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1. 23:22
무엇을 할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엄마의 손을 벗어난 이후부터 늘 해 온 고민이다.
운동 취업 공부 독서.. 그 어느 것도 선뜻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했다.
취업을 하려 해도 단절된 경력이 걸리고, 무엇인가 배워보려 해도 빠듯한 생활비가 걸린다.
엄마가 된 후 이어 온 나의 할 일..
밥 차려주고 설거지하고, 무료하게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제 내 손길이 없어도 아이들은 제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는 건 나에게 남은 몇 안 되는 엄마의 의무인데... , 내 짜증의 이유이기도 하다..
잦은 설거지로 만성이 된 주부습진 때문일까... 해도 해도 능숙하지 않은 요리실력 때문일까...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집안을 둘러본다.
작년 겨울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새 집은 방이 4개 있다.
부부 침실과 두 딸아이가 함께 쓰는 침실, 그리고 큰딸 작은딸 아이의 개인 공부방을 하나씩 주고 나니, 여전히 나의 공간은 부엌과 TV를 보는 거실의 소파뿐이다.
내 태블릿과 키보드를 둘 책상... 그리고 충전기를 연결할 콘센트가 있을 곳이 어디일까....
후보지 1. 부엌 6인용 식탁... 한구석 벽면에는 콘센트 단자가 있다.
이 식탁은 이사할 때 유일하게 새로 장만했다.
넓은 원목 식탁은 이 낡은 집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나의 애장품이기도 하다.
넓고 익숙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한쪽 구석의 수저통과 물컵, 어지러이 널린 식자재들과 식탁을 나눠 써야 한다.
무엇보다, 이 식탁 앞에서는 나는 주부다.
내가, 이 집에서 주부 또는 엄마가 아닐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싶다.
후보지 2. 거실의 소파..
소파 옆에는 긴 멀티탭을 연결해 둬서 가족들의 휴대폰을 한꺼번에 충전할 수 있게 했다.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을 허용하는 편이다. 대신 요즘엔 충전기를 감시하는 중이다.
나는 이 소파 옆에 앉아 하루 종일 아이들을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청소기도 돌리고, 맘 카페도 둘러본다. TV로 넷플릭스 신상도 보곤 하지만, 주로 아줌마들과 카톡을 하고, 모바일 게임을 한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날에는 휴대폰으로 제법 괜찮은 레시피를 검색하기도 한다.
책상은 없지만 대충 방석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태블릿과 키보드를 올려두면 타자 치는 데 문제도 없다.
그런데 계속 여기에 앉아있는다는 건, 그냥 머물러있겠다는 뜻이겠지.
이 자리에서 무슨 새로운 것을 할 수 있을까?
후보지 3. 거실 베란다 앞 창가...
여기에는 전기선도 없다. 책상도 없다. 의자도 없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이다. 이제까지 반려식물들 돌볼 때만 방문하던 장소이다. 솔깃하다.... 까짓 책상이나 의자는 애들 방에서 가져오면 된다.... 흠 괜찮다.
그런데...... 그런데 남편의 점유지와 너무 가깝다.
남편은 절친이 이사 축하 선물로 사 준 리클라이너 의자가 애착 영역이다. 퇴근 후 집안일을 모두 마친 그가 휴대폰 동영상을 들으면서 쉬는 장소이다.
이사 후 남편의 집안일은 청소가 되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매일 아침저녁 마룻바닥을 닦는다.
리클라이너 의자가 남편의 휴식 영역이라면, 그의 관리 영역은 온 집안의 마룻바닥이다.
그는 현관 끝에서부터 맨 손으로 마룻바닥을 닦는다. 걸래도 물티슈도 없이 오로지 오른손으로 온 집안의 머리카락과 먼지를 한 군데로 모은다.
먼지를 모으면서 그는 수양을 한다고 한다.
화내지 말고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남편이 늘 하는 말이다.
고집스럽고 예민한 아내와 살면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터득한 듯하다. 무던하고 착한 남편이다. 리클라이너 옆에 내 책상을 놓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안 쓸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쓰는 이 넋두리들을 남편에게 검열받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후보지 4. 안 방 앞 베란다
예전 집 베란다에는 수납장과 빨래 건조대, 아이들의 때 지난 장난감들과 선풍기 청소기 등등의 자질 구리 한 가전제품들을 수납한 창고였다.
이사 온 후에는 이방 저 방 수납공간도 많이 생겼고, 이사하면서 많은 짐도 버렸기에, 이 베란다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캠핑용 의자만 덩그러니 있다.
비상탈출용 완강기 박스 옆에는 전기 콘센트도 있다!
일단 청소.... 물로 박박 먼지를 씻어내고, 걸레로 물기도 닦고, 아이방에서 작은 보조 데스크를 가져다 놔봤다.
책상이 낮아서 의자도 낮은 걸 찾아야겠는데.... 캠핑용 의자가 제법 어울릴 거 같다.
콘센트에 긴 멀티탭을 연결하고, 아직 더위가 가지시 않았으니 선풍기도 가져다 놨다.
집에 남아도는 태블릿에 무선 키보드를 연결했더니 타자가 편해졌다.
내가 만든 나의 사무실
오랜만에 아는 지인 엄마와 연락이 닿아, 오전에 커피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일하러 다닌다고 한다.
그 집 둘째 아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틈틈이 보육교사 자격증을 준비했다고 한다. 갓난아기 기저귀 갈아주는 거냐며 깜짝 놀랐는 데, 오히려 그 해맑은 아이들 덕분에 힐링받고 집에 온다고 한다.
친정 새언니는 조카가 사춘기 들어설 무렵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고, 어머니 합창단 지휘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만 바라보던 주변의 엄마들이 하나 둘, 자기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나는 그들이 엄마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
그렇다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취미를 위해 거금을 쓸 여유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거창한 취직이나 여행 모임 따위가 아니었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아니라, 확실히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로 있을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브런치를 쓰는 첫날이다.
무슨 주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제목도 그냥 1일 차이다.
무작정 단 몇 줄이라도 끄적여보자.. 하고 시작했다.
이 시도가 1일 차로 끝날지, 5년 차 10년 차 경력직 브런치 작가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오늘은
내가 출근할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한다.
Ps. 거실 소파에 앉아서 늘 아이들 감시를 했는 데, 현관에서 가장 먼 곳으로 자리를 옮기니, 아이들에게 관심이 덜 가게 된다.
내가 잔소리를 안 하니까, 집안이 평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