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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돈 Feb 09. 2020

1년간 함께 버텨줘서 고마워

2019학년도 후평중학교 2-4반 학생들에게

이 글은 2019학년도 후평중학교 2-4반 학생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팔불출스러운 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대놓고 써도 될까 주저하긴 했지만, 뭐 내가 쓰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글의 시작을 위해 내 커리어에 대한 짧은 회고를 써 보려고 한다. 담담한 어조로 글을 쓰고 싶지만, 내가 교사를 하게 되기까지 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암울했던 과거 시절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교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관적 염세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리 넉넉지 않았던 집안 사정과 내성적인 나의 성향은 다양한 것을 도전해보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주어진 것만 소화하는 수동적인 나를 만들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집이 어려우니 다른 데 한 눈을 팔 수가 없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했고, 이따금 받는 가족의 기대와 잔소리에는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는 냉소적으로 일관했다. 내가 잘 안 되면 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부담이 일궈낸 책임감은 있었지만 그런 처지를 비관할 뿐 인간미는 없었다.


나는 결단코 교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학생들과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사교성이 필요한 교사는 오히려 늘 접할 수 있었기에 일찌감치 나의 미래상에서 배제된 직종이었다. 내가 사범대로 진학한 것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라는 가족에 의한 타의적 결정이었고, 임용시험을 준비한 것도 그동안 한 게 아까우니 그저 주어진 기회를 잘 써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와중에도 나의 뒤틀린 마음은 그동안 가족이 시키는 대로 순응했으니, 만약 첫 임용시험에서 떨어지면 주저 없이 훌훌 털고 다른 길을 알아보겠노라 스스로에게 연거푸 다짐을 했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한 지 머지않아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합격이 매우 절실해졌고, 이윽고 공부하는 틈틈이 기도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하느님, 비록 교사가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란 저이지만, 꼭 합격시켜 주세요. 저를 합격시켜 주신다면 열과 성의를 다해 진심으로 교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지금껏 살면서 군 복무 시절과 임용시험 준비생 시절만큼 열심히 기도한 때가 있었던가.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것인지 나는 운 좋게 초수에 임용시험을 합격했고, 고향에 있는 한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느 신규교사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열의는 있었지만 그 에너지를 어떻게 최선을 다해 쏟아야 하는지는 잘 몰랐던 시기. 사실 내가 교사로서 힘들었던 것은 수업이나 교직 사회의 특수성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물론 영어교사로서 발전이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환경은 내가 근무지를 도시로 옮기도록 만들었지만, 그보다는 교사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인 아이들과 관계 맺기가 가장 어려웠다. 물론 대체적으로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이었고 같은 고향 선후배 사이로서 나에게 대드는 아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고 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나의 모든 삶을 교직에만 올인하였으니, 아이들에게서 응당 모든 사회적 욕구를 충족받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성인인 나부터도 완벽하지 못한데, 아직 성장 중인 미성년자에게 온전함을 기대한다는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나는 진심을 다했음에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고 인격적으로도 나아지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줄곧 분노하고 마음 아파했다. 이렇게 교사가 될 줄 알았으면 미리 평소에 대인관계를 폭넓게 쌓아 놓는 건데. 모든 관계에 연애하듯 전력투구하는 나 자신이 너무 딱하게 느껴졌다.


교사가 되어서야 뒤늦게 적당한 거리두기를 학습하기 시작한 나는 그 무렵부터 '교사로서 공적으로 기대하고 사적으로 기대하지 않기'라는 원칙을 세웠다. (사실 기대 자체를 않으려 했지만 교사이기에 공교육의 희망까지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마음처럼 되면 그게 마음인가. 학교를 도시의 남자중학교로 옮겼지만 고민의 본질은 해결되지 않았다. 대상자들이 어려지고 더 말을 안 듣긴 했지만 여전히 예쁜 아이들은 있었고, 전 학교와는 달리 내가 아이들의 진로에 보다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입장이다 보니 기대를 쉬이 내려놓기 힘들었다. 이러다 보니 나는 항상 내가 어딘가 고장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지만 실상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애정결핍자. 하지만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느냐며 그냥 더 열심히 하다 보면 원하는 그림에 닿아있을 거라고 밀어붙이던 나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번아웃을 선언하고 말았다.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의무감에 학급 사업을 따오고 첫날부터 모든 것들을 치밀하게 계획해 두었지만 나의 욕심은 오히려 아이들의 반발을 샀고, 고쳐나가기 위해 거듭했던 소통의 시도는 오해와 약점 거리를 제공했다. 이토록 열심히 했는데 어째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하던 나는 어느덧 정신과 상담에 의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잠시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관리자를 수차례 설득시킨 끝에 병가를 신청할 수 있었다.


