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에서 단독까지
나에게 단톡방은 필요악입니다.
단톡방(카카오톡 학급 단체 채팅방, 이하 '단톡방'으로 통일)이라는 걸 2015년엔가 처음 운영해 보았다. 신세대 교사라면 당연히 학생과의 소통을 위해서 개설하는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반 구성원이 채 10명이 안 되는 소규모 학급의 담임이었기 때문에, 운 좋게도 단톡방이 가져다주는 피로감에 대해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익명성에 숨어버릴 일도, 소외받는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던 구성원의 단출함은 서로가 서로를 충실하게 엮어 주었고, 누군가가 바로 톡을 확인 안 해도 딱히 걱정할 필요 없이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전해주면 될 일이었다. 단톡방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다도 된다는 것, 그땐 그게 감사할 일인지 몰랐다.
단톡방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직면한 것은 2017년부터였다. 나를 제외한 자기들만의 단톡방을 따로 만든 반 아이들은 한 급우에게 집단으로 장기간 부적절한 관심을 주었고, 뒤늦게 부모님에 의해 해당 사실이 밝혀져 나는 학급 반 아이들 10명 남짓을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넘겨야 했다. 2018년에는 역시 나를 제외한 자기들만의 단톡방에서 담임인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던 일부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나를 험담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나는 신체적 스트레스와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해 병가를 신청해야만 했다. 간단하게 몇 줄로 요약하기는 했지만 각 사건의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충과 시행착오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내 문장력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그전에 내 인생에서 괴로웠던 순간들을 다시금 떠올리고 싶지가 않음에 양해를 구할 뿐이다.
다만 내가 지난 두 해의 사례를 통해 말하고 싶은 건, '가해자'와는 별도로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실은 새로운 단톡방을 만드는 행위가 애꿎은 중립적인 아이들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관객으로 끌어다 놓아 방조하게 만들고 그 결과 담임이 학급 전체를 불신하게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이었다. 방을 새로 만든 아이들은 애초부터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그저 좀 더 편한 학급 단위의 소통을 하고 싶어 담임을 빼려 했던 것이 전부였다. (물론 담임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이기는 하나 그러한 현상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담임만 손해다.) 어쨌거나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항상 변질된 무언가가 생겨나 문제를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동원될 필요가 없었던 아이들까지 가세하여 상황을 악화시켰다. 단순히 방관자였다는 정도에서 실망하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보아주는 대중이 있다는 점에서 영웅 심리에 도취된 것 마냥 일부 가해자들은 더욱 대담하게 행동하였고,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었던 일부 구경꾼들도 한 두 마디 보태는 과정에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너지를 자랑하는 집단지성이었다.
2년간의 트라우마를 거쳐온 나는 2019년에는 처음에는 단톡방을 열지 않고 아날로그 식의 학급 운영을 시도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이 워낙 예뻤고 학급 단톡방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반장의 요청에 오픈 채팅방의 형식을 빌어 단톡방을 개설했다. 오픈 채팅방은 연락처가 아닌 링크를 기반으로 한 채팅방이었기에 특정 사용자가 기존 채팅방과는 달리 손쉽게 일부 사용자만 모아서 부분집합을 만드는 기능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 학생이나 담임에 대한 사이버 불링을 1차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 해는 오픈 채팅방이 아니었더라도 행복했을 한 해였지만, 나는 당시의 긍정적인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의 단톡방은 무조건 오픈 채팅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2020년은 다시 연락처를 기반으로 한 단톡방을 운영했다.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과의 대면이 늦어지고 있던 와중에 학교에서는 담임교사에게 하루 남짓의 제한된 기한 내에 학생과 학부모와의 연락망 체계를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전에 없던 사태에 당황했던 나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급하게 단톡방을 만들었다. 다행히(?) 수동적인 학급 분위기 탓에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작년 한 해동안 부분 단톡방으로 인한 잡음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없었던 만큼 배가 불러진 나는 단톡방과 교실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 단톡방에 대한 쓸데없는 사유를 축적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의 경험이 내게 가져다준 고독감이 기여한 바가 크다. 정리하자면, 작년에는 몇 년간 단톡방을 운영하면서 단톡방이 어떻게 흥망성쇠를 이루었는지 - 사실 '흥'과 '성'은 찰나의 순간이고 '망'과 '쇠'만 무한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 돌이켜 보게 되었고, 올해의 경험을 통해 그 메커니즘을 재확인하였다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단톡방을 개설하는 최초이자 주요한 동기는 학급에 중요 공지사항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만, 나는 학생들과의 소통도 겸하는 이상적인 단톡방을 만들고 싶다. 극초반에는 서로에 대한 낯섦으로 인해 비교적 정보전달의 목적이 수월하지만, 이내 알람을 꺼놓은 채 내용을 확인하지 않거나 단톡방을 이탈하는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단톡방이 정보전달의 측면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시작하지만, 일과 시간 외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소통을 두고 벌을 내리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아 조종례를 이용하여 이중 삼중으로 같은 내용을 전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있으나 마나 한 단톡방을 없애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밀려 오지만, 요즘에는 코로나로 인해 정말 긴급한 비대면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 방을 없앨 수도 없다.
