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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Feb 20. 2022

제 3권. 맹약 &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

-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

  이제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군은 전투 준비를 위해 들판에서 진을 친다. 이 때 신과 같은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트로이아인들의 선두에 나선다. 알렉산드로스는 파리스의 별명으로서 ‘남자 또는 적을 막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남자’의 이름이다. 기원전 4C, 짧은 시기에 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이름이 같다.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 혼동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는 파리스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아르고스인 장수들 가운데 누구든 좋으니 일대일로 결투를 하자고 호언장담한 파리스는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를 보더니 꼬리를 내리고 만다. 라떼처럼 1:18도 아닌데 말이다. 하기야 인간들 중에 제일 미남인 자가 헤라클레스처럼 어찌 인간들 중에 제일 힘이 세고 용감할 수 있겠는가. 그가 헬레네를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도 용감해서가 아니고 아프로디테가 시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선두대열에 나타나는 것을 보자
신과 같은 알렉산드로스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죽음의 운명을 피해 도로 전우들의 무리 속으로 물러섰다.
마치 산골짜기에서 뱀을 본 사람이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도로 물러설 때와 같이, 꼭 그처럼
신과 같은 알렉산드로스는 아트레우스의 아들에게 겁을 먹고
용맹스런 트로이아인들의 무리 속으로 물러섰다.     


  이를 본 헥토르는 모욕적인 말로 꾸짖는다. 헥토르가 누구인가. 트로이아인 장수 중 최고가 아니던가. 그에게 동생 파리스는 얼마나 같잖아 보였겠는가.     


가증스런 파리스여, 외모만 멀쩡하지 계집에 미친 유혹자여!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거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어야 해.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었어. 이렇게 만인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멸시를 받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
아마 장발의 아카이오이족은 멀쩡한 네 외모만 보고
너를 우리의 선봉장인 줄 알았다가 네 마음 속에
아무런 힘과 투지가 없음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겠지.     


  결국 파리스는 형 헥토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전사의 입장에서 헥토르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파리스가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자기는 헬레네를 꼬드겨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신이 손수 내리신 선물을 받은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사랑스러운 선물을 비방하지는 말라고 언급한다. 사실 파리스의 말이 맞다. 심판의 댓가로 얻은 여인이 아니던가.      

[그림출처: YES24]

  그런데 말이다. 파리스적 언어관을 신화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한 번 풀어보자. 파리스가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 여행 중에, <비포 선 라이즈>처럼 운명의 여인, 헬레네를 만난 것이다. 알고 보니 유부녀. 그럼에도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파리스는 여인을 데리고 자신의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가족들이 미쳤나고 묻는다. 파리스가 대답한다. 자신은 헬레네를 꼬드긴 게 아니다. 이 여자는 단지 신의 선물이다. 가족들이 어찌할 수 있을까. 단지 아내를 뺏긴 메넬라오스 만이 환장할 노릇이다.

     