병가를 내긴 했어도 학교 업무는 별도로 지속해야 했기에 느긋하게 쉬지는 못했지만, 그 잠깐의 멈춤은 내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나라는 사람은 줄곧 완벽주의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의 양보다 힘을 빼는 것이 필요했다. 사실 최선을 다 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게 여전히 잘 되지 않지만, 교직을 장기적으로 지속해나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선택이었다. 분명 일이 년 더 하고 때려치울 건 아닌 게 확실했기에, 나는 나라는 사람은 좀 더 비워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독이기 시작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이상적인 담임 학급을 꿈꾸고, 교직을 거듭해 나가면서 '인생 담임반'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믿는다. 나는 욕심이 많아 그런 학급은 아직까지 내게 없었다고 믿었고, 언젠가는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는 2019년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학년 초에 교직 8년 차 경력이지만 아직 보이는 게 없다는 회의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예년 같았으면 주 2회 빡세게 점검하던 1인 1역이나 학급 단톡방 같은 것도 내려놓고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기준으로만 학급을 운영했다. 애초에 우리 반이니까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접고선 오히려 실수할까 봐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내가 전략적으로 비워놓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례가 끝나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고 시답잖은 농담을 한다. 종례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종례를 길게 하면 짜증을 내던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나에게 너무 되물어서 내가 대화의 차례를 기다려야 할 지경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이지만 운동장에 나가 잘 뛰어놀고 오는 녀석들이라 교실 안에서 딱히 사고를 치지도 않는다. 이외에도 사실 칭찬할 것들이 많지만 이 아이들의 결정적인 특장점은 남을 존중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서로 미친 듯이 장난치고 놀려도 절대로 선은 넘지 않았으며, 나의 실수를 험담하지 않고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라고 털털하게 넘겨버리곤 했다. 학급 일부가 아닌 전체에서 존중받는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나는 아이들과 있으면 존중받는다는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나는 내 기준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 준 게 아니라 빈 공간을 주었을 뿐인데, 아이들이 내게 이렇게 대해주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초여름 무렵부터 나는 이번 학급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내게 호응해줄 수 있는 아이들을 그냥 적당히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계획에 없었던 학급 야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전에도 아이들을 위해 학급 야영을 해오긴 했지만, 예전에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한 의무감이 컸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아이들을 위해서 했다. 예정에 없던 것을 급하게 준비하게 되어 프로그램은 가장 적게 운영했지만 호응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났고, 나도 아이들에게도 정말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야영을 성황리에 끝마친 이후로 그 이상의 이벤트를 해줄 수는 없었지만 드문드문 소규모 학급 이벤트를 열어줌으로써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더 해주려고 했고, 무엇을 하더라도 아이들과 의논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완벽한 학급이란 건 없어서 자잘한 문제는 꾸준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담임으로서 누리는 행복이 그러한 사소함을 덮고도 넘쳐흘렀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2020년 1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종업식을 했다. 다시는 이런 학급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지만, 나는 행복했던 추억을 거름 삼아 앞으로도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나와 아이들을 기대하며 그 씁쓸한 마음을 희망으로 바꾸고 싶다. 나는 내가 몇 달 쉬었다고 갑자기 대단한 교사가 되어서 좋은 학급을 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꾸린다'기 보다는 나도 학생들도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버틴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비단 이번 학급뿐만이 아니다. 내가 그동안 맡아왔던 학급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전 세계의 수많은 교사들. 우리는 그렇게 한 해 한 해 함께 성장하며 버텨나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1년간 함께 버텨줘서 고마워, 2-4반. 사랑해♥



학급 야영 때 익명으로 설문조사했던 결과. 솔직히 이 질문을 만들 때 나를 만난 것이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삐졌다가 다시 학급 단톡방에 들어와도 반갑게 맞아주는 아이들


종업식 이후에 찍은 단체사진을 전달하면서


아이들이 종업식 전에 나를 위해 마련한 이벤트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상장
나도 질 수 없지! 종업식 때 아이들에게 나눠 준 1인 1상장
1년간의 활동을 갈무리한 2-4반 종업식 기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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