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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독가의 서재 Sep 07. 2023

[먼길로 돌아갈까?]를 읽고

친절하지 않은 책리뷰 3


아침 8:30분 나는 동네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울고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며 그 슬픔을 그리고 애도의 순간을 텍스트로 만나는 순간, 나는 20대 중반 회사에서 만난 선배의 죽음이 새삼 떠올라 꺼억 꺼억 울었다.      


선배는 당시 현장에서 보기 드문 여자정비사였다. 말 그대로 센 언니 기운에 말도 걸기 어려운 매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선배와 달리 사무실 근무를 하였기에 접점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까. 그러다 퇴근하는 어느 날 같은 곳에서 내리며 서로 동네주민임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선배와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날이면 선배는 나를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며 산책 아닌 산책을 하며 동네를 함께 걷기도 했다.  


선배에 대한 마음이 터진 것은 그녀의 집에서 밥을 처음으로 먹던 날이었다. 퇴근길 뜬금없이 자기 집에서 밥을 먹자고 했다. 첫 방문이라 잠시 고민했지만 초대하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불편할 거 같지는 않아 고민을 빠르게 접고 그녀의 집을 갔더니 너무 단출한 밥상에 당황했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선배의 취향이었다. 그렇게 강한 이미지였던 선배가 그릇과 문구류에 얼마나 귀염뽀짝한 모습을 보이던지. 그릇과 문구류로 수다를 떨었던 상대는 그때 이후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


그날 반찬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고추가 맛있다면 쌈장에 찍어 먹자고 했다. 아주 초록의 고추였다. 순간 쌈장이 없다며 웃더니 된장을 덜어내며 이쁜 종지 그릇을 찾는다. 담는 그릇이라도 이쁘자며 씨익 웃던 첫날 함께 선배네 집에서 밥을 먹던 기억 중 유일하게 쨍한 기억으로 남아 변색되지도 왜곡되어 기억되지도 않고 한 컷의 사진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나는 선배의 터무니없고 소박한 밥상 앞에서 선배에 대한 마음을 텄다. 그때부터 그녀는 선배가 아니라 동네주민이며 동네언니가 되어 우리는 빈틈이 생기면 연락을 해 만났다.


그런 그녀의 부고를 이동 중이던 전철 안에서 받았다.

사유는 자살이었다.

며칠 전 밥 먹자고 전화했는데 나는 부쩍 가까워진 거리가 부담스러워 선배를 피하고 있었던 때였다. 아무 이유도 없으면서 거짓말을 하며 그날 식사 약속을 거절했던 것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밤늦게 찾은 그녀의 빈소. 나와 그녀의 관계는 회사에서 그리 알려질 일이 없다. 팀도 다르고 근무지역도 달라 누구도 우리가 친하다는 걸 그리 알리 없는 사이었다. 선배의 죽음은 많은 루머를 생산했다. 나는 여전히 선배의 자살 이유는 모른다. 그녀의 죽음 뒤 승냥이처럼 달라붙어 가십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그저 미울 뿐이었다. 나는 매우 슬펐고 한 동안 그 슬픔이 깊어서인지 그녀의 죽음에 무서워했고 두려움에 밤에는 혼자 있는 집에 가지 못해 언니네 집에서 한동안 출퇴근을 했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며 그녀를 기억에서 지우기에 급급하며 살았다. 다시 돌아보니 참으로 미성숙했다.




40 중반이 되어가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늘 어렵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가끔은 나와 맞는 솔메이트를 만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며 나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내가 꿈꾸던 완벽한 관계의 모습을 갖춘 이들을 책 속에서 만났다. 바로 게일 콜드웰의 [먼길로 돌아갈까?]라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명랑한 은둔자]로  유명한 캐롤라인 냅 과 <보스턴 글로브>의 서평가였던 이 책의 저자, 게일 콜드웰의 7년간의 우정을 다룬 에세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갑작스런 폐암판정으로  죽은) 캐롤라인 냅의 죽음 후 그녀와의 우정을 그리고 그녀에 대한 애도의 에세이다.


