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녕 Apr 05. 2021

알을 깨고 나오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리고 베를린에서>: 그럼에도 떠나는 자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너만 그래”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이지 않을까. 적어도 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초등학생 때 매운 걸 잘 못 먹어서 물 컵을 몇 잔씩 마시면서 김치를 비우던 아이, 고등학생 때에는 ‘겸손’할 줄 모르고 ‘나대던’ 아이… 대학에 와서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많이 없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통하는 말이다. 그만큼 개인의 개성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회에서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결혼과 출산이 당연하지만 성교육은 제대로 시키지 않는 사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그리고 베를린에서>를 보면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우연이 아닐 테다. 금욕주의적인 뉴욕 유대교 사회에서 벗어나, 친어머니가 있는 베를린으로 오는 19세 에스더. 홀로코스트 이후 급격히 줄어든 유대인 수를 위해 여성은 무조건 아이를 가지는 게 우선인 사회. 그 사회에서 에스더는 ‘다른’ 사람이었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교육과 음악과 탈무드에 관심을 가지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에스더는 “너만 그래”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다. 그 모든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순간, 에스더는 그 말에서 해방이 된다. 



거미줄에 걸린 여자



물론 평생을 유대인 사회에서 살아온 에스더가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베를린에 도착해 친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여성 애인에게 키스하는 어머니를 보고는 뒷걸음친다. 의사가 에스더에게 임신 중절 수술 여부를 묻자, “유대인들은 600만 학살 이후 아이를 더 낳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가장 큰 묘미는, 과거와 현재의 에스더가 어떻게 다른지를 꾸준히 보여주는 데에 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 어머니는 도망친 레즈비언인 에스더가 유대인 사회에서 자리 잡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결혼식에 몰래 찾아온 어머니에게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이라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스더는 처음 남편 얀키에게 말했듯 ‘다른’ 여자였다. 그리고 사회에서 ‘다른 여자’는 항상 함정에 걸리기 십상이다. 인터넷마저 금지된 유대인 사회에서 얀키는 ‘전희’라는 단계도 모른 채 아파하는 에스더의 탓을 한다. ‘여자’인 주제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에스더, 동서들과 어울리지 않는 에스더는 말 그대로 ‘거미줄에 걸린 여자’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거미줄에 걸려있던, 결혼 생활과 사회에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여성이 어떻게 삶을 찾아가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한때 홀로코스트로 유대인들이 죽어갔고, 자유를 찾아오던 동독인들이 죽던 호수에서 에스더는 가발을 벗으며 머리를 드러낸다. 신부는 남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머리를 보여주면 안 된다는 규칙에 머리를 자르던 에스더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독일의 호수에 담그며 해방감을 느낀다. 에스더가 음악원의 특별 교육 과정에 지원하고 어머니를 찾는 일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이다. 



발목을 잡는 건 채찍과 당근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빌런은 남편 얀키와 그의 사촌 형 모이셰다. 얀키가 얌전히 유대인 사회를 따르는 소심한 남자라면, 모이셰는 한때 유대인 사회를 박차고 나왔으나 돌아온 탕아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얀키와 모이셰가 에스더를 쫓는 과정을 스릴 있게 그리는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그들이 보여주는 건 채찍과 당근이다. 모이셰는 채찍이다. 에스더를 쫓아가 베를린에서 죽어나가던 유대인들을 이야기하고, 유대인 사회에서 벗어나도 결국 다시 돌아올 것이라 협박한다. 반대로 얀키는 당근이다. 한때는 모든 것을 에스더 탓을 했지만 마지막까지 에스더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남편, 얀키. 얀키는 함께 변하자는 약속으로 유대인 남성의 상징인 긴 머리까지 자르지만, 에스더는 눈물을 흘리며 “너무 늦었다”라고 말한다. 에스더의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에스더에게 얀키의 아이가 있어도 에스더는 돌아갈 수가 없다. 제 아무리 채찍이 무섭고 당근이 달콤하다고 해도 자유로움을 찾는 자에게는 그저 족쇄일 뿐이다.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바람이 분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된다. 에스더는 운 좋게 자신을 지원해주는 음악원 선생을 만났고, 베를린에서 사는 어머니와 화해했으며, 음악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에 성공한다. 실제 삶에서 에스더와 같이 운이 좋은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리고 베를린에서>가 주는 울림은 깊다. 각자의 족쇄를 풀고자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에스더의 노래에 울 수밖에 없다. 뉴욕 유대인 사회에서는 배제된 여성으로, 베를린에서는 이방인으로 여겨지던 에스더가 오디션장에서 유대인 노래를 부르는 그 광경은 다시 태어나는 사람의 장면이다. 그렇게 다시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바람이 불어온다. 


과거의 족쇄는 사라지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시작하는 한 사람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