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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Apr 23. 2023

잘 못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 알베르 카뮈의 『전락』 -

  버스정류장 앞에서 한 노파가 쪼글쪼글한 손을 내민다. 이천 원만 있으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지금 돈이 없다고 한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두 시간이 족히 걸린다고 하는데. 바람도 차다.  

   

  많은 행인들이 못 듣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아니 듣고 싶은 마음으로 제 갈 길을 간다. 그들에게 이천 원은 아무 의미가 없는 금액이지만 적선을 회피하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다. 인색함, 개인주의, 무관심, 방관, 귀찮음, 거짓말일거라는 판단, 구걸하는 행위를 개인적인 무능함으로 돌리는 구걸에 대한 생각 차이 등.    

 

  다음 날 지역방송에서 도로를 따라 걸어가던 그 노파가 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 정류장에서 노파의 도움을 거부했던 행인 중 하나가 우연히 그 뉴스를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무런 느낌도 없을까. 양심의 가책이 들까. 아니면 그 상황을 자신과 연결하는 일종의 죄책감이 어처구니없다고 여길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극적인 가해가 아니라 스쳐지나갈 듯한 수동적인 방관에도 비극적인 결과에 따라 후회와 자책으로 환청이 들릴 수도 있다.     


  『전락』의 등장인물 장바띠스뜨 끌라망스가 그런 사람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평범한 삶이 악행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끌라망스가 전락한 이유는 폭넓게는 악의 평범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다.     

[그림출처: YES24}

  ‘전락’은 나쁜 상태로 굴러 떨어짐을 의미한다. ‘에피파니(Epiphany)’가 순간의 깨달음으로 긍정적인 방향성이라면, 전락은 타락의 길로 들어섬을 말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젋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은 치마를 허리까지 들어 올려 허벅지가 거의 엉덩이까지 드러난 소녀의 모습을 보고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어 종전의 자신의 삶은 위선이었고 앞으로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에피파니다. 뉴턴의 사과나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의 물도 일종의 에피파니다. 『전락』의 끌라망스는 파리의 쎈 강 다리 위에서 젋은 여성의 자살을 방조한 기억으로 서서히 전락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어떤 깨달음이나 각성일 수도 있고 촉매제로서의 기억일 수도 있다. 계기가 문제가 아니라 나빠지는 게 핵심이다.     


  나는 난간 위로 몸을 숙이고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한 형체 뒤를 지나갔습니다. 거무스름한 머리칼과 외투 깃 사이로 비에 젖은 싱그러운 목덜미가 눈에 확 띄었지요. 이것이 내 감각을 자극했습니다만 약간 망설이다가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리고 다리 끝에서 당시 살고 있던 쌩미셸 방향 강변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약 50미터쯤 갔을 때,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이 강물로 뛰어드는 소리였지요. 꽤 먼 거리였지만 밤의 정적 탓에 이 소리가 내 귀엔 엄청나게 크게 들렸습니다. 우뚝 걸음을 멈췄지요.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곧바로 외마디 비명이 들렸고 몇 번 더 이어졌지요. 이 소리 역시 강으로 내려갔고 뚝 끊겨버렸습니다. 갑자기 굳어버린 어둠 속에 침묵이 흘렀고, 이 침묵은 끝없이 지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몸뚱이가 꼼작하질 않는 겁니다. 추위와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던 것 같아요. 속으로는 빨리 가봐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너무 늦었어, 너무 늦은 거야……’라거나 아니면 그 비슷한 말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얼어 붙은 채 계속 귀를 귀울이다가 비를 맞으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까. 그냥 무시하고 살면 되지 않았을까. 후회, 죄책감, 집착, 회환의 감정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그러나 그는 전혀 그에게 속하지 않았던 감정들을 개에게 던져주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의 참모습과 대면하고 말았다. 사실 그가 살아온 삶은 남의 불행을 무시하고 외면할 만큼 찌질하지 아니하였다. 외려 그의 삶은 하늘을 날 듯한 성공한 삶이었다. ‘거위의 꿈’이나 ‘오리 날다’의 거위나 오리의 꿈이 아니라 실제로 날아오른 삶이었다.     