한편, 눈치 없이 TMI를 방출하느라 단톡방을 도배하며 피로감을 유발하는 '관종' 아이들이 생겨난다. 이 아이들은 소통을 원하지만 너무 피로 유발감이 심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된다. 담임으로서 이 아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에 적당한 선에서 호응해 주고 적당한 선에서 눈치를 주지만, 쉽지 않다. 단톡방을 확인하지 않는 아이들은 '쓸데없는 대화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기존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킨다. 모든 아이들이 골고루 적당히 떠드는 그림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일부 아이들이 단톡방을 독점해 버린다. 만약 그 '일부'들이 모범적이고 인기가 있는 아이라면 모든 아이들이 적절하게 참여하면서 단톡방이 이상적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아지지만, 모범과 인기를 동시에 거머쥔 아이가 학급에 있다면 단톡방의 차원을 넘어 그 해의 학급운영은 대체로 매우 수월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현실은 학급에 그 정도의 유니콘급 학생이 있을 확률이 극히 드물다.
서로 이러한 피로감이 누적되다 보면 아이들은 친한 무리의 친구들끼리만 소통하고 싶어 한다. 기존의 연락처 기반의 단톡방이라면 이미 방을 새로 팠을 것이고, 오픈 채팅방이라고 하더라도 오프라인에서 연락처를 공유하거나 대놓고 단톡방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묻기도 하니 결국은 시간문제다. 이 과정이 완료되고 나면 기존의 단톡방은 정말 공지사항 전달의 역할만 남게 된다. 계속 단톡방을 안 보던 학생들은 여전히 안 보고, 기존의 학생들은 공지를 확인은 하지만 더 이상 단톡방에서 떠들지 않는다. 떠들고 싶은 내용은 친한 친구들끼리 떠들면 되니까. 결국 혼자 남은 나만 쓸쓸하게 단독으로 공적인 사항만을 전달한다. 온라인 소통에 별 미련이 없는 일부 교사에게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아이들과 소통하고 싶은 나는 이러한 과정이 매년 보편적으로 되풀이되는 현실에 맥이 빠진다. 그게 교사와 학생 사이라는 근본적인 신분의 차이가 좁힐 수 없는, 나에 대한 호오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전체주의자처럼 부분 단톡방을 금지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오픈 채팅방을 고수함으로써 사이버 불링의 체급을 학급 단위로 커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는 점이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부분이랄까.
올해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없앴다, 밴드로도 갔다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현재 공지 전용방과 수다 전용방을 오픈 채팅방 형태로 따로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엇이 힘든지 수차례 얘기하고 아이들을 반강제로 설득시켰지만, 사실상 나 혼자만 떠들고 공지 전용방이 필요가 없어지는 수준까지 온 지금은 거쳐 온 과정이 그저 신경질적인 담임의 변덕 정도로만 아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게 나라는 인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되뇌며 어른의 비겁함을 한창 마음에 새기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냥 아이들과 충분히 만족스러운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싫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학급 단톡방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일대다 상황에서는 아날로그 소통을 추구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