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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Jul 30. 2021

안녕, 이루카 센세

내가 '이루카 센세'를 처음 만난 것은 2013년의 일이었다. 교직 2년 차, 시골의 특성화고로 발령을 받아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던 시절이었다. 업무를 끝마치고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고자 우연히 보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나루토」. 나는 첫 회분을 보자마자 나뭇잎 닌자 마을의 교사로 등장하는 우미노 이루카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마을의 골칫덩어리이자 낙오자로 여겨졌던 주인공 나루토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오롯이 존중해주고 이끌어주는 그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교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던 어쭙잖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때 이후로 지금 생각하면 중2병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한동안 나의 교직관은 이루카를 닮은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내가 교실 현장에서 스스로를 돌고래 캐릭터에 빗대 온 것도(이루카(イルカ)는 일본어로 돌고래라는 뜻), 브런치 작가 필명을 '해돈(돌고래의 한자식 표기 '海豚'을 독음한 것)'으로 결정한 것도 모두 이루카의 영향이다. 그렇게 한참을 나는 이루카의 그늘 안에서 살았다.


교사가 된 이래로 나는 항상 아이들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 이건 편의상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야 하는데, 먼저 '보편적인 아픔'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거나 준비가 부족해 수업이 엉망이었던 날엔 불편한 감정을 집에서까지 들고 와 끙끙 앓으며 괴로워했다. 한동안 나는 그것이 내가 목표로 하는 교사상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성장통이고 그것이 없으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어찌 보면, 나는 줄곧 '담임반=나의 업무 포트폴리오'로 여겨왔던 것 같다. 제각각의 개성을 지닌 30여 명을 한데 묶어 놓은 혈기왕성한 10대들이 내 뜻대로만 될 리 없다는 걸 이성으로는 알고 있음에도, 내 기준에서 우리 반은 나에게 늘 마스터피스여야만 했다. 내 기준에서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나는 인내하지 못하고 성마르게 분노하기 일쑤였고, 결국 방학을 제외한 학기 내내 마음이 불에 덴 것처럼 예민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보다 '개인적인 아픔'이다. 위에서 논의한 아픔은 사실 이와 비교하면 단편적인 부분이었다. 마치 나루토와 이루카의 사제지간처럼, 나는 마음에 드는 몇몇 학생들과 좀 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내 삶에는 오로지 학교일 밖에 없었기에 동료 교사와의 (딱히 트러블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 젠틀한 관계를 제외한다면 학생들과의 관계가 나의 인간관계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과 달리 현실적으로 교사와 학생이 맺을 수 있는 관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내게는 학생밖에 없었지만, 학생에게는 굳이 더 나은 선택지들을 두고서 교사에게 사적인 면을 공유하여 혹시 모를 불이익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을 거다. 옹졸한 나 자신을 위한 변명이 참 길었다. 여하튼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학생들 대다수는 그런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보이다 이내 질려하기 일쑤였다. 해가 거듭되며 몇 차례의 학생들을 거쳐가며 진작에 그만두었을 법도 한데, 성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했던 나는 쉽사리 그러한 감정을 거두지 못했고 교사로서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괴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봄은 있었으니, 바로 2019년이었다. 나는 당시 하나같이 나를 잘 따르는 사랑스러운 반 아이들을 만나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때는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했기에 딱히 화를 낼 필요도 없었고, 특정 누군가에게만 애정을 쏟을 필요 없이 모든 아이들이 골고루 나에게 잘해주었기에 개인적인 아픔도 없었다. 2020년 2월에 아이들을 떠나보내면서 아쉬운 마음에 쓴 글(「1년간 함께 버텨줘서 고마워」)에는 내가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닌 아이들의 몫이었음을 고백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 때는 마음 한편에 나 스스로도 어느 정도 좋은 교사가 된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앞으로도 교사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교사로서의 나의 효능감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작년에 나는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남녀 합반을 맡았다. 내가 맡은 학급은 아이들 대부분은 사고 치지 않는 착하고 좋은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공적인 상황에서는 최대한 함구하려 하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분명 쉬는 시간에는 자기들 나름대로 어울리며 왁자지껄 떠들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내 앞에서는 집단으로서 소통하는 것을 꺼려했다. 나는 나의 심경을 고백하는 비디오도 찍어 보고 화도 내 보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단합을 할 수 있는 계기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글쎄. 결국 대답 없는 메아리에 지친 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최대한 거둔 채 무미건조한 한 해를 보냈다.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려고 궁리하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었더라도 끝나는 마당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매년 꼭 찍던 학급 단체 사진도 코로나를 핑계로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아이들이 미웠다기보다는 평소에 사진에 본인들의 얼굴이 찍히는 것을 불편해하는 녀석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가 어색한 분위기가 돌아오는 것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작년의 개인적인 아픔은 담임 학급 바깥에 있었다. 나는 이전 해의 담임반 중 한 아이와 계속해서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항상 예의가 바르고 나를 지지해 주던 녀석이 나에게는 '나루토'였고,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사제지간이었다. 하지만 잘 되라고 했던 한 번의 잔소리가 문제가 되어 녀석은 나에게서 멀어졌고, 관계는 자연스레 깨졌다. 그렇게 2020년은 나에게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다.