  하지만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한창 나이에 건강상태는 완벽하고, 재능을 두루 갖추고, 지적인 활동처럼 신체활동에도 능하고,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고, 잠도 잘 자고, 자신에 대해 지극히 만족스러워하지만 적절한 사교술을 통해서만 이를 드러내는, 그런 남자를 말입니다. 이만하면 아무리 겸손하게 굴어도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화자찬할 수 있다는 걸 당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나보다 더 자연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내 삶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삶의 아이러니, 그 위대함, 그 구속들 중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과 철저히 밀착되어 있었으니까요. (중략) 이토록 충만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살다보니 정말 나 자신이 약간 초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중략) 평범한 것이든 아니든 이 확신은 나를 오랫동안 일상의 대열 위로 올려주었고, 덕분에 나는 수 년동안 말 그대로 허공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성을 차디찬 강물에서 끌어올려 구했어야 했다는 자책이 강렬했던 건가. 그가 살아온 인생여정은 그런 외면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성공한 변호사였고 사회와 연대했고 사람들을 도왔고 친절했고 적선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여자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갔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가 실천하며 살아온 선행들이 가식이었다고 부끄러운 의식의 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삶과 완전하게 일치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 그였는데, 막상 보는 눈이 없으니, 보고 칭찬과 감탄의 눈빛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불일치의 언행을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시쳇말로 쪽팔렸다. 

    

  밤마다 정의가 실제로 나와 함께 잔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당신이 내 변론을 보았다면 주도면밀한 어조, 적절한 감동, 설득력, 열의 억제된 분노 등에 틀림없이 감탄했을 겁니다. 체격이야 원래부터 잘 타고났고 고상한 태도를 취하는 것쯤은 내겐 조금도 어려운 게 아니었지요.     


  행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담뱃불을 빌려주고, 무거운 짐수레꾼을 거들어주고, 고장난 자동차를 밀어주고, 여자 구세군의 신문을 사준다거나 몽빠르나스 묘지에서 훔쳐온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노파한테서 꽃을 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또 아! 이건 말하기가 좀 민망한데, 적선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내 친구 중 독실한 기독교인 한 녀석이 고백하길, 거지가 자기 집으로 오는 걸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느낌은 불쾌감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더 고약했습니다. 한술 더 떠서 기뻐 날뛰었다니까요. 

    

  어느 날 아침,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땅히 앉을 만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할 기회가 생긴다거나, 노파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서 능숙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려준다거나, 혹은 그저 나보다 더 급한 사람에게 택시를 양보하기라도 하면 이것으로 그날 하루가 온종일 즐거워지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왜 갑자기 자신의 전 생애를 부정할 만큼 전락하기 시작한 건가. 그것은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여자의 투신을 목격한 그 당시에는 너무 늦었다, 는 핑계를 대며 회피했다. 혹시 여자의 죽음이 신문에 실릴까봐 의도적으로 신문도 보지 않았다. 그러고 잊혀지면 그만이다. 레테의 강물로 샤워를 하고 물망초 같은 꽃들은 멀리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자가 투신한 이삼년이 지난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저녁, 그는 세느 강변에서 웃음소리를 들어버린 것이다.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강을 따라 내려오는 지속적인 웃음소리. 그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그를 ‘거울’ 앞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웃음소리는 말해 주었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건성으로 진정성 없이 대했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기를 원했고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인을 도왔고 육체적인 사랑에 늘 빠져들었지만 사랑한 여자는 없었다고. 그의 삶은 온통 거짓투성이었다고.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그 날 저녁 이후 나는 조금씩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것도 아니었고요. 처음엔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습니다. 차츰 더 또렷이 보게 되었고, 내가 알고도 모른 체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 때까지 놀랑 만한 망각의 힘이 나를 돕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살았지요. 무엇보다 내 결심을 잊고 있었습니다. 따져보면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요. 물론, 전쟁이나 자살, 사랑, 불행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을 때 정중하고 피상적으로 흉내만 냈을 뿐이지요. 가끔, 일상적인 내 생활과 관계없는 사건에 열심인 척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내 자유가 방해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끼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뭐랄까, 이것은 그냥 가볍게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스치듯 지나갔지요.     


  사실 그가 그렇게 잘 못 산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을 너무 사랑하였을 뿐이다. 나르시스트적인 자기애. 자신에게 만족할 만한 수준 그 이상의 자존감을 선사하고 자신의 능력과 외모, 건강, 재력, 태도, 삶의 수준에 높은 점수를 부여할 수 있는 자기긍정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삶의 태도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낙관적이고 낙천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은 얼마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던가.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외로운 실존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했다. 그게 건성이나 시간 때우기용 심심풀이거나 방탕일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는 그날그날 나, 나, 나로 이어지는 연속 이외에 아무것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날그날 여자들과 어울리고 그날그날 미덕이나 악덕을 행하며 그저 개처럼 살았지요. 하지만 나 자신만은 확고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나는 나 자신 외에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제 약점이지요. 삶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까요.     


  진정한 방탕은 어떤 의무도 만들어내지 않기에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여기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 자신뿐이지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몹시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탕을 선호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글입니다.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고, 무엇보다도 약속이 없으며, 즉각적인 처벌도 없는 그런 정글 말입니다.     


