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20세기>: 히피와 펑크, 2세대 페미니즘의 시대를 향한 찬가
※ 원래는 스포일러 없는 리뷰를 쓰려고 했으나 스포일러가 강한 리뷰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영화입니다.
왜 한국판 제목이 바뀌었는가?
필자가 아끼는 영화들 중 미국 독립 영화들이 더러 있는데,
<우리의20세기>도 그 반열에 들어서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이런 류의 영화들을 볼 때 항상 느끼는 점은,
한국 배급사에서 영화의 특성에 맞지 않는 홍보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일리노어 릭비>는 이별에 대한 영화다.
부부가 어떻게 떨어지고 헤어지는 지, 어떤 사건이 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한국판 예고편에서는 두 남녀 주인공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보여주면서 청춘 사랑 영화로 포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해외 영화들이 한국에서 홍보되면서 다소 왜곡되는 모습은 <판의 미로> 등등 꽤나 흔하다.
<우리의 20세기>의 원제는 <20th Century Women>이며, 필자는 원제가 훨씬 잘 맞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된 화자는 10대 소년 제이미이지만, 영화 포스터에서 보다시피 주된 인물들은 20세기에 태어난 3명의 여성이다.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 자체도 찾기 힘들지만(한국 영화에서는 더더욱), <우리의 20세기>는여성 캐릭터들의 입체성이 남성 캐릭터들을 압도해버릴 정도니 보기 드문 영화라고 하겠다.
그런데 예고편에서 장점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쩌잔 말이오 홍보팀 양반….
<서프러제트>나 <히든 피겨스>처럼 대놓고 ‘페미니즘 운동!’ 이런 영화가 아니고 더 세밀하고 개인적인 내용의 영화다 보니 안전한 홍보 전략을 선택한 듯 싶다.
그러나 안전하다고 해서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1979년 산타바바라,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5명의 이야기.
산타바바라는 미국 서부에서 휴양 도시, 부촌으로 유명한 곳이며 특히 은퇴한 LA 부자들이 많이 살기로 유명하다. 그에 걸맞게 영화 속 산타바바라도 아름다운 풍경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산타바바라라는 도시와 그렇게 썩 어울리는 존재들은 아니다.
극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인 1924년 도로시는 남편과 일찍 이혼하고 아들 제이미와 살고 있으며, 영화에서 제이미와 도로시의 갈등은 꾸준히 부각된다. 제이미와 도로시의 세대 갈등은 곧 도로시의 집에 살고 있는 애비와 제이미의 소꿉친구 줄리에게도 영향을 준다. 비중은 가장 적으나, 애비와 마찬가지로 도로시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윌리엄 역시 나중에 보면 그렇게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20TH Century Women,
이토록 현실적이며 입체적인 존재들.
<우리의 20세기>는 스토리 위주의 영화가 아니다. 스토리라인 자체만 놓고보면 밍밍하다. 정확히 말하자. 소재는 절대 밍밍하지 않으나, 이 영화는 자칫하면 자극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사건과 소재들을 관조한다. 촘촘하나 밋밋한 스토리라인을 채워주는 것은 바로 현실에 있을 법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생생함이다. 특히 세 여성 캐릭터들의 현실성은 다른 콘텐츠들에서 찾기 힘든 쾌감마저 준다.
흥미로운 점은 <20th Century Women>으로 제목을 붙인 미국판 영화 포스터에는 5명의 등장인물이 모두 등장하는데, <우리의 20세기>이란 제목을 단 한국판 영화 포스터는 3명의 여성 캐릭터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1924년생 도로시, 1955년생 애비, 1962년생 줄리는 모두 20세기 여성이나 각자의 삶이 뚜렷하다.
이 영화는 또 다른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각 캐릭터들이 다른 캐릭터에대해 설명하는 씬이 적어도 한 번씩은 나온다는 점이다.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결말에서 하나의 반전 포인트로 쓰인다.
줄리는 3명의 여성 중 그나마 전형적인 캐릭터다. 그는 제이미의 소꿉 친구며 가정사로 인해 삐뚤어진 10대 여성이다. 줄리는 다소 강압적인 성격의 어머니로 인해 강제로 청소년 집단 상담에 참여하고, 그러면서 술과 남자로 잊으려고 한다. 하이틴 영화에서 쉽게 볼 수있는 여성 반항아 캐릭터지만, 줄리가 다소 차별화되는 지점은 제이미와의 관계에 있다. 줄리는 같이 자는 남자들과의 관계는 빠르고 잘 잊어버리지만, 소꿉친구 제이미의 방에 놀러와서 ‘그냥’ 이야기하고 자다가 나온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제이미가 ‘그 놈 만나지 마’ 식의 뻔한 말을 던져도 적당히 무시할 줄 알고, 제이미가 자신을 원한다고 해도 똑같다고 말하는 줄리. 줄리 특유의 무표정은 아마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그 안으로 숨겨놓은 상처와 함께.
필자가 가장 감정이입하면서 본 캐릭터가 애비였다. 조금은 전형성이 느껴지는 캐릭터이나 필자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점 없잖아 있다. 애비는 누구나 행복해보이는 산타바바라에서 자랐고, 성인이 되어 뉴욕의 예술 학교로 간 후에야 자신이 그렇게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한다. 짧은 빨간머리의 반항아, 예술가 애비는 자신의 물건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섹스에서도 자기가 주도할 줄 안다. 그러나 애비는 평면화된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은 그녀의 개인사에서 드러난다. 애비와는 정반대 모습인 긴 생머리의 어머니, 젊은 나이에 자궁경부암과 투쟁하되 자신의 일 역시 멈추지 않는 애비. 그러나 상실감 역시 숨기지 않는 애비.
