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고통의 기록
짙은 눈썹,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
그리고
그녀의 생을 관통하는 디에고리베라.
프리다칼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프리다칼로와 디에고리베라가 함께 나오는 영상이었다. 사진과 그림으로만 보아 온 둘을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보는 기분은 묘했다. 그림처럼 형형한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고 머리에 꽃을 올린 프리다칼로는 디에고리베라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얼굴에 부비고 쓰다듬고 키스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사랑, 사랑에 빠진 여자 그 자체였다.
그녀의 그림에서 보아왔던 슬픔의 눈빛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그 눈빛을 한참이나 멍하니 보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인을 절망과 아픔으로 뒤흔든 저 선량한 표정의 디에고리베라가 진심으로 미워졌다. 이런마음이 들라고 틀어놓은 영상이 아니겠지만 사실이다. 나는 그가 밉다. 전시를 보는 내내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자화상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작품들은 스스로의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기에 더 깊은 공감을 갖게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나 가장 강렬하게 마음을 흔든 작품은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혹은 내 생각속의 디에고> 였다.
신부의 옷 입은 프리다칼로는 이마에 디에고리베라를 담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올올이 풀려 화폭 전체에 펼쳐진 그물같은 레이스실 가닥가닥엔 그녀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얽겨있다.
그림 앞에서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왜 이런 아픔을 감내하면서 까지 그를 사랑할수 밖에 없었던 걸까. 그녀가 내 앞에 있다면 등짝을 후려갈기며 그만하라고 그를 놓고 행복을 찾아가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육체의 삶 전체가 시련이었다면 그녀의 감성의 삶이라도 기쁨이어야 공평한 것 아닌가. 수많은 감정 중에 단 한가지 사랑만이라도 말이다.
그녀는 눈물 흘리고 피흘리고 찢어진 자신을 그리면서도 늘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다.눈빛에 슬픔을 적나라하게 내비치면서도 그 슬픔은 내가 감내해야는 나의 것이라는 자존심만큼은 절대 놓지 않는다. 그래서 쉬이 다가 갈 수 없고 그래서 더 아프다.
내 개인적으로 그녀의 슬픔의 단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은 <나의탄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그림 <나의탄생>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처음엔 거부감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럼에도 천천히 다시 보게 되는 그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생의 슬픔.
충격적인 이 그림은 마치 탄생이자 죽음 처럼 느껴진다. 얼굴을 덮은 여인의 산도에 목이 걸린 나. 그림 속에서 나를 낳고 있는 여인은 엄마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차갑다.나를 품었던 그 차가운 몸뚱이는 나를 밀어내고, 생을 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여린 생명은 죽은 표정으로 자궁 밖에 밀려나와 목이 걸렸다.
그녀는 생에 대한 저 처절한 통탄도 담담한 표정으로 그려냈을까.
전시의 마지막 즈음,
프리다칼로와 디에고리베라의 흑백 사진들이 이어지고 그녀의 장례를 지켜보는 디에고를 담은 사진 아래엔 그가 화장한 그녀의 재 한움큼을 입에 넣었다고 전해진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의 그 행동이 그렇게라도 그녀를 제 속에 담고 싶어서였다면,
그녀의 삶을 환희로 만들어 줄 수도 있었던 그에게 말하고 싶다.
있을 때 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