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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Apr 24. 2022

제 5권. 디오메데스의 무훈

-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

  디오메데스가 누구인가. 그는 트로이아 전쟁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그리스 연합군의 장수였다. 그는 튀데우스의 아들로 언급되는데, 가문의 역사를 중시하는 서양인의 모습은 우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누구누구의 누구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마치 출처를 밝히는 논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라는 ‘솔의 눈’이라는 음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좋다.

     

  튀데우스는 트로이아 전쟁 이전에 한 때 오이디푸스가 다스렸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중의 한 명이었다. 우리가 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그 오이디푸스가 맞다. 당시에 오이디푸스가 왕권에서 물러나자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가 왕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 폴뤼네이케스를 지원하기 위해 아르고스의 일곱 장수가 공격한 것이다. 튀데우스를 포함한 일곱 장수는 모두 전사했는데, 이 전투 장면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읽어보면 실감나게 만나볼 수 있다. 그 후, 전사한 장수들의 아들들로 구성된 재공격으로 테바이는 함락되고 마는데 그 중 한 명이 다름 아닌 디오메데스였다. 그 디오메데스가 이번에는 80척의 함선과 수많은 아르고스인들을 이끌고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용맹함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 남자의 후견신(?)으로는 아테네가 등장한다.

     

[그림출처: YES24]

  헤라와 마찬가지로 트로이아라면 치를 떠는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답게 머리를 썼다. 트로이아 편에서 용감하게 활약하는 아레스를 꼬셔서 싸움터에서 데리고 나가 스카만드로스의 강둑에 앉혀버린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아레스여, 아레스여, 피투성이 살인마여, 성벽의 파괴자여!
아버지 제우스께서 어느 편에 영광을 내리시든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이 저희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는 물러나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해요.”     


  아레스가 없는 사이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아인들을 혼쭐내기 시작한다. 특히 디오메데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가 들판을 휩쓰는 모습은 강물이 제방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맹렬했다. 그러나 트로이아 쪽에도 훌륭한 장수는 많았다. 뤼카온의 아들인 판다로스가 그에게 화살을 날려 가슴받이를 맞춘 것이다. 피를 흘리는 디오메데스는 아테네 여신에게 기도한다. 기도의 음성을 들은 아테네는 아레스와의 ‘중립 약속’을 언제 그랬냐는 듯 뒤집고 그를 치유해주고 격려한다.   

  

“디오메데스여! 자, 이제 용기를 내어 트로이아인들과 싸우도록 하라.
내 그대 가슴속에 그대 아버지가 가졌던 불굴의 용기를,
방패를 휘두르며 전차를 타고 싸우던 튀데우스가 가졌던
그러한 용기를 불러 넣었노라. 나 또한 전에 그대의 눈을 덮고 있던
안개를 걷었으니, 그대는 신과 인간을 잘 분간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만약 어떤 신이 그대를 시험하고자 이리로 오거든
그대는 다른 불사신들과는 맞서 싸우지 말고
다만 제우스의 딸 아프로디테가 싸움터에 돌아오거든
날카로운 창으로 그녀를 찔러주도록 하라.”   

  

  이 정도면 살인교사다. 황금사과를 빼앗겼다고 아테네는 아프로디테가 그리 미웠던가. BC 7세기에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아프로디테는 바다거품(aphros)에서 태어났다.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그 남근을 바다에 던졌을 때 바다 거품이 그 주위에 생겨났다고 하니 바다거품은 우라노스의 정액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프로디테는 아테네에게 할머니뻘이 된다. 우라노스가 크로노스를 낳았고 크로노스가 제우스를 낳았고 제우스가 아테네를 낳았으니 말이다. 한편 호메로스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로 나온다. 이것이 맞다고 가정하면 아프로디테와 아테네는 자매관계이다. 이래나 저래나 아테네의 명령은 지혜롭지 못하다. 질투가 그녀로부터 지혜를 덮은 것일까.    

