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는 책, 영화 모두 성공적인 작품이다. 2001년 얀 마텔이 책으로 발표하고 다음 해 그 누구의 이견 없이 2002년 멘부커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뒤 이안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고 영화 역시 아카데미상과 골드글러브상을 휩쓸었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 출간되어 꾸준히 사랑받으며 2022년 개정판이 나왔다.
줄거리는 한 줄로 말한다면 주인공인 인도소년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227일간의 생존투쟁의 표류기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했던 파이의 부모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물원을 접고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고 일본 화물선에 타고 가게 된다. 태풍을 만나 화물선은 가라앉고 겨우 살아남은 파이는 캐나다에서 팔기 위해 데려왔던 동물들 중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를 타고 생존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에서 호랑이와 파이만 남게 되고 서로 경계와 의지하는 묘한 연대를 이룬다. 망망대해에서 때론 적이 되고 친구가 되어가며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하다 멕시코만 연안까지 도착하게 된다. 만에 도착 후 호랑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글로 들어가고 사람들에게 발견된 파이는 일본 화물선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병원에 있던 파이에게 일본 운수성 직원들이 찾아오고 침몰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나오지 않는 이야기 2가지 버전으로 그들에게 말해주게 된다.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나오는 이야기요? [얀 마텔, LIFE OF PI, 작가정신, 482쪽]
까도 까도 계속 새로운 매력이 나올 때 우리는 "양파 같은 매력"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식상한 표현을 내가 쓸 줄 몰랐지만 바로 이 책이 내게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질문, 생각거리를 던져 마치 양파 같다. 재독 할수록 새로운 것들이 보여 지금 깊이에서는 이 책을 더 이상 다시 읽기를 하지 않기로 해야 할 정도다.
아마 몇 년 뒤 다시 읽으면 또 어떤 주제로 나를 사로잡을지.......
뻔히 내용을 알면서도 기대되는 책이라니, 어처구니없지만 사실이다.
스토리는 단순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에 인간사에 대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신에 대해, 선택에 대해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온통 비유와 은유적으로 담긴 내용들이 많아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 찾아보니 2023년 6월 서울국제도서전 초청작가로 방한한 그와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파이 이야기』는 신적인 존재나 신앙, 종교에 대한 고민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고 했던 작품이다. 컴퓨터 같은 경우는 고도로 발달된 것이지만, 도구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아무리 발전을 하고 발달을 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를 정의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예술이나 종교다. 종교나 예술만이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이 세상과 다른 것들을 전한다. 『파이 이야기』는 바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본 것이다.”
파이 이야기의 해석은 넘쳐난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단테의 「신곡」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탓에 2부의 주내용이었던 태평양에서의 생존표류 부분은 「신곡」 연옥 편을 계속 떠오르게 했다.
상황이 좋을 때는 기분이 처지고, 상황이 나쁠 때는 기운을 낸다. 나 같은 처지가 되면 , 당신 역시 기운을 낼 것이다. 상황이 나쁠수록 정신은 위로 오르고 싶어 하는 법이니가. 그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끊임없는 고난 속에서 슬프고 절망적일 때, 신에게로 마음을 돌려야 했다. [같은 책, 431쪽]
연옥은 지옥과 달리 별이 보이고 영원히 머무르는 곳이 아닌, 자신의 죄를 회계하거나 현세에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간절히 빌어주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다. 또 현실의 세상과 가장 닮은 모습을 가진 곳이다. 파이가 마주한 태평양에서 호랑이와 함께 표류하는 상황자체가 마치 연옥에서 자신의 죄를 회계하는 장면들과 연결되기도 했다.
멕시코해변에 도착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리차드 파커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물론 고난을 극복하긴 했지만. 형제자매를 만나서도 아니었다. 사람을 본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내가 흐느낀 것은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중략 ~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별 인사를 망친 일이 오늘날까지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다. [같은 책, 433쪽 ~435쪽]
하지만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아직 나의 것이 되기에 나의 깊이가 짧다. 오히려 내가 붙들린 것은 벵골 호랑이였던 리차드 파커의 의미이다.리처드 파커는 파이에게 아니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가.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나에게 리처드 파커는 파이에게 과거의 모든 것, 모든 순간, 모든 사람.... 그의 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만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진, 사라져야만 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그 모든 것. 부모도 형제도 인도도 모두 떠난........
" 인생에서 잘 보내는 것과 받아들임" 그 자세에 대하여 생각게 했다. 말로는 뭐든 알지만 현실이 되었을 때 쉽지 않은 모든 것. 하다 못해 방금 전 일어났던 일들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해말이다. 어떤 것은 일상적이라 굳이 잘 보내고 받아들이고 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우리는 보내고 있고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해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당연하기에 상처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님을 , 무감각 해지지 않기를 , 그래야 잘 보내가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영화 VS 책 중 무엇을 먼저 볼까요?'라고 묻는다면
통상 책이 영화화되었을 때, 그래도 책부터 읽는 것이 좋다고 권하지만 이번만큼은 영화를 먼저 보는 것에 한 표를 던진다. 개인적인 이유는 첫째, 책의 도입 부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시 읽을 때는 포스트잇을 온통 붙일 만큼 도입부의 텍스트들이 의미 있게 다가와 모든 문장들을 더 깊게 읽을 수 있었고 또 영화가 책의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다. 책은 영화를 본 뒤 영화가 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가이드처럼 구석구석 읽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