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취업 여성의 회사 생존기

말 안 해주면, 내가 추리소설을 쓰게 되거든요.

by 안독가의 서재


재취업을 하면 사람이 두 가지 능력을 얻게 된다.

하나는 업무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눈치력이다.

나는 후자를 꽤 빠르게 장착했다.
말투 하나, 표정 하나, “아~ 그건 뭐…”로 시작하는 문장의 뒷부분까지 자동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쯤 되면 회사가 아니라 추리 게임 속 NPC 같다.



나는 회사에서 꽤 성실한 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되게 많이 참고 일하는 사람이다.

공휴일에도 일했고 근무 시간 외에도 일했고 수당은… 뭐, 마음속으로 받았다.

“이건 커리어에 도움이 되니까.”
“재취업이니까 일단 보여줘야지.”
이 말들을 주문처럼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휴를 쓰게 해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대휴. 연차도 아니고 그 어딘가 애매한 제3의 휴식.

“지금까지 고생했잖아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이런 자막이 떴다.

어… 지금? 왜 갑자기?


고맙긴 한데 찝찝하다. 나는 그냥 “아, 네…” 하고 대휴를 썼다.
사흘이나. 이쯤 되면 회사에서 휴가를 주는 건지 입막음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축의금 사건 갑질러님의 자녀 결혼식 날 축의금을 부탁했다.

가기 전부터 다녀와서까지 계좌번호 달라고도 했다. 몇 번이나.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요.”

…?

내가 뭘 한 거지?

돈을 안 내는 능력도 타이밍이 필요한 건가?주려고 했는데

못 내게 된 사람의 기분은 참 애매하다.
선의는 남았고 결과는 없고 찝찝함만 남는다.


결정타는 업무 파일이었다. 나는 공유 네트워크에 내 업무를 거의 전부 올린다.

진짜 전부. 오픈북 시험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업무 자료 잘 올리고 있죠?”

그 순간 내 안의 추리 작가가 깨어났다.


아… 불편해할 상황이 예측되는 것인가?
그래서 대비하는 건가?

결국 터졌다. 연말 회사 기여자에게 포상을 준다.

문제는 나한테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상 못 받은 것보다 배제된 것보다 더 화가 난 건 이거였다.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어.”
“네가 기분 나쁠 수도 있어.”
“미안해.”

이 세 문장이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닐 텐데.


출근해서 내가 인사를 안 하자 상대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오해가 아니라 각자의 해석 게임이 시작됐구나.


회사에서 제일 피곤한 건 야근도 아니고 업무도 아니다.

말 안 해주는 사람의 마음을 혼자 상상하는 일이다.


재취업 여성으로 산다는 건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감정 조절

눈치 계산

괜찮은 사람 연기

속으로 1인 토론회


이 모든 걸 동시에 돌려야 한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버티는 건 프로페셔널함이 아니라 혼자 너무 많이 쓰는 체력 낭비라는 걸.


그래서 나는 말하려고 한다.

“그때 미리 말해주셨다면 저는 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조용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재취업은 다시 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니까.

그리고 다음엔 제발 추리소설 말고 업무만 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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