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캔 스피크>: 적당한 섬세함.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먼저 관람한 영화입니다.
반갑다, 영리하다
기대되면서도 걱정되는 영화였다.
나문희-이제훈이라는 신선하되 믿을만한 조합과 위안부 관련 영화라는 점에서는 기대되었으나,
그동안의 위안부 관련 콘텐츠들을 생각해보면 걱정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선에 중점을 가지면서도 상업성을 잃지 않았다.
신선함과 대중성의 배합이 적절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디테일 역시 알아 있다.
간만에 기대를 충족하는, 영리한 한국 상업영화다.
그래 다 똑같은 남탕 영화 말고 이런 영화 좀 찍어주면 안 되겠니….
할매가 주인공이라니!
나문희 씨가 말하듯이,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노년층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여전히 보기 드문 일이다. 물론 이순재, 김혜자, 나문희 등등 한국을 대표하는 노년층 배우들이야 존재한다. 그러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한다고 한들 대부분은 젊은 세대의 주연들에 밀리는 조연이기 일쑤요, 주인공이라고 한들 복고 열풍의 콘텐츠 속에 있기 마련인 이들 역시 노년층 배우들이다.
여전히 한국 콘텐츠 속에서 노년층의 현재를 다루는 영화/드라마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픽션이라면.
그나마 노년층이 주인공으로 나온 컨텐츠라고 한다면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2016)나 윤여정 주연의 <죽여주는 여자>(2016) 정도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김혜자, 신구, 나문희, 고두심 등 쟁쟁한 배우들을 각자 개성 있는 캐릭터로 내세웠으며 <죽여주는 여자>는 노년층 성매매 여성, 소위 ‘박카스 할머니’를 전면에 세웠다. 두 작품 모두 노년층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다만 <아이캔 스피크>는 노년층 여성과 젊은 남성의 조합을 내세웠다는 점이 신선하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프리랜서 번역 작가 박완(고현정 역)과 소위 ‘꼰대들’의 관계를, <죽여주는 여자>가 ‘박카스 할머니’ 소영과 각종 사회적 약자들이 모인 주택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캔 스피크>의 관계가 대중에게 있어서 훨씬 거부감은 덜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도깨비 할매 옥분과 원칙주의자 공무원 민재(이제훈 역)의 관계 역시 한국 영화에 꼭 필요한 관계였다고 생각했다.
명진구청에 8천 여건의 민원을 전하는 도깨비 할매 옥분(나문희 역)과 원리원칙을 따르는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역)는 영화 초반에 당연히 부딪힌다. 자칫하면 너무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신선하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영어다. 수선집에서 일하면서 왜 영어가 필요하냐는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년째 영어를 배우는 옥분은 우연히 민재를 영어 학원에서 마주치면서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소연한다.
이 영화의 초반은 위안부 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전에 적절한 복선을 까는 동시에 두 주인공, 특히 옥분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이때 문득 지나가는 이야기들이 노년층 여성으로서 옥분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노인들을 위한 영어 교실 이상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전문 영어 학원으로 찾아온 옥분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찬 영어 학원 교실에서 자연스레 소외된다. 이 영화의 서브플롯 주제인 상가 재개발 문제도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옥분은 좋은 마음으로 나서려고 해도 ‘주책 맞은 할매’ 취급받기 일쑤다. 위안부 문제가 드러나기 전에도 한국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드문드문 드러나는 지점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초반에 티격태격하던 옥분과 민재는 우연한 계기로 영어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 민재는 몇 년간 영어를 공부해왔으나 스피킹에 약한 옥분에 맞추어서 수업을 진행한다. 영어 단어 테스트에도 철자는 몰라도 발음을 써놔도 맞게 채점하고, 알까기를 하면서 먼저 한국어를 먼저 쓰는 사람은 꿀밤 벌칙 등등…. 현실적이면서도 발칙한 영어 수업은 초반의 웃음 코드의 핵심이며, 두 사람이 서로의 사정을 더 이해하게 되는 매개가 된다. 이 영화의 개그 코드가 대다수의 한국 영화/드라마의 개그 코드와 달리 약자/소수자 혐오가 없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예고편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보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아이캔 스피크>는 위안부 소재 영화다.
1990년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이후로 한국에서는 수많은 위안부 관련 콘텐츠가 나타났다. 영화로는 쉽게 생각나는 <귀향>, <눈길>이 있고,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애니메이션 역시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왜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CJ 문화재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 당선작(2014)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캔 스피크>는 기존 위안부 관련 콘텐츠에서 한 단계 진화했다.
