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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토타입L Apr 17. 2017

당신에게 보내는 데이터 편지

낭만적인 데이터, Information design 엽서 제작과정

다소 긴 사설: 갑자기 엽서라니, 데이터 편지라니


카톡, 텔레그램, 왓쨉, 페북 등으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일일이 다 읽어볼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서비스들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실시간'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여러 명과 각각 동시에 대화할 수도 있다. 요즘의 대화라는 것은 그 수단도, 형식도, 호흡도, 심지어 내용도 옛날과는 다른 것 같다. '옛날'이라는 것은 언제를 말하는 걸까, (거의) 전국민이 카톡을 사용하기 전? 페이스북이 생기기 전? 아니면 버디버디와 같은 채팅 서비스가 있기 전? 그것도 아니면 삐삐를 치고 음성 메시지를 듣던 시절? 내가 생각하는 옛날은, 오직 한 사람의 수신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말을 종이에 적어 보내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다. 요즘은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일이 너무나 쉽다. SNS를 통하면 모르는 사람과도 '연결' 가능하다 - '연결'이라는 말도 매우 한정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든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든 손편지를 (심지어 이메일도) 주고 받는 일은 기술적 기능의 어필은 사라지고 정서적 기능과 스타일만 남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됐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올해 나는 벌써 폰을 두 번 소매치기 당했다. 2번째 사건 후엔 트라우마가 나름 컸고 심지어 스마트폰을 또 사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금방 또 없어질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하는 질문까지 하게 됐다.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에 대답을 보류하고 일단 폰 없이 3주 째 살고 있다. 근데 생각보다 불편함 없이 제법 잘 산다. 물론 집과 회사에 컴퓨터가 있고 필요한 경우 아쉬운대로 사진기가 되는 늙은 아이패드가 있기 때문이겠지만. 스마트폰을 갖고 다닐 때 처럼 원할 때 바로 메모하고, 길을 찾고,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할 수 없게 됐다. 대신에 A5 크기 노트를 몇 권 샀다. 늘 지니고 다니며 아이디어나 할일을 적고 약도를 그린다. 엽서도 만들고.


오래된 친구가 런던에 잠시 들르게 되어 보기로 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일정으로 들렀다 지나는 길이라 오랜만에 보는데 밥 한끼 제대로 하거나 긴 수다를 나눌 여유가 안되었다. 아 어쩌지. 편지를 쓰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그림엽서를 만들기로 했다. 길지 않지만 나름 살아보니 누군가와 개인적으로 10년, 15년 이상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데 관계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이 친구와 함께한 지난 16년의 시간, 더 나아가서는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에 대해 짧게 생각해보게 됐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간단한 information design / 정보 디자인을 시도했다. 작업할 시간이 약속 전날 저녁 몇 시간 뿐이었지만, 그래도 작은 데이터를 가지고 시간, 공간, 관계 요 3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각화 결과물 안에 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료: Small personal data


다른 데이터도 있겠지만 각자 지난 16년 동안 주로 살았던 도시의 좌표를 활용하면 적은 데이터로 나름 의미있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난 2002년 부터 2017년 까지 두 사람이 어느 도시에 있었는지 쭉 적고 그 도시의 좌표 - 위도(남북), 경도(동서)를 쭉 적었다. 연도별 사람 A와 사람 B의 좌표, 32개의 데이터 포인트, 데이터는 이게 전부이다.


과정: Ideation and sketching


단순화를 위해 일단 위도 정보는 버렸다. 경도만 사용해도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고, 지구가 구체인 것까지 생각하면 projection 등 고려할게 너무 많아진다. 처음에는 경도 정보를 기준으로 도시들을 좌에서 우로 쭉 나열하고, 연도별로 두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 점으로 찍어봤다. 그러고보니 두 점 간의 '최단' 거리가 왜곡될 수 있겠다. 왜냐, 지구는 둥그니까. 아래 그림에 예를 들었는데, 평면으로 펼쳐놓으면 벤쿠버(123.1W)에서 베이징(116.4E)까지 거리가 벤쿠버에서 카트만두(85.3E)까지 거리보다 멀다. 다시 원형 혹은 구형으로 붙여서 보면 이것은 벤쿠버에서 두 지점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여행했을 때의 결과인데, 시계방향으로 여행하면 벤쿠버에서 베이징까지 거리가 더 가깝다. 물론 이것은 어떤 비행기를 타고 어떤 경로로 여행하는가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

이미지 출처: http://www.legallandconverter.com/p53.html


그래서 처음 아이디어를 버리고, 지구의 모습을 본따 원을 16개 (16년치) 그리기로 했다. 경도만 사용하기로 했으므로 말하자면 지구를 북극점 위에서나 남극점 위에서 바라봤다고 생각하고 원 둘레를 따라 좌표를 찍었다. 이 아이디어를 아래와 같이 Legend에 담았다.

그런데 원은 어떻게 똑바르게 그리나. 다양한 동전을 테스트해 본 결과 1 Penny 크기가 국제 엽서 표준 사이즈인 148 x 105 mm 들어가기에 제일 적합했다.


각 연도를 대표하는 원들에 좌표를 추가한 밑그림이다. 두 사람이 그 동안 어디에 있었고, 같은 도시에 있었던 것은 언제고, 다른 도시에 있을 땐 얼마나 떨어져있었고 그런 정보가 드러날 수 있게 디자인 했다.


완성: 말을 거는 Information design


이렇게 한쪽 면 전체는 information design 결과물로 채우고, 다른 한 면에는 완성된 그림을 보고 든 생각, 친구에게 평소에 전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몇 줄 적었다. 결국엔 서툴고 사적인 그림 쪼가리인데 여기서 뭔가 이치를 확인했다고 말한다면 허풍이 심하다 할지 모르겠다. 두 점이 원의 둘레를 여행하는 궤적은 한편으로는 원을 완성시킬 것 같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짧은 호를 만들고 만 것 같다. 기운 달이 다시 차는 것처럼, 높은 산마다 깊은 계곡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멀리 떠나는 여행도 결코 떠나온 곳과 한 없이 멀어지지 않는다. 왠만큼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많이 멀어졌다는 것은 곧 가까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나에게는 왠지 그렇게 들렸다. 친구에게도 같은 위로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가을에는 물론, 봄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편지를 쓰겠어요. 아니면 이런 그림 엽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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