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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네오 Feb 05. 2024

웰컴투 삼달리 #1/4

01. 개천에서 용 난다?

드라마 정보

방송 : JTBC, 2023.12.02.~2024.01.21., 총 16부작
연출 : 차영훈, 김형준
극본 : 권혜주
출연 : 
지창욱(조용필 역), 신혜선(조삼달 역),
[삼달이네]
김미경(고미자 역, 삼달 어머니), 서현철(조판식 역, 삼달 아버지),
신동미(조진달 역), 강미나(조해달 역), 김도은(차하율 역)
[용필이네]
유오성(조상태 역, 용필 아버지), 오우리(부미자 역, 용필 어머니)
김자영(양금옥 역), 유순웅(부대춘 역)
[친구들]
강영석(부상도 역), 이재원(왕경태 역), 배명진(차은우 역)
[그 외]
양경원(전대영 역), 김민철(공지찬 역), 조윤서(방은주 역),
한은성(천충기 역), 김아영(고은비 역), 이도혜(양지은 역),
백현주(오금술 역), 김미화(양부자 역), 윤진성(전혜자 역),
이태형(한석규 역), 김현목(강백호 역), 강길우(고철종 역),
스촬(김만수 역)
<정보출처 : 네이버 & 나무위키>     


줄거리 요약

제주도의 삼달리라는 마을에서 거의 같은 시간에 나고 자란 소년 용필과 소녀 삼달이.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가던 중, 어느 날 삼달이가 사진작가의 꿈을 이루겠다며 서울로 떠난다.
 독한 마음을 먹고 나선 삼달이는 마음고생도 많이 하지만 끈질긴 노력 끝에 꽤 알려진 패션계 사진작가 ‘조은혜’로 성공한다.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셈이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방은주에게 모함당해 하루아침에 추락을 맛봐야 했다.
 마녀사냥식 여론을 피해 고향 마을로 돌아온 삼달이와 고향 마을을 지켜온 용필이가 재회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1. 개천에서 용 난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차마 읽기 힘든 뉴스들과 더불어 많은 스트레스가 머리카락을 우수수 떨구고 떠난다.

도대체 여름에 얼마나 더워지려 하는지 겨울인데도 우중충하게 비가 자주 내린다. 우중충한 하늘과 우울한 소식들… 그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그저 달달한 로맨스도 괜찮겠다 싶어 찾아본 드라마가 바로 <웰컴투 삼달리>였다.


전체적인 이야기 줄기는 조삼달과 조용필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청소년 시절을 거쳐 청년이 된 두 사람의 풋풋한 로맨스가 주축이다.


아름다운 것일수록 이루어 내기는 힘든 것일까?

뜻밖의 비극이 두 사람을 가로막는다.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지길 응원하며, 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갈등을 잔잔하게 풀어가는 방식이다.


일단 드라마의 주요 배경은 제주도다. 대한민국 가장 남쪽의 거대한 섬 제주도.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실제로 있다. 삼달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라고, 실제 존재하는 마을 이름이었다.


지방 중에서도 외딴 이곳을 드라마에서는 ‘개천’으로 표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은 서울을 뺀 나머지 지역은 다 개천이다. 몇몇 지방은 사람이 없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서울로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얘기하면 그들은 왜 고향을 버리고 서울로 향할까? 왜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 못하고 서울로 가야만 할까? 바로 ‘인식’이 만들어 낸 ‘용의 도시’와 ‘개천’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선거철만 되면 서울을 더 거대화하고 도시화가 집중되도록 만드는 공약을 남발하는 것을 보면,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온 국토를 ‘개천’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공약을 남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활동 거점이 적어도 서울이기에 오직 서울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서울은 우리의 수도이니까 당연히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로 키우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다만 서울이 100이라고 하면, 그 외 다른 지역을 못 해도 50만 만들어도 이 좁은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이 더 좁은 한 곳으로 몰려들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역 균형 발전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웰컴투 삼달리>의 남자 주인공 조용필과 여자 주인공 조삼달의 어머니들은 둘 다 해녀다. 용필의 어머니는 ‘부미자’, 삼달의 어머니는 ‘고미자’로 이름도 같고, 두 사람은 자매 같은 친구가 된다.

