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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Jul 11. 2023

인류를 향한 경고 #1/2

일상으로의 회귀

먼저 이 글은 아래 기사를 읽고 떠오른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한 글임을 밝힌다.


[세계 최초 A.I 로봇 기자회견 “인간 일자리 뺏지도 반항도 안해”, 2023.07.08., 연합뉴스, 유한주 기자]


‘세계 최초 A.I 로봇 기자회견’이라는 제목을 단 뉴스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와 함께 제공된 사진을 보면서 단순하게 떠오른 이미지를 정리해서 말하면, 우선 80년대 의상실 쇼윈도가 연상되었다. 인간의 형상을 흉내 냈지만, 인간이라고 하기보다 사실 마네킹에 가까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거의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인공지능은 사실 성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여성의 모습을 입혔을까? 그리고 왜 로봇의 최종 형태를 꼭 인간의 형상과 유사하게 보이도록 하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순차적인 풀이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하나씩 순서대로 생각을 풀어가 보겠다.

먼저 직업을 운운했지만 대체로 인간을 위한 ‘서비스’ 형태, 즉 ‘보조와 지원’이라는 말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편안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몰라도 각 제작사와 제작자는 그런 성향의 일은 여성에게 알맞으며 어울린다고 생각한 듯하다. 구시대적 발상이지만 따뜻한 감성이나 ‘어머니’로 대표할 수 있는 여성적 특성에서 남성보다는 어울릴 듯도 하다. 다만 뻔히 읽히는 그 의도나 이유는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성별이 없는 로봇에게 굳이 인간의 성별 색을 입혀 표현함으로써 로봇들은 보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랜 역사적 편견이 무의식적으로 고착된 형태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산물이 상품으로 생성되는 과정에서 A.I나 로봇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다른 상품처럼 소비자의 선호나 호감을 끌어내기 위해 가장 취약점을 커버하는 수단으로 성(性)이 상품화되었다는 점에서 달갑지 않다.


남성이냐, 여성이냐의 성 차별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의 형상을 모방한다면 어쩔 수 없이 두 성별 중에 선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왜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느냐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선택지밖에 없음이 뻔한데도 굳이 인간의 형상을 선택한 이유. 그 이유 역시 위에 설명한 자본주의적 상품성에서 비롯된다.


쇳덩이는 사람에게 이질적이고 친근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간호사 로봇 ‘그레이스’가 기존의 공업용 로봇처럼 강철로 된 로봇 팔을 지잉~ 지잉~ 거리며 주사를 놓으려 한다면 누가 자기 몸을 편히 맡길 수 있을까? 어린아이가 느끼는 주사 자체에 대한 공포에 더해진 무엇인가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거부감과 두려움을 먼저 느끼게 할 것이다.


로봇이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의 모습을 한 ‘그레이스’는 시각적 차원에서 쇳덩어리보다 친근하게 느껴질 것은 맞다.

문제는 이들이 소비되는 ‘상품’으로써 세상이라는 시장에 나온다는 점에서는 확실하게 따져볼 것이 있다.


인간 형상의 제품은 외형의 친근함 때문에 사용할 당시에는 좀 더 편안할지 모르지만,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결국 ‘인간 개체의 상품화’라고 볼 여지가 생긴다. 실제 소비자보다 더 많은 시각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뇌에서는 실제 인간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인간을 상품화하고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판매 중인 섹스돌의 경우도 인간 형상이라는 점과 인간 성(性)의 상품화라는 문제에서 범사회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인공지능(A.I)의 ‘인간 형상화’ 현상의 밑바탕에는 인간 내면의 오만함이 있다.

신(神)을 갈망하던 인간이 드디어 신 자체가 되려는 오만함이다. 너무 과장한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 그렇게 본다. 참고로 글쓴이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사실 ‘무신론’이라는 말 자체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튼 사람들의 상상 안에 자리 잡은 신(神)이라는 존재는 단순하게도 존재를 창조해내는 영역이 그 전부이고 그 점이 인간들에게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로 추앙받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인간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창조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가 문제다. 인간의 굴레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직 인지조차 못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더욱 위험하다.


