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옥은리 구주깨. 굴이 많은 동네라서 구주깨야. 거기는 고용된 사람들 빼고는 다 상산 김씨만 살아. 할아버지 형제들 하고 사촌, 오촌들. 그 일대가 다 우리 땅인데 그 근거가 치마산소에 있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에 바닷가에 치마가 떠내려왔어. 배가 파산해 사람은 죽고 치마만 떠내려온 건데, 그 주머니 안에 벼슬 문서가 들어 있었어. 우리 조상 할아버지들이 글을 잘 해서 나라에서 몇 리나 되는 땅을 받은 거야. 앞산에 그 치마를 모신 치마산소가 있는데 어른들이 일년에 몇 번씩 거기서 시제를 지내.
우리 동네엔 소나무가 장관이야. 노할아버지가 바닷바람을 막으려고 심은 건데, 소나무가 수백 년 된 아름드리라 거기 들어가면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하늘이 안 보이고,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은 나뭇가지들이 웅하고 노래 불러. 또 여름이면 신작로에 아카시아가 하얗게 매달리고 바닷가에 빨간 명개꽃이 끝도 없이 피는데 얼마나 예쁜지 몰라. 썰물에 물이 빠지면 뻘 움푹 패인 데 물이 고이거든. 그럼 아이들이 거기서 발가벗고 수영하고. 밀물에는 땜마, 우리는 보트를 땜마라고 그랬는데 바닷가에 그걸 여러 척 세워 놨다가 물이 들어오면 타고 노는 거야. 아이들은 노를 못 저니까 큰집의 일꾼이 선장이 돼서 태워주고.
우리 큰집이 어떤 집이냐면 아흔아홉 칸 집이야. 큰집은 개나리 울타리가 두껍게 쳐 있어서 그냥은 못 들어가고 꼭 대문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대문 네 개를 거쳐야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어. 그러니 집이 얼마나 크겠니.
할아버지가 쓰는 사랑채만 해도 방이 다섯 개에, 안채에 식구들 방, 행랑채에 일꾼들 방 해서 방이 수도 없이 많아. 광도 벼광 따로 있고 쌀광 따로 있고. 벼광은 크기가 100평쯤 되는데 겨를 안 벗긴 쌀이 섬으로 가득해. 부엌 살림 넣어 놓는 광도 따로 있어서 독독이 팥, 녹두, 밀가루, 김치, 말린 생선이 들어있고.
큰집은 손님이 없는 날이 없어. 그때 무슨 식당이 있어서 식당에서 밥을 먹냐. 군이나 면에서 손님이 오면 백프로 큰집에서 대접하는 거야. 손님이 많아서 밥 하는 사람 한둘로 안 되니까 우리 어머니하고 작은어머니들이 날마다 큰집에 가서 일했는데, 어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나머지 식구들도 일년 365일에서 300일은 큰집에서 밥을 먹어. 거기는 얼마나 먹는 게 풍족한지 나는 뭐가 먹고 싶은데 못 먹은 적은 없어. 맨날 조기 잡아먹고 갈치 잡아먹지, 물 빠졌을 때 호미 들고 나가면 바지락이 금방 한 바구니지, 누가 왔다 하면 닭 잡지, 만두 해먹지, 밤 대추 복숭아도 지천이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큰집은 누구든 잘 대접하니까 빨갱이 세상이 됐을 때도 할아버지한테 함부로 반말 짓거리 하는 사람이 없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보통 분이 아니었어. 동네에서 남자들이 화투를 하잖아. 여자들이 자기 남편이 어디서 화투 한다고 일러바치면 할아버지가 뒤에 지팡이를 끌고서 거기 가는 거야.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다들 삽시간에 도망쳐서 화투를 며칠은 못 하지.
할아버지는 열 둘에 장가가서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뒀어. 쉰까지 봉구면 면장을 했고 군수까지 할 수 있었는데 쉰 넘어서 귀가 먹었어. 할아버지가 지들끼리 말한다고 소리 질러서 할아버지 있는 데서는 말도 잘 못했어. 할아버지한테 말할 땐 한지를 돌돌 말아 나팔을 만들어 귀에 대고 말하고.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우니까 밭에 나가 살았어. 일할 때 걸리적거리니까 저고리하고 바지 팔 다리를 절반씩 잘라 입고. 할머니는 그런 차림새가 남 부끄럽다고 할아버지 일하는 밭엘 한번도 안 나갔어. 우리 할머니는 여름에 모시 옷을 까칠하게 입고 비녀를 딱 찌르고.