  일대일 매치업을 성사하기 전에 무언가 약속이 필요하다. 들판에서 양 진영이 모여 맹약식을 거행하기로 한다. 트로이아에서는 프리아모스가 신하 안테노르를 대동하고 아카이오이족 진영으로 간다. 아카이오이족에서는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과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가 나선다. 굳은 맹약을 위하여 제물과 포도주가 준비되고 양들의 머리털이 잘려져 나눠진다. 아가멤논이 큰 소리로 기도한다. 만일 메넬라오스, 즉 그리스 진영이 이긴다면 전쟁배상금까지 받을 수 있는 조항을 은연중에 삽입한 게 보인다. 트로이아 입장에서 보면 불평등 조약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할 수 있겠는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말이다.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메넬라오스를 죽이거든
그가 헬레네와 그녀의 모든 보물을 차지하게 하소서.
우리는 바다를 여행하는 함선들을 타고 떠나겠나이다.
그러나 만약 금발의 메넬라오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거든
그 때는 트로이아인들이 헬레네와 그녀의 모든 보물들을
돌려주고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적절한 보상을
아르고스인들에게 지불하게 하소서.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쓰러졌는데도 프리아모스와
그의 아들들이 보상금 지불을 거절한다면
나는 죗값을 받아내기 위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싸울 것이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일대일 대결은 메넬라오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창은 어이없게도 메넬라오스의 방패를 맞혔으나 뚫지 못하고 부러졌다. 메넬라오스의 창은 파리스의 옆구리를 지나쳤다. 육박전은 더 싱겁게 끝났다. 메넬라오스가 파리스가 쓴 투구의 말총장식을 거머쥐고 자신의 진영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아, 독자들께서는 이 싸움을 영상으로 구성해보시라. 잘생긴 배우들을 떠올려 보고 살을 좀 더 붙이고 긴장감을 불어넣으면 내 묘사가 더 효과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이 책의 앞부분이다. 이대로 파리스가 끌려가면 게임오버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작가 호메로스는 밀당도 잘 한다. 그녀가 혜성같이 나타난다. 그녀가 누구인가. 당연히 트로이아를, 파리스를 너무나 사랑하는 뇌쇄적인 아프로디테가 아니던가. 그 여신은 파리스의 턱밑 가죽끈을 끊어버렸다. 빈 투구만을 손에 쥔 메넬라오스의 황당한 표정이 웃길 것이다. 열 받은 메넬라오스가 덤벼들 때, 여신은 그를 가로채어 안개로 감싸고 유유히 사라졌다. 실제로는 파리스가 안개의 도움을 받아 똥줄 타게 도망갔겠지만.     


  아, 아프로디테는 자상하기도 하다. 싸움에 진 남자를 구해주는 것도 모자라 헬레네에게 침대 위에서 그를 위로해주라고 한다. 참으로 사랑의 여신답다. 헬레네가 잠 시중을 거부하며 앙탈을 부리자 화를 내며 위협하기도 하고 여신이면서도 손수 의자를 가져와 헬레네를 달래기도 한다. 헬레네는 남편 파리스를 비난한다.    

 

싸움터에서 돌아오셨나요? 그대는 마땅히 거기서
내 전남편이었던 강력한 전사의 손에 쓰러져 죽었어야 해요
그대는 전에 힘과 주먹과 창에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보다 더 강하다고 자랑하곤 했지요.
그러니 자, 가서 아레스의 사랑을 받는 메넬라오스를
불러내어 다시 그와 일대일로 싸워보세요.
하지만 나는 그대가 금발의 메넬라오스와 일대일로 싸우거나
그에게 무모하게 덤비는 일은 그만두라고 권하고 싶네요.
아니면 그의 창에 그대가 당장 쓰러져 죽게 될 테니까요.   

  

  싸우라고 하는 건지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건지. 전남편과 지금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는 헬레네의 고뇌가 엿보인다. 그럼에도 헬레네의 마음은 파리스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지금 남자가 내 남자 아니던가. 파리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그렇게 심한 욕설로 내 마음을 괴롭히지 마시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아테네의 도움으로 나를 이겼지만
다음에는 내가 그를 이길 것이오. 우리 편에도 신들이 계시니까요.
그러니 자, 우리 잠자리에서 누워 사랑이나 즐깁시다.
일찍이 이렇듯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적은 없었소.
내가 아름다운 라케다이몬에서 처음 그대를 빼앗아
바다를 여행하는 함선들에 태워 오던 길에 크라나에 섬에서
그대와 사랑을 나누고 잠자리를 같이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소.
그만큼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하며 달콤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는구려.     


  오, 이런 철부지 로맨티스트 같으니. 죽다 살아났으면 거칠거나 좌절하거나, 그렇게 되는 것이 흔한 모습일 텐데. 파리스는 이 와중에도 막연한 재기를 꿈꾸며 솔직담백한 욕망을 표현한다. 지금 얼마나 당신과 하고 싶냐 하면 첫날밤도 지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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