물론 작가의 촌스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명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뭐,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따질 생각은 없지만, 끝에 ‘자’로 끝나는 여성의 이름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써, 일본식 여성 이름의 ‘~코’ 또는 ‘~꼬’를 한자로 쓰면, 이것이 ‘아들 자(子)’가 된다. 동명이인의 설정으로 선택된 이름이, 조용필을 좋아하는 소녀들의 이름이 하필 좀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짚어봤다.


친자매 이상으로 친했던 두 사람은 출산도 같은 날 한다. 두 미자는 가수 ‘조용필’을 너무나 좋아했는데, 부미자는 아들 이름을 조용필이라고 지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그래서 <단발머리>를 시작으로 가수 조용필의 노래가 유독 많이 나온다. 특히 조용필의 노래 <꿈>은 이 드라마의 OST로 쓰였다. <꿈>의 가사를 보면 <웰컴투 삼달리>에서 조삼달의 처지만 나타내기 위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지방 청년들의 어쩔 수 없는 상경과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의미가 절절하게 쓰여있다.


친자매처럼 지내며 알콩달콩 행복했던 그녀들의 비극은 초보 해녀 고미자의 작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사고가 일어나고 부미자가 익사하고 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용필의 아버지 조상태는 고미자를 원수처럼 생각하게 되고, 두 집안의 적대는 사랑하는 용필과 삼달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을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다.

삼달이는 사진작가의 꿈을 이룬다며 서울로 떠나지만, 사실 그녀가 떠나게 된 데는 더 중요한 원인과 이유가 있었다.


어쨌든 처음 화두로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다. 앞에서 살짝 언급한 대로 사람들은 서울만 사람 사는 곳처럼 여긴다. 사실 서울은 너무 과밀한 인구, 극심한 교통정체,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그다지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다만 편리함을 위한 환경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여유나 낭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지방(개천) 사람이 상경하여 서울에서 오래 살면 사람 자체가 바뀐다. 서울은 그런 곳이다.


이런 특성을 <웰컴투 삼달리>에서는 고향으로 돌아온 삼달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함께 일했던 어시스턴트들이 삼달이를 찾아왔을 때, 서울에서 느꼈던 조은혜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조삼달을 보며 낯설어한다.


사는 터전, 환경은 이처럼 중요한데, 왜 우리는 고향(지방)을 개천이라고 천시하고, 서울은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할까? 규모 면에서만 큰 강과 작은 개천이 아닌,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방식의 관념이 지역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전체가 균형 있게 발전해야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인데, 대한민국에는 오직 서울만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음은 ‘용(龍)’에 대한 딴지다. 삼달이와 조용필은 각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서울에 가서 용이 된 것이 아니라 두 청춘은 각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노력이 더해져 재능이 되었다.


용필이 좋은 예다. 물론 그도 이유가 있어 삼달리를 떠나지 못한 것은 맞지만, 용필은 서울로 가지 않아도 이미 용이었다. 삼달이는 사진작가로, 용필은 기상 예보관으로 이미 두 사람은 용이었다는 말이다.


현실의 우리 아이들은 모두 용이다. 그들이 개천의 미물이 되거나 용이 되는 갈림길은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 서울에서 성공하는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 ‘용’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주변 상황과 환경이 도시의 아이들을 사실은 ‘용’이 아니라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

친구를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지 않고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우정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들이 경제적 부를 성공과 동일시하며 공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부는 자신을 찾아가는 단계이지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배경을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는 이유가 도구화되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스펙을 위해 허위와 거짓까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저지를 수도 있다. 영혼을 팔고 온통 거짓된 짓으로 권력과 경제적 이익만을 취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더러움조차 알지 못하는 똥파리처럼 살다 죽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드시 서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터전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다정하며, 친구들과 경쟁하지 않고 마음대로 놀았으면 좋겠다.


오래전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그립다.

어른들의 경쟁심리는 곧 도시화에서 왔고, 도시화와 경제적 차별은 서구의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아이들의 현실은 경쟁의 전쟁터이고 적자생존의 방식만 남아버렸다.


순박함을 잃고, 그저 약아빠지고 똑똑하기만 한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고, ‘어른’의 의미도 모른 채 다시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들은 다시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소나기(황순원의 소설)’는 사라지고 ‘진화론’만 남는다. 결국 우리 미래는 그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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