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테이블>: 관계의 미학
※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새벽바람처럼 걸어, 거니는 그대여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여기 나, 아직 기다리고 있어
심규선(Lucia)의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줄 건가요?' 中
https://brunch.co.kr/@jongkwankimnrzi/5
김종관 감독이 <지나가는 마음들>과 <더테이블>이라는 제목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는 제목들이다. 전자는 영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고, 후자는 분명히 영화의 소재는 드러나나 이야기가 쉽게 짐작되지 않는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제목으로 선택한 것이 현명했다 생각한다.
김종관 감독의 전작 <최악의 하루>을 인상 깊게 보았고, 임수정, 정유미, 한예리, 정은채 등 한국 영화계의 빛나는 여성 배우 4명이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던 영화다. 최근 한국 상업영화 트렌드 상 여성 배우들이 설 자리가 많이 없고, 있다고 한들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이 영화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냐 하겠지만, 필자는 사랑보다는 관계라는 말이 더 포괄적이고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의 한 카페에서 오전 11시, 오후 2시 반, 오후 5시 반, 오후 9시에 한 테이블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흐름을 따르면 시간 순으로 각각의 옴니버스 에피소드를 풀어야 하나, 필자는 조금 다르게 나누어 보려고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네 쌍의 주인공들은 모두 관계를 맺거나 끝내는 사이다. 그중에서도 사랑, 연애에 밀접한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로 나뉜다. 사랑이 시작되는 오후 2시 반부터 볼까.
사랑의 시작: 경진과 민호
– 오후 2시 반
하루를 만나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몇 년을 같이 보냈어도 희미해지는 사람이 있다.
오후 2시 반에 만나는 경진과 민호는 전자다.
<더테이블>은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이것저것 장치들이 많으나 대사 하나하나로 극 중 인물들을 추리해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얼핏 들으면 경진과 민호는 카페에서 만나기 전에 3번 만났고, 그 이후로 민호는 세계여행을 떠났고 경진은 이직을 했다. 영화 소개를 보면 이 둘은 원나잇 스탠드 이후 5개월 만에 재회하는데, 답지 않게 어색하되 설레는 대사로 가득하다.
경진이 눈 앞에 놓인 초코케이크에 대해 상투적인 표현을 늘어놓아도 칭찬하는 민호.
민호가 갑자기 세계 여행을 떠났어도 사진 한 장 정도는 보내줄 줄 알았다는 경진.
그러자 세계 여행 중에 경진 생각을 하며 사 온 물건들을 보여주는 민호.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경진이나 민호나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경진은 전 직장에 비해 현재 직장이 자기가 하고 싶던 일에 가깝지만, 박봉과 야근에 시달린다. 민호는 직장을 그만두고 생애 첫 장기 세계여행을 무사히 마쳤지만, 먹고살 길은 막막하다.
그래도 민호는 소설 쓰고 싶어 하던 경진의 말솜씨를 칭찬하고,
경진은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은 민호를 타박하면서도 창업하겠다는 그의 음식을 궁금해한다.
원래 그렇다.
사랑은 별 것 없는 사람이 별 것 있어 보일 때 시작된다.
둘은 민호의 요리를 맛보려 민호의 집으로 향한다. 경진은 끝까지 일관성 있다.
“이번에도 참 속도 빨라요.”
“그런데 알리오 올리오는 누구나 다 하는 거 아니에요?”
피어나는 꽃처럼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시작.
사랑의 끝, 낙화: 혜경과 운철
– 오후 8시
오후 2시 반에 사랑을 시작하는 경진과 민호와 다르게,
오후 8시에 만난 혜경과 운철은 만나자마자 테이블 위의 꽃잎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이 둘의 사연도 영화 속에서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대화로 유추해보면, 둘은 꽤 오래 만난 애인 사이였고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운철이 결혼을 부담스러워하면서 헤어졌고, 그 이후로 혜경은 현재 약혼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꽤 오랜만에 만난 듯한데, 정작 옛정이 더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혜경이다.
자신은 한 번도 ‘선택’ 한 적이 없다며.
“왜 마음 가는 길과 사람 가는 길이 달라지는지 모르겠다”며.
이 둘의 에피소드는 옛정이 남은 연인, 헤어지는 연인을 지나치다 느낄정도로 잘 표현한 에피소드다. 두 사람은 분명히 오래 만난 사이 같으나 작은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의견이 갈라지고, 마음이 남은 혜경은 운철이 약혼자와 “헤어지라면 헤어질 게.”라 말한다. 거기에 운철은 “나 혜경 씨 못 먹여 살려.”라 답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나 식어버린 커피와 남은 홍차를 두고 카페를 나오는 순간, 두 사람의 입장은 달라진다.
