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그림이 곧 삶,
천진했던 비운의 화가 이중섭과
그가 사랑했던 '발가락 군'을 만나다
흔히들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에 대해 논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예술가의 삶의 궤적이다.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동안 기쁘고, 즐겁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든 감정들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그만의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마련이다. 예술가가 갖고 있는 '자기만의 색깔'이라는 것은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자연스레 얻어진, 혹은 끊임없는 고민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일궈낸 내면의 일관성의 반영이다. 작품의 일관성은 작가의 내적 일관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의 삶과 예술이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인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중섭은 그의 전 작품에 걸쳐 유럽의 야수파 화풍과 더불어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예술적 삶의 일관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소>는 굵고 거친 터치와 개성적이고 강렬한 묘사로 대상의 사실적 재현을 불허한 듯한 야수파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또 '소'라는 소재와 그것이 취하고 있는 눈빛, 모양새와 색감에서 어두운 시대에 불응하는 민족적 정서를 분출하고 있다.
한편으로 게와 물고기를 갖고 노는 아이들을 그린 군동화 작품에서는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의 극도로 빈곤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두 명의 아이와 함께 도일한 아내 '남덕'은 이중섭 삶의 유일한 희망이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며, 끝없는 키스와 찬사를 받아야 할 참된 애정의 주인공이다. 발가락이 예뻐 '발가락 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녀는, 일본에서 끊임없이 남편 이중섭과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당시 주고받은 편지들이 이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에 이중섭의 대표적인 작품들과 함께 실려 있다.
예술가에게 가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 같은 관계라지만, 전 생애에 걸쳐 가난과 그로 인한 가족과의 이별을 숙명처럼 감내하면서 그림을 그린 이중섭을 생각하면 일종의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 현실의 괴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아내 남덕에게 편지를 통해 수없이 애정을 표현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편지 모서리마다 '뽀뽀'를 60번이나 써 보낸다. 그가 보내는 편지의 끝은 늘 '조금만 더 참으면 만날 수 있고, 행복한 앞날만을 생각하며 염려하지 말라'로 끝난다. 그러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받지 못한 돈 때문에 곤궁에 빠져버린 현실, 아무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현실은 비참했다. 남의 집을 전전하고, 돈이 없어 끼니를 챙기는 때보다 굶는 때가 더 많았던 그에게 남은 희망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뿐이었다.
이중섭에게 그림은 더 나은 삶을 모색하려는,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고통스러운 몸부림이었다. 이중섭에게 그림을 버림으로써 더 나은 것을 희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림을 통해서만 희망을 볼 수 있었고, 나은 미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운명이라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기에 폭풍 같은 시대를 힘겹게나마 살아갈 수 있었고,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발가락 군'이 있었노라고, 중섭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