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급히 문을 두드린다. 살인자에게 쫓겨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도움을 구한다. 급히 숨겨주자마자 칼을 든 살인자가 들이닥쳐 남자의 행방을 묻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를 평생의 신조로 삼아온 나는, 이 상황에서 뭐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나는 "여기 없어요"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하고 말았을까? 아니다. 마음 속으로 생략한, 유보된 부분이 있을 뿐이다. 그건 이를테면 "(내가 말하는 '여기'란 지금 내가 서 있는 문 앞을 의미하는데, 그 사람은) 여기 없어요", "(어제 늦게까지 나와 술을 먹었던 내 친구는) 여기 없어요" 혹은 "(그 사람을 당신에게 내어 줄 나는) 여기 없어요" 일 수 있다.
이런 식의 모호한 어법 또는 얼버무리기를 신학에서는 '심중유보(心中留保 Mental Reservation)'라 부른다. 거짓말의 딜레마를 다루기 위해 도출된 개념이다.
말이 생소해서 그렇지, 심중유보를 한 번쯤 써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때 애들 사이에 자기 말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엄창'이란 맹세(?)가 유행했다. '내 말이 거짓말이면 우리 엄마가 창녀'라는 뜻이다. 만약 "엄창"을 외치면서 마음 속으로 '엄마가 창문닦는다'라 생각했다면 심중유보에 해당한다.
애들 장난이면 웃어 넘기겠지만 어른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 심중유보를 쓰면 꼴사납다. 중국산 고춧가루와 양념으로 만든 김치를 "(배추는 국산이니까) 국산이에요"라고 말하거나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제가 당선 되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복합 쇼핑몰을 짓겠습니다"고 외치는 식이다. 당선 후 왜 공약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져 물으면 아마 "(한 번 더 뽑아 주시면) 꼭 짓겠습니다"라 할 것이다.
결국 심중유보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적 갈등을 무마하기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심중유보의 정당성을 판정하려면 이 상황이 정말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부터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누군가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면 심중유보는 정당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김치의 국적 변경이나 공약(公約)의 공약(空約)화에 사용된다면, 심중에 유보되는 건 그의 양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