 

  사실 신들의 계보를 보면 개판이 맞다. 근친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폭력이나 추문으로 뒤덮여있다. 신화라는 게 모든 걸 용인해주는 식이다. 신이니깐, 뭐 안 될 게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게 참 무섭다. 못 할게 없으니 아무래도 도를 넘어서기가 일쑤다. 과연 트로이아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인가, 아니면 신들끼리의 전쟁인가. 그도 아니면 신들의 대리전인가. 아테네와 아프로디테가 싸우는가, 아니면 아테네 신을 믿는 남자의 용기와 아프로디테 신을 숭배하는 남자의 용기가 서로 맞붙는 것인가. 어떻게 해석하든 신들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바로 『일리아스』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림출처: YES24]

  결국 디오메데스는 판다로스를 죽인다. 그가 던진 창이 아테네가 인도하여 그의 하얀 이빨들을 꿰뚫게 한 것이다. 이 정도면 유도창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그가 던진 돌은 아이네이아스의 허리 부근과 넓적다리를 맞추어 힘줄을 끊었다. 아이네이아스가 누구인가. 그는 아프로디테와 앙키세스가 낳은 아들로서 훗날 로마인의 조상이 된다. 로마의 고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읽어보면 그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식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방식을 지향하다 보면 고전들이 그물에 물고기 걸리듯이 들어온다. 인식욕만 있다면 까짓것 읽어내면 된다. 로마인의 선조가 될 아이네이아스는 아프로디테가 구해준다. 이제 감히 건방지게도 디오메데스가 아프로디테를 공격한다. 한낱 인간이 신을 공격하다니 어찌 신의 입장에서 보면 모양새가 많이 빠진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꽤 있었다. 알로에우스의 두 아들이 아레스를 청동 독 안에 열석 달 동안이나 묶어두기도 했고,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오른쪽 가슴을 활로 쏜 적도 있었으며, 하데스도 화살을 맞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아프로디테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다음 글에서 퀴프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별명이고, 에뉘오는 전쟁의 여신으로서 아레스의 동반자를 말하며, 카리스 여신들은 아프로디테 수행시녀를 말한다.     


한편 디오메데스는 무자비한 청동을 들고 퀴프리스에게
덤벼들었으니, 그녀가 허약한 여신에 불과할 뿐,
전사들의 전쟁을 주관하는 여신들에 끼지 못하며
아테네도 도시를 파괴하는 에뉘오도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많은 무리들 사이로 추격하여 그녀를 따라잡았을 때
기상이 늠름한 튀데우스의 아들은 창을 내밀며 덤벼들었고
날카로운 창끝으로 그녀의 연약한 손끝을 찔렀다.
그리하여 창은 카리스 여신들이 손수 그녀를 위하여 짜준
향기로운 옷을 곧장 지나 손목 위 살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여신의 불멸의 피가, 축복 받은 신들의 몸속에
흐르는 것과 같은 영액이 흘러내렸다. 신들은 빵도
먹지 않고 반짝이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혈액이 없고 불사신들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크게 비명 지르며 아들을 놓아버렸다.
하나 그를 포이보스 아폴론이 두 손으로 받아 검은 구름으로 감싸주었다.     


  이 때 무지개의 여신 이리스가 나타나 그녀를 무리들 사이에서 구출해 데리고 나간다. 아레스를 본 아프로디테의 하소연이 연약한 아이 같다. 후시딘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를 데려다주세요. 그대의 말들을 타고
불사신들의 거처가 있는 올륌포스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한낱 필멸의 인간이 나를 찔렀어요. 상처가 몹시 아파요.
튀데우스의 아들 말예요. 이제 그자는 아버지 제우스와도 싸우겠어요.”     


  아프로디테는 어머니 디오네로부터 치료를 받고 제우스로부터 업무분장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듣는다. 여성가족부 소속의 아프로디테가 국방부가 하는 일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말이다.     