몇 년 전 명랑한 은둔자로 만났던 캐롤라인 냅의 책은 내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대체 왜?’라는 의문의 작가였다. 그러다 올해 [드링킹]으로 캐롤라인 냅의 책을 다시 접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스스로의 고백이자 동시에 그 중독에서 벗어난 일련의 과정을 아주 세밀하고 농도 짙게 전하는 책이었다. 본인의 고백을 이 정도까지 파헤치며 마치 제3의 관찰자처럼 객관적이었다가 때로는 너무나 진솔하게 독자가 당황할 정도로 스스로를 파헤쳐 이 책을 읽고 왜 사람들이 캐롤라인 냅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지 알게 되었다. 이후 순차적으로 그녀의 저서들을 읽어가다 보니 마치 그녀의 삶에 깊숙이 관계를 맺고 사는 지인처럼 그렇게 그녀의 글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보니 캐롤라인 냅이라는 이름만 들으며 어느 순간 반자동처럼 오호? 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 책도 그랬다. 그냥 캐롤라인 냅이라는 이름이 나와 저자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냥 읽어 되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오랜 기간 글을 써온 비평가답게 그녀의 글체 역시 놀라우리 만큼 단어와 문장 내용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한 편 한 편의 에세이가 주는 여운을 캐롤라인 냅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또 한 명의 작가였다.


이 책은 2013년 이후 출간되었다가 잠시 절판되고 다시 2021년 출판되었다고 한다. 비혼여성, 여성들의 우정, 거기에 반려견과 연결되어 다른 종과의 연결성까지 지금은 어느 것 하나 어색할 것이 없지만 첫 출간 때는 우리나라에서 그리 호감을 얻지 못했나 보다.


이 책의 제목은 저자와 캐롤라인 냅이 서로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다 서로 더 함께 하길 원하며 “집까지 먼길로 돌아갈까?”라는 의미로 늘 캐롤라인 냅이 이야기한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어의 관용구로도 쓰이는데 하루가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날이면, 누군가 말하곤 하는 표현으로 “좀 슬렁슬렁 가보자, 시간이 천천히 흐르도록, 지금이 조금 더 길어지도록”.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이 주는 슬픔과 남은 사람의 애도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은 내게 정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모습이 그리고 이후 반려견까지 떠난 보낸 저자가 다시 남의 생을 살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모습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이런 감정이 내게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한 책이었다.


처음으로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죽음은 늘 피하고 회피의 대상이었나 보다. 그런 내게 이 책을 죽음을 마주하는 그러면서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한 개인의 상처, 슬픔, 그리고 이후의 삶까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애도는 지극히 개인의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그 지극한 애도의 감정을 이렇게 공유하며 글로 풀어내어 준 것에 역시 글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진정한 작가의 면모를 보며 홀로 숙연해지는 책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그 맺은 인연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죽음을 애도하고 또 나의남은 생을 받아들이며 사는 모습은 고전과 철학책만큼 내게 깊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성숙한 어른의 우정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미성숙했던 그 시절  못한 그녀에 대한 애도를 뒤늦게라도 하며 나 역시 작은 기억의 파편을 남겨본다.   



P.124  처한 사항이 다르고 나이 차이가 있어 각자 놓인 지점이 달랐을 뿐 우리는 같은 길 위에서 움직였다.


P.128 그날 우리는 실재하는 삶과 겉으로 보이는 삶에 대해, 타인의 삶을 놓고 우리가 무엇을 가정하고 투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P.132 우리의 결합에는 일상의 묵묵함과 종요로움이 함께 있었다. 장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격자 울타리처럼.