<우리의 20세기>의 또 따른 특이점은 각 캐릭터의 개인사가 1960-80년대 미국의 상황과 밀접하다는 점이다. 애비와 도로시가 특히 그렇다. 애비는 부모 세대의 잘못된 약으로 병을 앓게 되었으며 동시에 뉴욕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2세대 페미니즘을 배운 여성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우리몸, 우리 자신 – Our body, Our selves>,<오르가즘의 정치> 등 미국 2세대 페미니즘의 명저들을 만나는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다.
제이미와 시끄러운 펑크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던 애비는 꽤나 상징적이다.
그래도 이 영화의 가장 중심부에 있으며 독특한 캐릭터는 도로시가 아닐까. 2차 세계대전에 파일럿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스스로와 제이미를 부양할 직장을 다니며, 제이미에게 나름 쿨한 엄마지만 그래도 쿨하지 못할 때도 있다. 도로시는 제이미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도로시라는 캐릭터 자체가 입체적이며, 아들 제이미와 세대 갈등을 겪을 때조차도 도로시는 당위성을 가지는 캐릭터다. 이 지점이 <우리의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제이미의 외박을 이해하면서도 애비가 제이미에게 페미니즘 서적을 보여주는 것은 불편해 하는, 줄리와 애비에게 제이미와의 대화를 도와달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생리와 첫 경험의 잔혹사를 이야기할 때는 불편해하는 도로시.
제이미는 툭하면 도로시가 대공황 시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도로시의 세대는 분명히 생존이 중요한 세대였으나 도로시의 정체성은 시대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고지식한 도로시를 특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줄담배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커리어를 가지고 아들을 걱정하는, 다소 보수적인 어머니인 도로시는 영화 속에서 내내 담배를 피운다. 필자는 도로시의 줄담배 습관이 도로시를 영화 속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든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실 도로시와 같은 특성을 가진 남성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다. 보수적이나 따뜻한 아버지 캐릭터가 홀로 담배피는 모습은 한국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 아니던가.
그러나 도로시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런 성격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주름을 그대로 찡그리며 웃는 도로시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진솔하다.
영화 말미에서 도로시와 제이미가 나누는 대화도 인상적이다.
도로시는 제이미가 자신보다 더 좋은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소망했고,
거기에 제이미는 그냥 엄마랑 둘이서 있고 싶었을 뿐이라 답한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이토록 간결하게 말하다니.
왜 이 영화의 주된 화자는 제이미일까?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된 화자는 제이미다.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처음에는 다소 의아하기도 했지만, 영화 속 제이미의 포지션을 생각해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제이미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 괜찮은 10대 남자아이다. 펑크 음악을 즐기고 또래 아이들과 일탈을 즐기기는 하나 어머니 도로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며 애비가 병원에 갈 때 동행하기도 한다. 그후 애비와 가까워지면서 페미니즘 책들을 즐겁게 읽고, 그로 인해 또래 남자아이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소꿉친구 줄리를 짝사랑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한다.
그런데 제이미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는 점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다. 제이미가 줄리가 다른 남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참지 못할 때, 줄리는 제이미에게 “너도 다른 남자들과 똑같다”고 응수한다.
꽤나 인상 깊은 씬이 제이미가 도로시에게 책의 어느 한 대목을 읽어줄 때였다.
나이 든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대목이었으나, 줄담배를 피우는 도로시의 표정은 묘연하다.
“그걸로 나에 대해서 더 알았다고 생각하니?”
“난 그 책 없이도 내 삶을 설명할 수 있어.”
다른 영화들과 <우리의 20세기>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도로시는 중년층 어머니라고 해서
마냥 무지하지도 않고 마냥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애비와 같이 도로시의 집에 세들어 사는 윌리엄도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애비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애비의 요구를 들어주고, 애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생리 이야기를 해도 당황하지 않는 남성. 윌리엄 역시 한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히피를 자처한 과거가 있다. 히피 생활을 청산하고 사랑했던 여자와 헤어진 후, 윌리엄은 적당히 자동치 정비공 일을 하며 어느 여자던 상관 없이 섹스를 한다.
제이미와 윌리엄은 세 여성 캐릭터에 묻히는 감도 없잖아 있으나, 꼭 필요한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마초적인 남성 캐릭터는 아니고 여성들에 공감할 줄도 알지만 별로인 모습도 보여주는.
1979년을 떠난 각자의 엔딩
일련의 사건을 겪은 주인공들은 1979년 이후 인생을 말한다.
과거의 삶은 타인의 입을 통해 말했다면,
그 후의 삶은 스스로의 말과 시선으로 마무리한다.
누군가는 삶의 터전에서 어려움을 뚫고 어머니가 되고,
누군가는 억압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누군가는 인생의 파트너를 찾아 조금이나마 젊은 시절의 꿈을 이루고,
또 누군가는 결국 인생의 파트너를 찾지 못한다.
아무렴 어떠랴, 우리의 20세기는 더러 흉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아름다웠던 것을.
PS1. 제이미는 정말 귀엽지만 가끔 빡침을 유발하는 구간들이 있다.
PS2. 산타바바라는 필자가 교환학생을 다녀온 곳이다. 등장하는 장소들이 반가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