할머니 친정은 해주야. 해주는 황해도에서 으뜸가는 도시잖아. 할머니 친정이 시내에서 60리 떨어진 덴데 집이 얼마나 크고 정원을 잘해 놨는지 그 일대 학생들이 전부 그 집으로 소풍을 갔대. 할머니가 열 넷에 우리 집에 시집와서 열 여섯에 첫아이를 낳고 스물 여섯에 며느리를 봤어. 할머니가 체구가 자그마한 양반인데도 보통 강단 있는 게 아닌 게, 어느 날 벼광에 들어갔더니 큰 구렁이가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대. 여느 사람 같으면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올 거 아니야. 그런데 할머니가 섬 있잖아, 벼 두 가마가 들어가게 아가리가 큰 섬을 구렁이 앞에 놓고 귀한 몸인데 함부로 사람 눈에 띄지 말고 여기로 들어가라고 했대. 그랬더니 구렁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는 거야. 할머니가 섬 입구를 끈으로 설피게 매 놓고 열흘 있다 들어가 봤더니 구렁이가 없어졌더래. 집 신이지.
할아버지가 여섯 아들을 훈장을 모셔다 한문공부를 시켰는데, 맏이인 큰아버지가 제일 똑똑했대. 여덟 살에 천자문을 다 외웠다니까 얼마나 똑똑했겠니. 큰아버지가 집안 살림을 맡아 했는데, 소가 맷돌을 돌려서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 있잖아, 그걸 리마다 하나씩 만들어서 사람들이 필요할 때 곡식을 찧을 수 있게 하고,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머니까 마을에 분교를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했어. 큰아버지가 그 학교 교장이야. 명예교장이지. 큰아버지가 어딜 가면 호말 있잖아, 잘 생기고 기름이 반질반질한 호말을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어. 혼자 다니는 게 아니라 일꾼이 옆에서 끈을 잡고 같이 따라다니고.
큰아버지는 열한살에 장가를 갔어. 큰어머니가 키가 크고 인물이 빼어난 분인데 성격이 대찼어. 큰집에 모 심고 벼 베는 날은 동네 사람이 다 오니까 일꾼이 백 명씩 되는데, 큰어머니가 사람 키만큼 높은 사랑 툇마루에 서서 할 얘길 하고 그랬어. 동네 사람들이 큰아버지가 만든 연자방아를 쓰면서 일년에 한번씩 와서 일을 해줬는데, 거기는 뭐든지 일년에 한 번이야. 나무도 여기처럼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일년에 한 번 야산에 나무하는 날이 있어. 그날 나무를 해다 잘라서 말렸다가 묶어서 벼 낱가리 쌓듯 집채만 하게 쌓아 놓고 겨울 지나 여름까지 때는 거야.
큰아버지는 아들 셋에 딸 여섯을 뒀어. 장손인 큰오빠는 동경까지 가서 공부했는데, 공부는 안 하고 멋만 내고 다닌 거 같아. 그 오빠가 하루에 세수를 세번 네번 했어. 그 오빠는 우리 시골에 안 살고 해주 사는데 봄에 고기가 많이 잡힐 때가 되면 기생들을 한 트럭 싣고 와. 바닷가에서 생선 펄펄 뛰는 거를 먹고 노느라고. 그 오빠가 또 뭘 했느냐 하면, 선산 밑에다 수천 평 되는 연못을 팠어. 가운데 섬을 만들어서 나무 심고 물방아를 설치해 물을 대고 일본에서 물고기를 초롱으로 실어다 붓고. 그러니 그 돈을 뭐로 당하겠니. 그래도 돈 많이 써서 돈 없다 소리는 못 들어봤어.
부잣집 장손이라고 하면 온 동네에서 위해 바치는 거거든. 그 올케도 장손의 부인이라고 다들 떠받들고 시어머니도 그 며느리한테는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는 분위기야. 여름에 조개 잡으러 가잖아, 다른 사람들은 뻘을 맨발로 걸어가는데 그 양반만 소달구지를 타고 가. 모시 옷을 까칠하게 입고 부채 하나 들고. 시골 부엌에 음식이 한 가득인데 파리가 없겠냐. 근데 그 올케 방에는 파리가 없었어. 파리도 어려워서 못 들어가는 거지.
우리집
우리 아버지가 아들 여섯 중에 살림을 제일 못 했어. 할아버지가 훈장을 모셔다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했잖아. 딴 아들들은 다 선생이 갈 때까지 공부하는데, 아버지만 살짝 나와서 꼴망태기 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훈장 가면 내려오고 그랬대. 할아버지가 아들들 장가보낼 적에 큰집 옆에 아들들 집을 하나씩 지어줬는데 큰집 바로 옆에 우리 집을 지었어. 아버지를 감시하느라고. 할아버지가 아들들 장가보낼 적에 논 20마지기에 밭 하루갈이도 줬거든. 논 20마지기면 다섯 식구가 충분히 살 수 있어. 땅도 다 좋은 걸로 주니까. 셋째 넷째 작은 아버지는 그거 가지고 살림 늘여서 딴 동네 가서 살았는데 이 아버지만 여기서 떠나질 못한 거야.
