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te Fall Feb 05. 2023

사는 게 시시하다 여겨질 때

-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여전히 세월을 그리워한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지나간 세월의 그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자막이다. 지나간 세월을 먼지 쌓인 유리창으로 묘사한 게 마음에 든다. 희미해져가는 사랑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보편적이다. 유리창을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돌아가고도 싶겠지만 켜켜이 쌓인 먼지는 말해준다. 그대로 놔두는 게 기억에 대한 예의라고. 아무리 대단했던 사랑이라도 시간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멸해버린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은 도처에서 선언한다.   

  

  『단순한 열정』은 결은 꽤 달라도 <화양연화>를 닮았다. 한 남자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서정적이면서도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간결하고 담담하게 그려내는 여자의 기억은 마치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아니하면서도 절절한 사랑을 어떻게든 해동시켜보려는 (그래봤자 여전히 살얼음 낀 사랑이지만) 장만옥과 양조위의 몸짓처럼 결국 잊혀져간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우리 그냥 어디 가서 꽁꽁 숨어 살까, 나를 떠나면 죽여 버릴거야, 와 같은 감정이입된 말들을 내뱉지 아니하고 그저 담백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큰일을 아주 장하게 하고선 당당하게 기요틴에 오른 사람들처럼 사랑의 끝에서도 초연하게 빛난다.     

[그림출처: YES24]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경구를 소개한다. ‘『우리 둘』 잡지는 사드보다 더 외설스럽다.’ 사드는 프랑스 방탕주의 문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프랑수아 드 사드 후작(1740~1814)을 말하는데 그로부터 사디즘이라는 말이 나왔다. 가학성애학의 원조답게 그의 삶은 난봉꾼 그 자체였고 그의 저작들은 포르노성 전개로 최근까지도 많은 국가에서 외설시비의 논란이 되었다. 그런 그보다도 『우리 둘』 잡지가 더 외설스럽다니, 그 잡지는 대체 어느 정도까지 야하기에 그런 코멘트가 나온단 말인가. 나는 그 잡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더 음란하고 난잡하여 낯이 화끈거릴 거라 짐작한다. 그건 그 잡지의 속성을 모르더라도 ‘우리 둘’이라는 이름이 주는 비밀스러움 때문이다. 둘이서 하는 그 어떤 행위든 사드를 가볍게 능가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대개 고루하지만 때로는 창의적이다.     


  흔히 소설의 첫 문장은 책의 전체 전개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작가는 초반부터 『단순한 열정』을 통해 주인공의 성적 행위를 민낯으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결심을 선포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예상한 만큼 지저분하거나 야하지는 않다. 그것은 문장들에 각종 양념이나 MSG가 첨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약하고 밋밋한 소금으로 건조하게 간을 맞추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문장들은 오스트리아 잘츠(Salz)카머구트 암염만큼 고순도는 아닐지언정 더 철학적이다.   

  

  문학평론가 이재룡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어에서 ‘passion’은 남녀 간의 절절한 애정이란 뜻에서 우리말로 ‘열정’이라 번역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겪은 ‘고통’을 지칭하기도 한다. 대학 시절 아니 에르노가 읽었던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삶은 ‘무익한 수난’이다, 작가는 사르트르의 용어에서 형용사만 바꿔 그녀가 겪은 한 시절의 체험을 ‘단순한 수난’으로 명명했으리라.     


  ‘단순한 열정’이 ‘단순한 수난’이 될 수도 있음이 놀랍다. 그러나 사랑의 열정에 동반되는 불안함, 질투, 아픔 등을 생각하면 사랑이 고행자의 수난과 흡사하다는 아이디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건 마치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ravel’이 고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travail’에서 유래한 것과 같다. 여행은 설레고 신비로운 노정이지만 그와 반대로 고통과 노고가 수반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힘들고 고생스럽더라도 여행을 외면하지 않듯이 불안하고 외롭더라도 열정적인 사랑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 ‘단순한 열정’ 혹은 ‘단순한 수난’이라는 여정에 올라보자.    

 

  『단순한 열정』은 한 프랑스 여자가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다. 얼마나 열정적인 사랑인지, 에로스의 화살을 제대로 맞은 그녀는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종일 그 남자를 생각하고 종일 그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그 남자와 관련된 것에만 온 신경세포가 쏠린다. 이 세상 중심의 축은 오직 그 남자이다. 그 남자가 태양이고 그녀의 삶은 그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궤도가 가까워져 만날 시간이 다가오면 안절부절 못 하고 궤도에 몸을 실은 그가 떠나가면 또 다음 전화를 기다리는 고통의 시간으로 일상을 채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화제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라, 혹은 그 사람이 가봤던 장소 등,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것들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내가 없을 때 그의 전화가 올까봐 그가 알고 있는 일정에 한해서, 일에 관계된 어쩔 수 없는 용건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지 않았다. 또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까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일조차 피했다.     