  그는 결국 화려한 도시 파리를 버리고 습한 먼지가 내려앉은 암스테르담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속죄판사로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웃음소리라는 환청으로 인해 미쳐버릴 수는 없다. 자신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구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충만한 자기애로 부조리한 세상에 정면도전하는 것이다. 까뮈의 작품 『이방인』, 『페스트』 , 『시지프의 신화』 등에서 어김없이 주인공들은 부조리에 맞섰다. 이제 여기에서도 끌라망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를 이해하려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도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속죄판사라는 게 그렇다. 판사가 속죄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속죄는 죄인이 하는 것이고 판사는 죄인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다. 스스로 죄를 회개하면서 심판한다는 것. 이 조화될 수 없는 조합을 끌라망스는 해낸다. 어차피 부조리한 세상은 부조리한 해결책으로 맞서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멕시코시티라는 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과오를 뉘우친다. 자신에 대한 모진 비판의 과정은 타인을 심판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멕시코시티에서 이 유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도 이미 경험하셨다시피, 처음엔 되도록이면 자주 공공연히 고백을 하는 겁니다. 거침없이 한껏 나 자신을 비난하는 거지요.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잘 들어보십시오. 나는 상스럽게 가슴을 마구 쳐대며 자책하는 짓 따윈 하지 않습니다. 천만에요. 대신 다양한 뉘앙스를 더하고 간간이 여담도 곁들여가며 이야기를 유연하게 이끌어가지요. 말하자면 듣는 이에게 맞게 이야기를 조절함으로써 오히려 상대가 더 관심을 갖고 열을 내도록 만드는 겁니다. 나에 관한 일과 다른 이들에 관한 일을 섞기도 하고 모두에게 공통된 점들, 함께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들,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들을 예로 들어가며, 올바른 태도를 말하고, 마침내 내 안에서나 다른 이들에게서 기승을 부리는 것, 즉 현대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가지요. 이로써 우리 모두의 것이자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하나의 초상화를 만들어 냅니다. 사육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일종의 가면이지요. 사실적이면서도 단순화된 것으로, 딱 보면 다들 ‘아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게 되는 초상입니다. 이 초상이 마무리되면, 오늘 밤처럼 이것을 내보이며 매우 침통한 어조로 말하는 거지요. “아아! 내 꼴이 이렇습니다.” 이로써 검사의 논고가 끝난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동시대인들에게 내미는 초상은 하나의 거울이 되어버리지요.     


  위에서 인용한 단락 중에 두 가지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이로써 우리 모두의 것이자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하나의 초상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동시대인들에게 내미는 초상은 하나의 거울이 되어버리지요.’ 

  하나의 초상화와 하나의 거울. 아, 바로 이것이다. 모든 사람의 죄는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식이다. 원죄를 지닌 인간들은 디테일하게는 저마다 그 이유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이유로 전락했다. 끌라망스는 꿈을 품는다. 속죄판사의 역할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 모두를 구원하기로 한다. 자기와 같은 속죄판사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항의 의지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보는 것이다. 이번에는 바다로 몸을 던지는 여성이 있다면 누가 보든 안 보든 분명 구해줄 것이다. 웃음소리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오 아가씨, 이번에는 내가 우리 둘을 모두 다 구원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몸을 내던져 주십시오!” 한 번 더라니, 이 얼마나 무모한 말입니까! (중략) 물이 얼마나 차가운데요!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늦을 겁니다. 천만다행이지요!     


  그러나 그는 그 아가씨를 구해줄 수 없다. 변진섭의 노랫말처럼 너무 늦어버렸다. 앞으로도 영원히 늦어버릴 것이다. 속죄할 길도 갱생할 길도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고 전락했다. 그런데도 다행이다. 그것도 천만다행이다. 그래야만 죽을 때까지 부조리한 이 세상을 직시하며 반항할 수 있을 테니깐. 어차피 삶은 별 거 없고 지루하다. 인간은 재미있게 살아보려고 버둥대 보지만, 그 과정에서 좋은 일 보다는 나쁜 짓을 더 많이 하며 살아간다. 전락한 인생, 의미 없는 인생, 자책하며 살기에는 너무 짧고 허무하다. 구원의 길은 영원히 늦겠지만 묵묵히 반항하며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죽음의 순간이 오더라도 견딜만하다. 외려 구원받게 되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 장면을 보니 『이방인』의 뫼르소가 죽음의 직전에서 외치는 책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둘은 닮았다. 반항하며 살아가는 실존의지,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그들은 나를 참수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로써 더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니 마침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운집한 군중들 위로, 아직 생생한 내 머리를 높이 쳐들어주십시오. 이들이 여기서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또 내가 본보기로서 다시금 이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되면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며, 나는 광야에서 외치며 여기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거짓 예언자의 소임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한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끌라망스와 뫼르소의 의연한 독백을 듣다보니 이상하게도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우리는 해방되려고 끊임없이 반항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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