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지막 네오 Feb 13. 2024

웰컴투 삼달리 #2/4

02. 괴물을 길러내는 사회

2. 괴물을 길러내는 사회


여러 가지 범죄가 점차 지능화되어 가는 것처럼, 폭력은 점점 신체보다는 감정을 도려낸다.

정말 아픈 것은 몸이 아픈 것보다 사람 감정을 후벼 파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세상은 점점 악랄해지고 잔인해지는 것이 틀림없다.


그 방법도 다양하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첨단과학의 발전과 함께 생명공학과 A.I와 같은 침범으로 오염되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새롭게 알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허락되지 않던, 어떤 사회적 약속을 쉽게 넘어서며 일상화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장점처럼 부각되어 발전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죽음보다 지독한 트라우마로 자리하며 온 생애를 쫓아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유행어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라고.


예전에는 힘이 세고 난폭한, 주로 남성들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휘둘러대는 게 폭력인 줄 알았다. 작게는 개인 간의 폭행에서 크게는 국가 간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때는 남성들의 폭력성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이제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보니,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인 형식만은 아니었고 또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 보기도 어렵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살다 보니 폭력이라기보다는 마지막 생존의 아우성이 그런 형태로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는 말이다.


폭력의 세세한 전체를 하나하나 따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웰컴투 삼달리>에서 다루었던 현대인들의 피해망상에 따른 매우 이례적인 공격성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떤 관계가 지옥 같은 연결이 되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괴롭힌다면 그건 분명한 폭력이다.


현대의 합법적 법 테두리 안에서 여론의 흐름을 이용하는 마녀사냥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고약한 현상이 되었다.


강한 사람이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폭력이 분명하다.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도되거나 어설픈 코스프레에도 어리석은 대중은 현혹되기 쉽다는 점이다.


지구촌 전체가 연결된 현대 사회에서의 특징은 괴롭힘도 점점 지능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알기 어렵고, 생각은 단순해지며, 말은 쉽게 내뱉는다. 온 천지가 마이크고, 쉽게 ‘싫어요, 좋아요’로 표현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책임감 없이 타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넣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


드라마 <지옥>에 대한 글에서 짧게 다룬 것처럼, 사회라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죽음보다도 이런 여론화에 따른 마녀사냥식 공포에 민감하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당하는 것도 무서운 세상인데, 이것은 어쩌면 인간 사회 전체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이니 무섭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 내부의 개인은 이런 부당함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반응한다. 이러한 대중 심리를 악용한 사례가 바로 <웰컴투 삼달리>에서 방은주가 삼달이에게 한 행위이다.


사실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행세를 하고 여론을 호도한다. 한 사람을 매장시킬 만한 거짓을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어리석은 대중은 진실보다는 더 자극적이고 잔혹한 이야기에 혀를 놀려대는 걸 좋아한다.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라 해도 그 우매함은 대중이라는 다수로 뭉치면 얼핏 콜로세움에서 피 튀기는 살해 행위에 열광하는 악마들처럼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대중의 어리석음이 나쁘다면, 사실 더 나쁜 사람들도 있다.


이런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현실 정치는 그 상황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모르고 저지르는 어리석은 사람들보다 알면서 그 흐름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나쁘다.


방은주가 삼달이를 괴롭히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특별히 없다.

시기? 질투? 구태여 그 이유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 정도일 텐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질투의 원인이 될 만한 사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은주는 왜 조삼달을 모함하고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했을까?


시기나 질투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이유는 방은주 스스로 대답하는 답에서도 알 수 있다. 삼달이의 자리를 빼앗았지만, 일은 감당할 수 없고 엉망이 되었다. 그러자 천충기가 방은주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그녀의 대답은 “그냥…”이었다.


서울에 있는 조삼달과 제주에 있는 조삼달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울에 있는 조삼달은 아무런 조력자가 없는 홀로 세상에 나선 아기새와 같다. 아주 작은 공격에도 쉽게 허물어질 연약한 존재처럼 보인다.


악의(惡意)를 가진 사람들의 타깃은 항상 약자다.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 겉보기에는 잘나고 강한 듯 보이는 약자는 더욱 좋다. 가해자들은 그런 연약함을 공격하면서 즐거워한다. 자기 마음대로 이리저리 굴리며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며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잔혹함 또한 인간만이 가진 원초적 어둠임을 인정해야 한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등장인물들은 항상 선과 악으로 구별된 것 같다. 우리가 멀리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있고, 이야기에는 애초에 주인공과 조연, 악역이 정해져 있어서 그 틀 안에서 보기 때문에 시청자는 항상 정해진 방향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극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고,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이러한 이해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명백한 선악을 구별할 수 있던가? 애초에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판별할 수 없는 사안이 더 많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악의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나의 짧은 생각에 뚜렷하게 떠오르는 두 가지는 ‘욕심’과 ‘미움’이다.


누구나 좋은 것은 내가 더 많이 갖고 싶고,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은 빼앗기도 한다. 욕심 때문이다. 욕심은 거짓말처럼 첫 욕심이 이후로 이어지는 데 문제가 있다.

욕심은 미움도 부른다. 감정의 동물인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욕심이 먼저 자리한다.


시대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에서 창과 칼, 총 따위 폭력은 어느 정도 몰아냈지만,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흉기들은 오히려 점점 커지고 다양해지며 지능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사회 구성원 전반이 이러한 변화를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과 화합하기보다는 밟지 않으면 밟힌다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게 올바른 교육인 양 가르친다. 방은주라는 인물도 이렇게 생겨난 괴물이다.


(#3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웰컴투 삼달리 #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