난 우리 어머니가 베개 베고 누워있는 걸 못 봤어. 밤에는 밤새 졸면서 바느질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벌써 밭에 나가고 없으니까. 여름에는 빨래한 옷 풀 해서 다리느라고 밭에서 일찍 들어와서 큰집 가서 마당에 멍석 펴고 숯불 펴 놓고. 멍석 펴 놓으면 여름에 에어컨 없으니까 식구들이 다 거기 앉지. 아이들은 누워서 재밌는 얘기하고 야단도 맞다가 모기 쫓으며 자고. 어머니는 다림질 끝나면 사람들 들어가길 기다렸다 멍석 돌돌 말아서 세워놓고 그때서야 집에 들어오는데, 집에 들어와서도 바느질하느라고 자질 않아. 아버지는 큰집에서 술 훔쳐 먹고 맨날 취해서 자고.
어머니가 얼마나 인정이 많은 사람이냐 하면, 그때는 거지가 가족 거지야.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온 식구가 같이 다니면서 방앗간에서 멍석 펴고 자는데, 큰집에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거지가 여러 팀 와. 그럼 어머니가 큰집에서 해져서 안 신고 버리는 버선을 밤새 기워 놨다가 거지들 주는 거야. 조카들 방학 때 오면 준다고 개 키우고, 그때는 잡아줄 게 개나 닭 밖에 더 있냐. 또 밭에 나갔다 올 적에는, 그전에는 방울토마토를 일년감이라 그랬어, 일년감을 치마폭에 한 가득 따 와서 물에 담가 놨다가, 그걸 아까워서 나도 못 주고, 당숙모가 아프다 누가 아프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저녁에 병문안 가는 거야. 병문안 안 가는 날이 거의 없어.
나 열한 살 때였는데, 그 해에 해방되면서 38선이 막혔어. 우리가 38 이남이라 사리원 사는 사돈들이 우리 동네로 내려왔는데 그 사돈네가 곰보 되는 마마에 걸렸어. 옮을까 봐 아무도 안 가보는데, 어머니가 거기 병문안 갔다 마마에 걸린 거야. 그때 아버지가 집에 없었어. 내가 매일 아침 어머니 머리맡에 정안수를 떠놨는데 마마가 찬물을 먹으면 안 되는 병이라 학교도 안 가고 어머니가 그 물을 못 먹게 지키고 있었어. 병 옮을까 봐 아무도 안 오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 큰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둘이 왔는데, 어머니가 그 사람들하고 웃으면서 얘기하길래 나는 다 나은 줄 알고 좋아했어. 할머니가 나 혼자 재울 수 없으니까 저녁에만 와서 자고 갔는데, 그날 할머니한테 어머니가 다 나은 것 같다고 말하고 잤어. 나는 할머니가 있으면 물 못 먹게 할머니가 말리니까 마음 놓고 잤거든. 근데 자정쯤에 할머니가 나를 깨워서 ‘어미 죽었다’ 그래. 내가 할머니 옆에 자고 어머니는 따로 잤는데, 어머니가 자다가 할머니한테 옆에서 자고 싶다 그래서 옆에서 자게 했는데 얼마 안 있다 죽었다는 거야. 아버지가 없으니까 정식으로 못 묻고 가묘를 만들었어. 나중에 아버지가 와서 산소를 만드는데 어머니는 미리 갔기 때문에 조상묘에는 못 모신다고 해서 뒷산에 왜가리가 많고 바다가 확 보이는 데 묻었어. 그날 꿈에 어머니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와서 연필 한 다스를 주면서 공부 잘 하라고 해서 내가 따라간다고 하니까 안 된다면서 갔는데, 그러고 나서 어머니를 꿈에 다시 못 봤어.
어머니가 죽고 난 다음에 보니까 맨날 졸면서 바느질하더니 아버지랑 내 옷을 일년은 안 꿰매도 되게 여러 벌 만들어 놓고, 나 시집갈 때 준다고 옷감을 차곡차곡 모아 놨더라고. 누가 준 비로도도 치마해서 안 입고 넣어 두고. 어머니 죽고 밥 할 사람이 없으니까 아버지랑 나랑 큰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었어. 도둑놈이 옷감을 싹 가져갔는데, 그걸 산으로 가져가서 어머니 산소 앞에서 정리를 했더라니까. 쓸 만한 건 가져가고 아닌 건 내버리고.
