동에 어느 정도 열려있던 나는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의 문이 닫혀버렸다. 작문 활동도 미뤄둔 채 엔간한 글감은 생각으로만 담아두었다 시나브로 사라지게 내버려 두었다. 나의 부족한 글솜씨가 한계에 다다른 탓도 있지만, 혹독하게 바쁜 일상을 쪼개어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오늘은 내가 한국식 나이로 36살이 되는 날이다. 평소에도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개념에 대해 적잖이 어려워하던 나는, 결국 카카오톡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생일이 노출되지 않도록 설정을 미리 바꾸어 놓았다. 별로 기쁘지 않은 생일 때문에 가식적으로 타인을 응대하고 감정을 꾸며내는 노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슬픈 일이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막상 이렇게 그동안 담아두었던 마음의 응어리를 글로써 풀어내고 나니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한동안 받아온 스트레스를 그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교사로서, 작가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에 대한 한탄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생일을 축하받지 못한 내면의 미성숙한 어린아이가 울부짖는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상처에 굴하지 않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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