P.136 우리 둘은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길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P.141  캐럴라인과 내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안온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우정의 근간에 우리가 함께 견딘 거친 여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P.183 죽음이 이야기의 이 아님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몇 년이 걸렸다. 죽음은 이야기를 바꾸어놓는다. 일방적인 대화체의 오류와 통찰을 수정하고 고쳐 쓴다. 우리 대부분이 서로의 삶을 드나드는 건 죽임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아니라 거리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다- 시공간과 마음의 권태야말로 인간관계에서 더 냉정한 사형집행인이다.

 

P.197 이 모든 게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주 옛날 일 같기도 하다. 상상 속에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깊은 균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인 것만 같다. 이 모든 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P.209 우리는 몇 년을 수다로 보낸 사이였다- 남들이 포기했을 상황에도 수다를 통해 감정과 대화와 복잡다다한 일상을 가닥가닥 해체 했다. 이제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러니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안무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P. 225 그녀가 죽었다, 이 말이 떠올랐다. 그 자체로 참혹한 말이었다. 나는 죽음을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하는 문화가 언제나 싫었다. ‘세상을 떠났다’ ‘유명을 달리했다’ ‘고이 잠들었다’. 이런 말들은 회피적이고 감상적인 것 같았다. 죽음이라는 개념에서 그 진술의 효력이 탈색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어째서 이 단어를 희석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죽었다.


P.231 삶이 중단된 공간. 문 옆에는 여전히 캐럴라인의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녀의 외투- 개 산책에 걸맞은 전천후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개 비스킷도 그대로였다.


P.233 메멘토 모리. 죽은 자를 상기시키는 것들. 우리가 이런 지나간 시간의 표지- 무덤에 남겨진 야구공과 장신구, 카드-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건 고인이 남긴 자리를 이것들이 메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P.235 캐럴라인과 나는 서서히 서로의 삶에서 부동의 1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p.236 인생은 반박의 여지없는 전진운동이고, 죽은 이들 너머를 겨냥해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몇 달간 나는 시간이라는 것의 폭력성을 실감했다.


P.237 캐럴라인의 죽음은 심장에 뚫린 빈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없고 채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의 부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이고, 범죄현장처럼 보존된 기억이었으며, 이 현장보존선을 제거하는 것은 무도한 행위일 터였다.


p.238 애도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우아한 외관- 초반에 쏟아지는 화환과 음식과 배려-을 벗기고 보면, 애도는 지극히 개별적이어서 관계 자체만큼이나 복잡한 궤적을 그린다.


p.256 클레먼타인이 습격당한 사건은 당시에는 나를 혼란과 불안에 빠뜨렸지만 그 여파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런 공포와 폭력을 겪고도 내 개가 안전하게 살아 있는데, 친구를 잃은 슬픔이 무색해질 정도로 개를 걱정하는 나의 모성은 들끓고 있었다. 나는 달래지지 않는 나의 불안이 부끄러웠다. 클레먼타인은 살아 있고 캐럴라인은 죽었음에도 나는 지금 목숨을 구한 쪽을 두고 괴로워하고 있었으니. 애도의 지침서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우리는 산 자를 위해서만 애를 태운다. 나는 아마 일생 동안 캐럴라인을 애도하겠지만, 더 이상 그녀를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P.266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인생의 근본적인 슬픔 속으로 곤두박질치지도 말고, 그것이 나의 남은 나날을 규정하리라 지레짐작하지도 말고 그저 그 슬픔을 포용하는 것. 이런저런 일상적인 실수와 후회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정이 그 최후보다 한결같이 더 신비롭고 매력적일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진짜 요술이다.


P. 268 우리는 상실을 받아들이고, 상실은 우리를 깎고 다듬어 이전과는 다른, 더 다정한 생명체로 만든다.


P.271 옛날 나바호족 사람들이 러그를 짤 때 어울리지 않는 실을 한 가닥씩 넣고 그 도드라지는 색이 바깥 테두리로 이어지게 했다. 이 의도된 결함은 러그 안에 갇힌 에너지를 풀어주고 또다른 창조로 이어지도록 길을 낸다는 뜻에서 영혼의 줄이라 불렀으며, 이 줄의 유무로 진품을 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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