운철은 혜경에게 꿈속에서 둘이 같이 자고, 끊임없이 산책하는 꿈을 꾸었다 말한다. 그러나 혜경은 카페 안에서 운철에게 매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나 운철 씨한테 다시는 연락 안 할 거야.”라 가볍게 말한다. 그리고 혜경은 차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운철을 거절하고 기꺼이 먼저 떠난다. 뒷모습을 보는 사람은 결국 운철이다.
혹자는 흔한 남녀의 이별 모습이라 말할지도 모르나, 필자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국 누가 더 많이, 후회 없이 사랑했느냐의 차이다.
구질구질하다 느낄 정도로 사랑한 사람은, 한번 떠나면 후회 따위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의 뒤로 떨어진 꽃들이 보인다.
또 한 번의 낙화, 사랑의 끝.
추억: 유진과 창석 – 오전 11시
이 둘은 앞의 두 에피소드와 다르게 사랑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유진과 창석은 혜경과 운철과 비슷하게 전 애인이었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혜경과 운철은 잔정이 남은 상태고, 유진과 창석은 잔정조차 없을 정도로 본지 오래된 사이다.
추억이 사랑에 포함될 때가 있고, 사랑이 추억에 포함될 때가 있다.
혜경과 운철은 전자고, 유진과 창석은 후자다.
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네 에피소드 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들이 유진과 창석인데, 도입부부터 잔잔하던 <더테이블>에서 확 집중을 하게 만든 씬이 있었다. 썬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카페에 들어온 톱스타 유진은 차차 가림막들을 벗는데,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벗기 전 창석이 들어오자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다.
“안녕?”
아아, 그 말을 건네기 전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을까.
둘은 유진이 스타 배우가 되기 전 대학 시절에 사귀었던 사이 같다. 창석은 이제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유진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유진의 기억 속 창석은 꽤 좋은 애인이었던 듯싶다. 그러니 스타가 된 지금 다시 보자고 연락을 했겠지. 아련한 추억과 함께.
처음 창석은 유진이 기억하던 사람과 비슷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유진을 보고 싸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한테 매니저 행세를 하며 정중히 몰아내는 모습은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속에서 미화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창석은 그 기대감을 차차 부숴 나간다.
유진은 유명 배우가 되기 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창석을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석이 보는 유진은 그때의 유진이 아니다. 창석이 보는 유진은 단순히 자신의 전 애인이 아니라 ‘톱스타, 배우’ 유진이다. 그래서 지난 시절, 추억을 말하자는 유진의 항변은 창석에게 들리지 않는다. 창석에게는 자신이 톱배우가 된 유진을 한때 사귀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 사실이 무료한 직장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진이 배우로서 참여한 작품들, 유진에 대한 증권 찌라시에 계속 집착한다.
그럴수록 유진의 마음이 식어가는 것도 모르고.
“사진 … 찍어도 될까?”
“(카페 앞의 직장 동료들을 보며) 아아, 여기 커피 맛있다 길래 온 거야.”
창석의 호기심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유진의 추억은 끝났다.
유진은 다시 보자는 창석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자신을 가리고 카페를 나간다.
느림보 거북이: 은희와 숙자
– 오후 5시 반
은희와 숙자는 유일하게 연애 관계에 직접적으로 얽힌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더 눈에 띄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결혼 사기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며, 이번에도 가짜 모녀 연기를 위해 사무적으로 만났다. 그렇기 때문에 삐걱거리기도 한다. 결혼식장에서 어머니 연기에 필요한 정보를 은희가 이야기할 때, 모든 것을 적어놓는 숙자에게 은희가 한 마디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계가 무너지는 타이밍이 온다.
타인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자신과 타인의 공통점을 찾고 공감대를 형성하면, 섬과 섬 같은 두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긴다.
이 둘의 에피소드는, 굳이 연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시작되는 관계의 설렘을 보여준다.
은희의 결혼식 날짜가 5월 30일이라 하자, 몇 년 전 사고로 죽은 딸을 떠올리는 숙자.
결혼식 이야기를 계속하다, 원래는 스포츠 업체 사장에게 작업하려다가 막내 직원과 진짜 사랑에 빠져버렸다 고백하는 은희.
필자는 은희가 어릴 적 별명이 느림보 거북이라고 말하자, 그 별명에 대해서 미리 말해보는 숙자의 모습이 정말 좋았다. (가짜) 사돈 앞에서 말하는 것도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진짜 결혼을 눈앞에 둔 은희를 걱정하는 것이 눈에 보여서.
두 사람 앞에 놓인 따뜻한 라떼 두 잔처럼, 따뜻하게 시작된 관계가 오래가길.
꽃처럼 피고 지는 관계들이 테이블 위를 지나간다.
<최악의 하루>가 더 좋은 작품이었다고는 생각하나,
최근에 본 영화나 드라마들이 다 무거워서 그랬는지 묘하게 따뜻해지는 영화였다.
<일리노어 릭비>처럼.
PS. 민호 역 맡은 전성우 배우가 참 매력적이었다. 민호를 보면서 묘하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