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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은성 Nov 23. 2021

나의 늙은 시바견

그렇게 너와 시작된 두번째 동거

나와 내 늙은 시바견과의 인연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막 성인이 된 아이가 반려견을 입양하는데 엄청난 각오가 있겠는가.

입양 이유는 단순했다.


반려견을 키우고 싶다.


그 당시 내 수중에는 30만 원이 있었고, 그 금액으로 입양이 가능한 강아지가 시바견 블랙탄이었다. 아니다, 나는 이 아이의 검은색 털, 눈 위의 갈색 점, 동그랗게 말려간 꼬리에 반해 입양하기로 마음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를 찬찬히 떠올려보면, 이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던 순간이 결정적이어서, 40만 원이라도 50만 원이라도 무리해서 내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을 것 같다.


그렇게 조그마한 생명체를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내 동거녀였던 언니의 얼굴은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그럴만했다. 언니에게 상의 한번 하지 않고 멋대로 데리고 왔으니까. 언니의 당연한 반응을 뒤로한 채 귀엽게 꼬물거리는 검은 생명체의 이름을 고심하던 나에게 언니는 놀리듯,


“야 이렇게 촌스러운 애한테는 호성이 같은 이름이 딱이다!”


라며 호성아,라고 자꾸만 불러댔고, 그렇게 농담처럼 대충 지은 이름에 신기하게도 꼬리를 흔들며 반응했다. 그 뒤로 나는 별 수없이 이 생명체를 호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성이와 첫 동거를 하는 일 년 동안, 나와 이 어린 생명체의 공생은 순탄치 못했다. 어설프게 호성이를 관리했던 탓에 언니와 매일 싸웠고, 그걸 보다 못한 부모님이 이 아이를 본가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이다.

그 뒤로 호성이는 쭉 본가에 살았다. 나는 본가에 갈 때만 산책을 시킨다거나 목욕을 시키는 정도로만 케어했고, 나머지는 부모님이 키웠다. 그곳에서 호성이는 반려견으로서 엄하게 교육을 받기도,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찾지 않는 나를 아주 천천히 잊어가는 듯 했다. 그 망각의 시간 동안 생기 넘치던 두 눈은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하얗게 변해갔고, 콧잔등에 난 수염도 세기 시작했다.

그쯤이었다. 긴 유학 생활과 방랑자의 삶을 끝내고 서울에 정착해 호성이와의 두 번째 동거를 결심했던 때가. 그리하여 나는 부모님께 선언했다.


“이제부터는 호성이 제가 데리고 살게요. 아니, 살고 싶어요. 제가 입양한 아이인데, 제가 이 아이의 마지막을 책임져야죠.”


늙은 애 피곤하게 왜 데려가느냐, 처음에 반대하던 부모님도 나의 완강한 의지에 호성이를 나의 곁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동거.

나는 이 동거가 핑크빛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자기를 입양해 일년을 기른 엄마인데, 하는 기대감 때문에.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호성이는 익숙한 산책로, 사람, 공간이 없는 곳에서 나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다른 강아지들은 신나서 찬다는 하네스도 나는 노견과 치열하게 싸워가며 겨우 채웠다. 어쩔 땐 차기 싫다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늙은 시바견에게 ‘익숙함’이 없는 산책로가 고역이었던지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어쩔 땐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입질을 했다. 세게 문건 아니었는데, 나를 문 자신도 놀랐는지 금세 내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는 유일하게 익숙한 물건인 침대에서 하루종일 낯선 것과 싸워 고되진 몸을 누이곤 했다. 이 시기의 나 또한 익숙치 않은 반려견 엄마로서의 삶을 사느라 많이 애쓰고 있었는데, 호성이의 태도 하나하나가 칼 날처럼 마음에 박혀 참다 못해 결국 소리를 내어 펑펑 울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러한 짐승에게 거절당한 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오랫동안 의지했던 친구에게 넌 이미 끝난 관계야. 라는, 단호한 이별을 듣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공백이었던 관계의 틈을 메울 순 없는 걸까, 이미 흘러버린 세월의 서러움에 한참을 소리 내어 우는데, 네 발의 짐승이 자신의 나이만큼 늙어버린 걸음걸이로 나의 곁에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러곤 고개를 틀어 주둥이로 눈물 범벅이 된 나의 손등을 툭툭 쳤다. 그래도 늙은 짐승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어서 이 행동의 의미를 금세 알아채었다. 이것의 의미는,


‘만져줘.’


였다. 그리하여 한 손으로는 그 짐승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눈을 닦아내며 한참을 더 울어댔다. 조금이나마 곁을 내준 것이 고마워서였는지, 아니면 자꾸만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속상함에 울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내가 확신하는 건, 이 것이 서로를 잇는 첫 단추였다는 것.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관계는 차츰 개선되어갔다. 나의 작업대와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던 호성이는, 어느 순간부터 일 하고 있는 내 발 밑에서 꼼짝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소리를 내면, ‘뭐해?’ 라는 표정으로 날 들여다보았다. 내가,


“엄마, 일하고 있어.”


라고 대답하면 심드렁하게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곤 하였다. 그러다 내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면 벌떡 일어나 나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오곤 했다. 그러다 내가 산책을 시키기 위해 운동복을 갈아입으면 그 것이 산책인 줄 어떻게 알고 꼬리를 흔들며 하네스를 얌전히 기다리곤 하였다.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사람의 손길을 완강하게 거부하던 노견은 어느새 아침 일찍부터 사람의 손길을 찾아 안방으로 무턱대고 쳐들어와 엉덩이를 들이미는 귀여운 반려견이 되어 있었다. 갑작스런 털뭉치의 습격에 깜짝 놀라기를 여러 번, 이제는 그 것마저 익숙해져간다.


가끔 타향살이에 지친 내가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어미의 품 속을 찾는 강아지처럼 노견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냄새를 킁킁 맡으면, 잠자코 자신의 체온을 나누어준다. 그 보잘 것 없는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인 지금도, 이 사랑스러운 털 뭉치는 나의 오른 편에서 몸을 만 채로 꾸벅꾸벅 졸면서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산책로, 새로운 공간, 그리고 변해버린 주인을 힘겹게 적응하며 우리 사이의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금 기억해 내어 내 곁을 늠름하게 지켜주는 이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상투적이지만 어느 유명한 노래 속 가사가 생각난다.


‘말했잖아,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난 널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래, 나 또한 너의 삶의 끝자락이 왔을 때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게. 그러니 힘겹고 외로운 타양살이를 적응하느라 비틀거리며 처참할 만큼 삶에 찌들어가는, 보잘 것 없는 나라고 할지라도 부디 너만큼은 있는 힘껏 꼬리를 치며 세월에 변해가는 나를, 우리를 적응해준다면 나는 또 다시 오늘을 살아낼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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