기존 위안부 관련 콘텐츠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며, 여기서 묘사되는 위안부는 힘없는 10대 여성이다. 이런 과정에서 대부분의 콘텐츠는 위안부를 ‘상처받은 민족의 소녀’ 정도로 포장하기도 쉽고, 더러는 폭력적인 장면이 직접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제강점기 당시에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아직 대중들에게 위안부라는 개념이 생소했을 때,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과 같은 콘텐츠가 접근성도 쉽고 감정 이입이 쉬운 매체라는 점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콘텐츠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선이 비슷비슷한 것은 아쉽다.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용기 내어 증언한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증언을 하는 인권 운동가가 되었으며 하나의 연대를 이루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제외하고 현재의 위안부를 부각하는 콘텐츠는 없었다.
<아이캔 스피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본적 지식은 갖춘 대중들이 또 다른 시각으로 위안부들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위안부 관련 콘텐츠들과 다르게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를 배경으로 한다. 당연히 주인공은 10대 여성이 아니라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시장과 구청을 드나드는 ‘도깨비 할매’ 나문희다. <아이캔 스피크>의 위안부 피해자는 일제강점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웃이다.
같은 위안부 피해자 정심의 치매 현상이 심해진 후, TV에 나와서 증언하는 옥분을 보며 시장 사람들은 놀란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특별히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난다.
현재의 위안부를 주인공으로 삼다 보니,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은 피해를 마냥 일본 탓만 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위안부를 주인공으로 삼을 때보다 위안부 문제의 복잡한 단면들을 더 세세히 드러낼 수 있다.
대표적인 씬이 옥분이 어머니 무덤 앞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며 우는 장면이다. 겨우 집에 살아 돌아온 자신에게 왜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말라 그랬느냐며 우는 옥분. 실제로도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가족에게, 남편에게, 친구에게, 사회에게 들은 말이기도 하다. 옥분과는 다르게 미국에 입양된 남동생이 처음에 옥분을 만나지 않으려는 점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디 가족뿐인가?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처와 사회의 시선 역시 옥분을 괴롭힌다. 증언 이후 시장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옥분은 즉각 알아챈다. 미국으로 증언을 가서도 옥분은 위안부 피해자 등록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일본 측은 그녀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지나친 신파를 만들지도 않으나 철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피 흘리는 것보다는, 상처
이 영화에도 옥분과 정심의 과거 씬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많은 매체들이 하는 실수를 <아이캔 스피크>는 하지 않았다. 즉,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연출을 지양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아니어도 한국 영화/드라마는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직접적인 연출을 많이 했다. 장애인/학교 성폭력을 고발한 <도가니>나 <한공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폭력적인 연출을 하지 않아도, 피해자를 대상화하지 않아도 피해자의 고통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게 제대로 된 연출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직접적인 성폭력 장면은 없으며 옥분의 자살 시도를 정심이 막은 후 두 사람이 껴안고 우는 씬은 위안부 피해자 간의 연대를 강조한다. 일본군이 옥분에게 칼을 긋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옥분은 버지니아 의회에서 욱일기 모양의 칼자국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낸다.
그 외에도 정대협 대표 윤미향 씨를 모델로 한 캐릭터 금주나 실제로도 버지니아 의회에서 큰 역할을 한 마이클 리 의원의 등장, 네덜란드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등등 위안부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보면 사실상 <아이캔 스피크>는 팩션(faction) 영화라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평론가 박우성이 말했듯이,
<아이캔 스피크>로 인해 비로소 한국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재현할 자격이 생겼다.
다시, 옥분 날다.
물론 영화의 단점도 이야기해보라면 나열할 수 있다.
건축학도로서 유학을 갔다가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죽음으로 공무원으로 살며 동생을 부양하는 민재의 개인사를 조금 더 잘 써먹었다면 어땠을까?
서브플롯인 재개발 문제도 공무원 민재가 나서면서 얼렁뚱땅 마무리되기엔 아쉬웠다.
옥분이 민재의 동생 영재가 옥분에게서 집밥을 얻어먹는 것이 두 주연의 연결고리가 되는 설정도, 뭔가 더 좋은 설정이 있었을 텐데.
민재가 7급 공무원 면접을 끝내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 타고 의회에 나타나는 씬이나, 증언 이후 남동생이 찾아와서 용서를 비는 씬도 판타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판타지로라도 위로를 건네주는 상업영화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현석 감독은 대표작 <시라노 연애조작단>과 동일하게 상업성과 작품성을 묘하게 섞는 재주를 이 영화에서도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새로운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그것도 똑같은 영화들이 스크린을 점령한 한국 영화계에서.
마지막 씬에서 옥분은 다시 공항으로 간다. 그녀의 여권은 그동안 다닌 나라들의 도장들로 가득하다. 그녀에게 보안관이 영어를 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
“Yes, I can speak.”
“I’m fine, thank you. And you?”
PS1. 나문희 씨는 역시 대배우다.
PS2. <박열>, <아이캔 스피크> 등 이제훈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씨네 21 인터뷰로.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8174
PS3. 조연들 역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