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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무관심 Mar 06. 2024

<더 웨일> 리뷰

찰리는 정말 고래였을까



JUST WRITE ME SOMETHING HONEST.

제발 솔직하게 쓰란 말이야.


 그러나 솔직함의 대가는 가혹하다.

 마지막 수업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초고도 비만의 찰리를 보게 된 학생들은 핸드폰을 들어 그를 찍기 바쁘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나마 유대를 나누었던 피자 배달부는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뒷걸음질을 치며 달아난다. 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던 엘리의 에세이는 낙제점을 받는다.


 내면의 진심에 솔직하게 답한 결과는 8년 전에 더 참혹했다. 아내와 딸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사랑하던 연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찰리는 그렇게 심연을 향해 가라앉았다.


 영화의 제목처럼, 거동조차 힘든 찰리의 외형처럼,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되뇌는 모비 딕처럼, 고래는 그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은유로 보인다. 사회적 편견의 칼날이 불쌍한 큰 짐승을 겨누고 있는 것만 같다. 찰리는 어느덧 감정을 잃었고, 자신을 죽이려는 세상의 집착에도 무던해졌다. 그런 줄로 알았다.


 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다 해갈수록,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영화의 전개는 에이해브와 모비딕의 사투와 닮아있다. 하지만 모비딕에 대한 에이해브의 맹목은, 오히려 솔직함에 대한 찰리의 집착과 겹쳐진다.


 ‘에이해브도 참 가엽다. 그 고래만 죽이면 삶이 나아지리라 믿지만, 실상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될 테니까.’

  

 찰리는 엘리가 에세이의 어떤 부분에 감화한 것일까? 엘리는 책이 슬펐으며, 에이해브가 가엾게 느껴지며 인물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모비 딕>이라는 작품 자체를 넋두리라고 표현한다. 찰리가 에세이를 인생의 보물로 느꼈던 이유는 고래가 아니라 인물들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면의 자유를 좇았던 찰리가 에이해브로 대표되는 선원들이라면, 고래는 세상의 도덕률이자 질서다. 그것은 간음한 자를 심판하며, 동성애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하다. 에세이의 진실함보단, 문장의 구조와 논리에 중점을 둔다. 질서는 감정이 없고 자신을 파괴하려는 이들의 집착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에게 실제로 도전했을 때 가차 없는 응징을 내릴 뿐이다. 


 - 내면의 순결함을 향한 찰리의 외침은 그의 외면을 추악함으로 이끌었다. 그 추악함을 숨기기 위해 철저히 어둠으로 내려앉은 그의 유일한 구원은 딸 엘리뿐이다. 찰리와는 달리 그녀는 바르게 자라야 한다. 하지만 엘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그 역시 확신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은 이미 철저히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향해 거침없는 욕설을 SNS에 올리는 엘리를 응원하면서도 끊임없이 메리에게 그녀를 잘 키우라고 강요한다. 부녀를 이어주는 유일한 속성이 부디 그녀에게선 축복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삶은 엘리를 통해서만 긍정될 수 있으니까. 8년이라는 시간동안 고립된 아버지는 자신의 이상향으로서만 딸을 정의한다. 그에게서 엘리는 고래가 되었다. 


 그런 찰리는 엘리가 토마스에게 했던 행동들을 일방적으로 해석한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진을 찍고, 그와의 대화를 몰래 녹음했던 엘리가 그를 위해 그랬다고 믿는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을 위해 그런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얘기했지만, 확신에 찬 그에게 그런 말들은 들리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한번 에세이를 읽는 엘리가 진심을 다해 아빠를 부를 때, 찰리의 몸짓은 해수면을 힘차게 차올라 존재를 과시하는 향유고래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인간이 주마등을 떠올리는 이유는 죽음이 닥친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을 기억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에게 구원을 준 것은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랬던 그가 본 엘리의 마지막 표정은 아빠를 향한 애절한 사랑으로 충만했을까.


 오직 커다란 고래를 죽이기 위해 살았던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게 던진 작살의 밧줄에 목이 감겨 바다 깊은 곳으로 끌려간다. 그것은 에이해브의 구원이었을까. 고래를 꿈꿨던 찰리의 구원 또한 화면을 눈부시게 채운 하얀빛 속에서 흩날릴 따름이다.


p.s 작품 내내 찰리와 시선을 공유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결코 그의 동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상황은 철저히 집안과 복도에서만 이루어진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창문밖의 실루엣들, 의미를 헤아릴 수 없어 답답했던 여러 장면들은 관객들의 상상력 마저 건물 안으로 제한한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씬은 엘리와 토마스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엘리의 기행, 토마스의 과거와 현재, 메리가 앨리를 만났던 장면 등 찰리가 모르는 이야기들 전부는 보여주기가 아닌 말하기로 연출된다. 전지적 찰리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구조상 앨리와 토마스의 대화 장면은 찰리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작동한다. 집 밖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그저 듣기만 할 뿐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둔 작품의 물리적 한계는 영화에서도 공간의 제약을 만들어 찰리와 관객을 동일한 조건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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