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고 움직이게 해

<DARKROOM> - 사이먼 도미닉: 다 내려놓고 돌아온 정기석

by 유녕


사이먼 도미닉 aka 정기석, 당신의 힘은 대단해. 한참 뒤에나 만들려고 했던 힙합 카테고리 매거진을 지금 만들게 했으니 말이야. “통일 전에 쌈디 앨범 안 나오겠지?”라 말하며 농담하던 힙합 팬들이 갑작스러운 앨범 발표에 모두 벙쪘고, “야 사이먼 도미닉 Remix, 맘편히 Remix 같은 것만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는 모조리 비껴 나갔다. 갑자기 올린 앨범은 싱글도 아니고 정규 앨범이었다. 그리고 슈프림팀 시절부터 타이트한 랩으로 유명했던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모두 엎어버리고 아예 다른 스타일을 시도했다. 2015년도 앨범 <\ & ONLY>까지만 해도 그레이로 대표되는 AOMG의 비트에 적당한 스웩을 곁들여 랩을 하던 그가, 어쿠스틱한 비트에 느린 랩을 한다. TV에서도 대표적인 ‘부산 남자’ 캐릭터인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앨범을 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했다. 그래서 호불호가 심한 거 같은데, 나는 극호다. 한국 힙합계에서 이런 음악, 이런 앨범은 사이먼 도미닉이라서 가능하다.


슈프림팀 시절에 낸 대표곡 <그땐 그땐 그땐>의 앨범 제목이 <Ames Room>이었다. 이번 앨범 제목이 <DARKROOM>인 건 노린 듯싶다. 첫 트랙 <roommates only>는 자신의 DARKROOM, 암실에 리스너들을 초대하는 곡이다. ‘고통이 다 해준 음반’이라 이제야 너를 초대한다는 사이먼 도미닉, 아니 정기석은 이 방에 있으면 같이 불행해질 수도 있다며 ‘룸메이트’들을 걱정한다. 그는 본인 스스로 암실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리스너들을 자신의 세상에 초대하는 것에 ‘발만 담겨놔도 이해해’라 말할 정도로 신중하다.


다음에 이어지는 <06076>과 <정진철>은 요즘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 취급을 받을 만한 곡들이다(실제로 몇몇 리스너들은 그렇게 느끼는 듯하다). <06076>은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집 우편번호이고, <정진철>은 사이먼 도미닉 자신의 어린 시절에 행방불명이 된 삼촌의 이름이다. <06076>는 한강 뷰가 보이는 좋은 집에서 사이먼 도미닉이 자신의 권태를 말하는 곡이다. 커리어 상의 슬럼프, 우울증, 연애하기조차 쉽지 않은 상태와 헤어지자고 하자 자살 예고 문자를 보내는 애인까지 비트부터가 우울하다. <정진철>은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곡 같은데, 가사 내용이 tmi로 취급되기도 하고 훅이 너무 오글거린다는 반응도 다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곡은 <roommates only>에서 미리 경고한 대로 그의 가장 어두운 기억을 꺼내 보이는 곡들이다. 중간에 끼어있는 <winterlude ‘17>은 두 곡의 경험을 잘 이어준다.


이어지는 <씻겨줘>는 이런 우울한 경험들을 다 씻어 내리고 싶어 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보여주고, 다음 곡이자 타이틀 곡인 <데몰리션 맨(feat. 김종서)>는 그동안 누적된 감정을 폭발시키는 곡이다. 투박하게 소리 지르는 랩이지만 이 앨범의 기승전결 중 ‘전’에 해당되는 곡이기에 어울린다. 이어지는 김종서의 보컬은 사이먼 도미닉의 투박함을 덮어주면서도 시원하게 내지른다.


<데몰리션 맨(feat. 김종서)> 다음 곡인 <귀가본능(feat. JINBO the superfreak)>은 차분하게 감정을 정리하는 곡이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외로워질 우리’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도 외로운 그 기분이 영원히 계속될 걸 알기에’라 읊조리는 사이먼 도미닉은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시간을 앞뒤로 막 왔다 갔다 옮겨 다니며 돌아다니겠지 겁 없이’라는 훅으로 곁들여지는 진보의 보컬은 반갑다. 외로워도 괜찮아. 이리저리 움직이는 시간 속이라도 함께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그에게는, 이제 ‘귀가 본능’이 큰 의미 없다는 노래.


마지막 곡 <얼라>는 솔직히 좀 아쉽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다. 아무리 이 앨범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든 앨범이라고 한들, 그가 ‘부산 남자’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그렇기에 ‘얼라’가 되어 살아 있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말하는 거겠지.


이 앨범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이먼 도미닉의 빡쎄고 타이트한 랩을 기대해서 그런 것일 테다. ‘붐뱁을 하고 싶었어도 김태균의 <녹색이념> 같이 체계를 잡고 하던가’라 말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앨범이 슈프림팀 시절부터 힙합 씬에 있었던 사이먼 도미닉 aka 정기석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잘생긴 부산 남자 래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정신질환을 앓고 한쪽 눈의 시력이 거의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사이먼 도미닉>이나 피처링한 <편히>와 같은 곡들에서 자신의 약점을 랩에 담곤 했다. 그러나 긴 슬럼프를 겪으며 자신의 치부를 음악에 온전히 드러낼 용기를 얻은 듯하다. 사이먼 도미닉 정도로 오래된 경력의 래퍼가 자신의 랩 스타일 뒤엎고 새로운 스타일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에야 <쇼미더머니>의 인기가 사그라들고 <고등래퍼> 2의 김하온과 이병재(빈첸)이 리리시즘을 들고 나오지만, 사이먼 도미닉이 <DARKROOM: roommates only>에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은 갓 신인인 그들과는 다르다.



사이먼 도미닉이 힘을 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슈프림팀과 AOMG 속에서 스웩의 최강을 보여줬기에 가능하다. 최고조를 보여줬기에 힘을 이 정도로 확 뺄 수 있는 거다. 이렇게 힘을 뺀 랩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4집 <808s & Heartbreak>이 있다. 3집 <Graduation>에서는 다프트 펑크의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를 풍부한 비트로 샘플링하고 전설적인 합동 공연까지 했던 카니예가, 어머니를 사고로 잃고 당시에는 생소했던 보컬 랩을 시도하고 슬픈 분위기의 앨범이었다. 당시만 해도 ‘카니예가 노래를 하려고 하는 거냐’며 비꼬는 리스너들이 수두룩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앨범. 아티스트가 겪는 고난은, 역으로 그가 변화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매우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인스타 라이브에서 눈물을 보이는 사이먼 도미닉, 아니 정기석의 모습에는 마음이 영 안 좋다.


그래도, 힘을 빼고 지나친 스웩 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도 좋은 힙합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쌈디의 귀환을 환영해. 이 스타일도 좋고, 다음에는 AOMG 스럽게 빡센 비트로 돌아와도 좋아.


힙합 팬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지독한 슬럼프를 끝내고 스스로 약속한 날짜 6월 15일에 돌아온 당신의 용기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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