  나는 그가 도착하기 직전에 시계를 풀어놓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차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언제나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 있는 커피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그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이전에 즐기던 독서나 외출 따위의 모든 활동을 자제했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나는 상사가 요구하는 시간 외 근무를 무례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삶이 이해되는가.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열정적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다는 증거다. 심리학자들은 열정적 사랑의 유통기간을 6개월에서 2년 사이로 잡는다. 사랑이 빨리 식는 사람이더라도 반 년 동안은 상대방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사랑의 바다를 점령하는 세이렌의 유혹에 걸려들어 탈진할 만큼 사랑에 집중한다. 물론 그 세이렌은 남자일수도 여자일수도 있다.     


  이 기간에는 또한 기다림, 고통, 시기, 질투, 분노, 탐욕 등의 감정도 동반된다. 버틸 수 있는 힘은 단지 열정의 무게가 더 많이 나가기 때문이다. 힘든 육아를 버티게 해주는 게 한 번씩 찾아오는 아기의 환한 웃음이듯이.     


  안타깝게도 열정기간은 한정적이다. 그 다음으로의 이행은 대개 세 가지 경우로 요약할 수 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사랑으로의 연착륙. 또는 열정의 경착륙 이후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홀로 남는 것. 첫 번째는 지루할 수 있지만 평안하고, 두 번째는 재미있지만 불안정하고, 세 번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남겨둔 채 펜스 위에 올라가 어디로 뛰어내릴지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 그녀는 세 번째다. 그 남자가 본국으로 떠나간 이후에 그녀는 고통과 상실감과 불면증으로 온 몸과 영혼이 아프다. 무엇을 해도 무의미하고 하루하루 시간을 헤아리며 표정 없이 보낸다. 어떨 때는 고된 육체노동으로 자신을 파괴해보지만 그마저도 ‘공허한 피로감’만 불러올 뿐이었다.   

  

  그 사람은 6개월 전 프랑스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온몸이 아팠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 차라리 방에 강도라도 들어와 나를 죽여주었으면 싶었다.     


  어느 날 밤, 에이즈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시간은 더 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만약 이달 말까지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해온다면 자선단체에 500프랑을 기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른다. 이제 더 이상 그 남자가 이전처럼 그녀의 일상에 공격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잊혀져간다. 이제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남은 것은 기억이다.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아련하고 뿌옇다. 한때의 열정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가는 페드로 맥케부아처럼 자아를 추억하며 텍스트로 남는다.     


  어느덧 4월이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A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일상의 작은 기쁨’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에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세상에서 그리고 내 삶 속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1월 20일부터 그 사람은 이미 우리의 이야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홀연히 왔다간 그 남자는 예전에 그가 여기 있을 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 내 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책은 사치에 대한 정의로 마무리된다. 사치는 분수를 넘는 행위를 뜻한다. 열정적인 사랑이 사치라면 편안한 사랑은 근검절약인가. 우리는 사치를 꿈꾸지만 가난하게 산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단순한 열정』은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사실 그런 사랑 외에도 우리는 다른 대상에게 열정을 쏟을 수 있다. 삶이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삶을 채우려고 여러 가지를 하려 한다. 기타 배우기, 꽃꽂이, 종이접기, 수영, 외국어 습득하기, 해외여행하기 등등. 이들은 버킷리스트로 목록화 되기도 한다. 하나하나를 지워가며 충만한 하루 일과를 보내보기도 하지만 밋밋한 일상의 단조로움을 지울 수 없을 거라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열정은 기본적으로 단순한 게 맞다. 복잡하다는 것은 에너지가 분산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다양한 수입 브랜드 맥주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맛과 향이 서로서로 다른 듯 하지만 그래보았자 임팩트는 알코올 함량 5도 전후다. 우리에겐 강렬한 40도짜리 이상의 위스키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가지에만 베팅하는 단순한 열정이 시시한 우리의 생을 더 톡 쏘게 자극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되든 대개는 상관없다. 단순하게 단 한 가지에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다면 우리의 몸속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도파민이 넘쳐흐를 것이다.     


  확실한 건 단순한 열정을 쏟을 대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도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배신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행복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말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