영화 <혹성탈출> 시리즈를 보면 원숭이들은 원숭이의 형상을 모방한 신을 모신다. 물론 영화 자체도 원숭이들의 생각은 0.1도 포함되지 않았고, 순전히 인간들의 추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을 꾸준히 열망했고, 급기야 움직이고, 생산하며, 기억하고, 말하는 수준의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감성뿐 아니라 개별성은 결코 다른 인간에 의해서 생성되거나 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세계에 인간과 유사한 새로운 존재의 혼합은 기존 인간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하게 인간 차별의 한 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모호함을 인간이 조작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명백한 것은 A.I가 되었든 로봇 형태가 되었든 간에 그 뒤에는 반드시 인간이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제국주의 국가가 아직 미개한 신세계를 침략해 원주민을 노예화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을 노예로 선별한 원인이 어디에 있던가? 같은 사람으로서 충분히 공존할 수 있었음에도 주인과 노예로 구별된 이유는 백인들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차별과 편견 때문이었고, 그들의 선택은 시대적 상황을 타고 당위가 되었다.


당시 노예시장에 나온 흑인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을까? 감정이 없었을까? 고통을 느끼지 못했을까?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노예시장에 죽 늘어놓고 ‘너희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 거지?’라고 묻는다면, 상품으로 나온 노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의 일자리와 가족, 사회, 국가를 빼앗고 복수하고 말겠다!’라고 대답할까? 그들은 분노를 숨기고 가슴에 그 말을 묻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럴 수 없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현재를 보라. 흑인 대통령이 나오고 흑인의 인권은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 상식이 되었다. 오히려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알리고 차별자들을 혐오하는 세상이다. 그렇게 변화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사람이 인권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내 개인적 생각은 근본적으로 선악을 모두 가진 인간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로 ‘거짓말하는 인간’을 꼽을 수 있다. 어떤 필요든 의도이든 원인이나 이유가 되었든 간에 인간은 거짓말한다. 물론 거짓말이라는 것이 나쁜 의도로 거짓말한다는 부정적 견해가 크지만, 거짓말한다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이고 인간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짓말의 핵심은 거짓말을 듣는 상대가 거짓임을 모르게 하는 데 있다. 인간의 형상뿐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하고 성장하고 있는 A.I가 그런 영역까지 모방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모방을 인간은 알아챌 수 없다. 바로 그 점이 거짓말의 가장 핵심이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생각하고, 아니 정확하게는 계산하고 조합하는 AI는 인간의 생각하는 속도를 능가한다. 인간이 10년, 100년 걸려 진보하고 개발한 성취를 한 달 내지는 단 몇 시간 만에 이룰 수 있는 기계다. 쉽게 말하면 인간과 대립하는 존재가 된다면 인간은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AI가 인간의 육체보다 훨씬 견고하고 강한, 게다가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있는 소재로 이루어진 몸체에 담기는 형태가 로봇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깡통 형태의 컴퓨터가 인간의 형상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고, 중앙에 자리한 중앙처리장치(CPU)가 이름만 다를 뿐 바로 A.I가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 스스로 인간과 기계 또는 전자장비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 경계의 모호성은 쉽게 이미지로 그릴 수 있도록 설명하자면, 사람이 삽을 들고 자기 무덤을 열심히 파 내려가는 모습이라 하겠다.


‘간호사, 가수, 화가’ 등 다양한 직업의 휴머노이드라고 표현한 것도 기사 전체적 맥락에 맞춰 보면 모순이 있다.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지 않고 시너지를 내는 보조 도구를 자임하면서 그들은 많은 인간이 갖지 못한 직업군을 이루고 있다.


직업은 일반인들에게는 부유층이나 최고경영자와는 다른 별세계의 생계다. 휴머노이드의 대답은 혹시 그를 제작한 기업체 오너의 뜻이 반영된 결과는 아닐까?

‘학습’ 받는다는 건 때로는 생각보다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가 집중된 세기의 인터뷰에서 나온 답변은 마치 정해진 정답처럼 고착될 우려가 있다.

이름도 있고, 몸체도 있고, 말도 하며, 직업도 있다. 형태는 아직 마네킹 수준이지만 인간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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