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결말은 늘 싱거웠다. 사실은 그다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니까. 장르적 특성이 그러하니까. 아이들에게까지 세상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까. 모두가 짠 듯한 결말에 아마 그래서일 거라고 믿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다음이 궁금했고 세계 명작을 읽기 시작했다. 불합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어쩌면 책 속에 있을지 몰랐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 속에 있으면 안전했다. 시련과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장면을 읽을 때면 이건 허구야와 내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와 일어난다 해도 책을 통해 예습하니까 괜찮을 거야 사이를 수천 번씩 오갔다. 그러나 '간접 경험'이라는 것은 어딘가 한참 모자랐다. 몸소 겪는 것이 기본값인 '경험.' 활자로 느끼는 시련과 고통과 절망은 죽을 만큼 힘든 오늘과 온도 차가 엄청났다. 오늘 겪은 시련과 고통과 절망이 책 속의 어느 대목과 유사하면 절절했고 그 문장들은 특별해졌다. 그것들을 마주할 때면 어느 날은 맞아, 하고 가볍게 넘었고 또 어느 날은 눈에 밟혀 수첩에 적었다. 문장을 외울 정도가 되면 이제 좀 괜찮은가 싶었다.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하며 유년을 건넜다. 그 둘을 연료 삼아 청년을 지났고 어느덧 장년을 관통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삶은 부조리하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삶을 의미 있게 살아 내야 한다는 두 개의 큰 주제만이 변주되고 변주될 뿐 핑크빛 결말은 없었다. 세상살이가 그랬고 작품은 세상을 모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결말에는 상(相)이 단절되어 있다. 그 문장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는 작가의 정직한 보고이자 진술일지 모른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매일은 또 매일을 더한다. 죽기 전까지 삶은 완료되지도, 완성되지도 않는다. 매일매일이 완료되고 지속되고 반복되고 진행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싱거운 결말의 동화를 알면서도 자기 암시 삼아 읽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