남녀 합반의 안 좋은 면을 경험했던 나는 올해 학교를 옮겨야 하는 인사이동의 시기를 맞이해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소위 빡세다고 소문이 나 있는 학교로의 전근이었기에 나의 행보에 주변 선생님들은 나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만큼 나는 작년의 실패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올해 맡은 아이들은 어떻냐고? 아직 진행 중인 이야기라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딱 전형적인 중학교 2학년이라고 말하고 싶다. 착하지만 손이 많이 가는, 혼내고 돌아서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안 들어서 나를 화나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문제는 내가 그 성마름을 주체하지 못했다는 거다. 작년에는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이 고요했고, 재작년엔 마음이 잘 맞아 화를 낼 일이 없었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듯한 일상에 현명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만날 말로만 나의 마음을 전달했기에 야영이라도 해서 단합을 하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젠장.


올해의 개인적인 아픔은 아직까지는 없다. 작년에 너무도 충실했던 관계를 겪어 본 탓에 더는 학생과의 관계에서 이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확신에서일까, 나루토를 찾는 데 미련이 없어졌다. 물론 좋은 학생들이 주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에는 아프지 않기 위해 어떤 학생에게 정이 가는 것을 애써 부인하는 쪽이었다면, 이제는 좋은 학생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내 인생의 나루토는 영영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순탄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루카 센세는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루카 센세가 교사로서의 나를 성장시켰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라는 사람의 성장보다는 매 해 맡는 아이들과 나의 궁합이 얼마나 잘 맞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으니까. 이젠 아이들과의 트러블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비중보다는 그저 나의 완벽주의를 보란 듯이 비웃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는 비중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안다. 물론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나를 교사로서 나를 지탱하고 교사답게 만들어 주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다만 나에 대한 존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일부 무심한 행동까지는 도저히 사랑하지 못하겠다. 이건 양보 못 해!


개러지 락의 대표주자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기성세대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그 자신도 그토록 혐오하던 기성세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커트 코베인 같은 인류에 족적을 남길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 역시 그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나 역시 기성 교사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절대로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지 않기 위해 바짝 경계하던 시절이 있었고, 이루카 센세는 나의 그때를 상징하는 청춘의 아이콘이었다. 지금은 뭐랄까... 그저 무던하다. 화가 날 때마다 담아두지 않고 죄다 분출해 버려서 그런지 하루 일과가 끝나면 막연한 스트레스만이 자리할 뿐 그 외에는 무감각해져 버렸다. 내가 지금 완전히 기성세대에 편입하였는지 판단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이만하면 과거의 마음가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서 이루카 센세를 떠나보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안녕, 이루카 센세.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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