“내 딸아! 전쟁에 관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니 너는
결혼에 관한 사랑스런 일이나 맡아보아라. 전쟁에 관한
모든 일은 날랜 아레스와 아테네가 염려할 것이다.”     

  한편 목청 좋은 디오메데스는 이제 아이네이아스를 죽이려고 덤벼들고, 이를 막아서는 포이보스 아폴론에게도 덤비니, 어처구니없는 하극상에 몹시 분노한 아폴론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소환한다. 이에 아레스는 트로이아인들을 돕기 위해 온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격려했다. 이제 양 진영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난타전이 벌어진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디오메데스, 두 아이아스, 오뒷세우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 등이 활약했고 트로이아 진영에선 아이네이아스,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 뤼키아인들의 지휘자 사르페돈 등이 용감하게 싸웠다. 싸움이 아레스의 후원을 받는 트로이아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헤라는 아레스에게 뿔이 나고 말았다. 헤라는 제우스에게 난폭한 아레스를 고자질하며 간청하니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갈팡질팡 제우스는 아테네를 보내도록 허락한다. 이제 아테네의 도움을 받는 디오메데스와 아레스와의 일대 혈전이 벌어진다. 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 디오메데스는 아프로디테, 아폴론에 이어 아레스에게도 도전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입김이 그만큼 센 것일까, 디오메데스의 믿음이 센 것일까.     


먼저 아레스가 그(디오메데스)의 목숨을 빼앗기를 열망하며
말들의 멍에와 고삐 위로 청동 창을 내밀었다.
그러나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네가 손으로 창을 잡아
전차 밖으로 밀어내자 창은 헛되이 날고 말았다.
이번에는 목청 좋은 디오메데스가 청동 창을 들고
덤벼들었다. 그러자 팔라스 아테네가 동판 배띠를
두르고 있던 아레스의 아랫배로 그 창을 밀어 넣었다.
바로 그곳을 디오메데스가 정통으로 찔러 그의 고운 살갗을 찢고는
창을 도로 뽑았다. 그러자 청동의 아레스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구천 명 또는 일만 명의 전사들이
서로 접전을 벌이며 싸움터에서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지혜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네가 난폭한 전쟁의 신 아레스를 무찌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둘 다 인간 디오메데스로부터 상처를 입으며 ‘신’ 치고는 굉장히 쪽팔리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는데, 『오뒷세이아』 8권에 따르면 그들은 연인 관계일 때도 그런 적이 있었다. 즉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의 아내, 아프로디테는 밀애를 즐기다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놓은 교묘한 그물에 걸려 신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레스도 아프로디테와 마찬가지로 제우스를 찾아가 호소한다. 제우스의 반응은 아프로디테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훨씬 차갑다.     


“이 배신자여! 내 곁에 앉아 징징대지 마라.
나는 올륌포스에 사는 모든 신들 중에서 네가 제일 밉다.
너는 밤낮 말다툼과 전쟁과 싸움질만 좋아하니 말이다.
정말이지 네 어미 헤라의 기질이야말로 참을성 없고 굽힐 줄 모르지.
나도 그녀를 간신히 말로 제어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
네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도 필시 그녀가 부추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너 역시 내 자식이고 네 어미가 내게 너를 낳아주었으니까.
만일 네가 다른 신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렇듯 난폭하게 굴었더라면
너는 벌써 우라노스의 아들들보다 더 깊은 곳에 가 있으리라.”     


  참 재미있다. 못난 자식을 나무라는 제우스의 말을 들어보니 인간들의 아버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네 엄마 닮아서 너도 그 모양 그 꼴이라니. 제우스의 인격 아니 신격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러면서도 자식이라 할 수 없이 신들의 의사 파이안에게 명하여 아레스를 치료하게 해주니, 부족한 아들을 둔 아버지의 어찌할 수 없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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