아버지가 바로 새 어머니를 얻었는데, 그 엄마는 또 어떤 사람이냐면 소문난 알 부잣집 딸이야. 그 집 할머니가 꿈에 선몽해서 조상이 묻어 놓은 금은보화를 찾아서 그걸로 논밭을 크게 장만했대. 그래서 그 어머니가 일 한 번 안 해보고 귀하게 크다가 스물이 됐는데, 그때는 스무 살까지 시집 안가면 되게 늦은 거야. 부잣집 오째 아들에, 딸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우리 집으로 시집을 보냈잖아. 근데 시집와 보니까 일이 너무 많고 일을 할 줄은 모르니까 그 엄마가 저녁마다 우는 거야.
그때는 밥을 큰 솥에 하니까 나무가 많이 들잖아. 그 엄마가 불을 요령 없이 때니까 나무가 더 많이 들지. 나무가 떨어지니까 어떡해, 큰집 나무 낭가리에서 빼다가 땔 수밖에. 그런데 큰어머니가 보통분이 아니거든. 큰집에 가면 큰어머니가 ‘오째네는 벌써 나무가 떨어져서 나무 낭가리에서 나무를 쏙쏙 빼다 때는구먼.’ 이런다고. 내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침에 그 엄마보다 일찍 일어나 불을 때는 거야. 나무 많이 안 쓰려고. 고추밭도 고추를 제때 못 따니까 고추가 빨갛지. 그럼 큰어머니가 또 그러지. 오째네는 고추밭이 빨갛구먼. 내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학교 갔다 와서 고추 따러 가려고 하면 애들이 와서 ‘노올자’ 그러잖아. 내가 고추 따러 간다고 하면 애들이 나랑 같이 놀려고 바구니 하나씩 들고 밭에 들어가서 고추를 다 밟아 가면서 따. 그래도 그 엄마는 밭에 빨간 거 없는 것만 고마워서. 땅콩도 많이 심었어. 서리는 오는데 땅콩 안 캐고 있으면 큰어머니가 또 오째네는 땅콩을 안 캐서 이런 소리 하지.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땅콩 캐러 가면 애들이 또 바구니 하나씩 들고 따라오는데 애들이 땅콩을 쏙쏙 빼기만 하지 땅에 떨어진 걸 줍질 않잖아. 애들이 밭을 엉망으로 해 놔도 그 엄마는 땅콩을 캤다는 것만 고마워서.
큰아버지가 바닷가에 분교를 만들었다고 했잖아. 6학년까지 한 학년에 한 반씩인데 교실이 네 개밖에 없으니까 저 학년은 두 학년이 합쳐서 수업을 했어. 선생은 셋이 번갈아 가면서 하고. 나는 8살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아나운서 하는 이상벽 있지, 내가 걔네 엄마랑 같이 학교 다녔는데, 걔네 엄마는 16살에 나랑 같이 1학년이야. 우리 학년은 13명이었는데, 내가 12등이야. 할아버지 동생의 둘째 아들의 딸 아이가 나하고 동갑이거든. 걔가 꼴등이고 내가 꼴등에서 두번째인데, 걔는 자기 엄마가 아파서 맨날 결석하니까 공부를 못하지만 난 결석 안 하는데도 공부를 안 하고 못 했어.
학교에서 소풍가면 언제 소풍 간다고 미리 알려 주잖아. 다른 애들은 자기 엄마가 소풍날 입고 갈 옷을 깨끗하게 빨아 놨다고 자랑인데, 그 엄마는 옷 해줄 생각을 않는 거야. 사실 하루면 하니까 미리 해가지고 나 기분 좋게 해줄 일이 없거든. 시간도 없었겠지. 근데 내가 성질이 급하니까 그 엄마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질 못하고 내가 옷을 빠는 거야. 옷을 빨면 분홍 물감을 다시 들여야 되는데, 물감을 잘 풀지 않고 대충 휘저어서 하니까 색이 고르게 들질 않지. 물감 똥이 있는 데는 진하고 아닌 데는 흐리고. 또 풀 해가지고 방치로 빙칫돌 가운데를 두드려야 되는데 가장자리를 두드리니까 옷이 다 찢어질 거 아니야. 임시방편으로 찢어진 데를 풀로 붙여서 인두로 싹 데렸지. 근데 바느질해서 옷을 뒤집으면 속이 자꾸 겉으로 나오는 거야. 바늘귀 끼느라고 문구멍을 죄 뚫어가면서 몇 번을 해도 몇 번 다 그렇게 되니 얼마나 약이 오르겠니. 내가 혼자서 그 야단을 하느라고 종일 안 보이니까 할머니가 와 봤을 거 아냐. 내가 할머니 소리만 나면 왁 울지. 할머니가 저 년은 왜 또 악지가리를 부리냐면서 내가 한 걸 보더니 어떻게 하라고 알려줬잖아. 그때부터 그까짓 저고리 그 엄마가 해주는 거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다 해버리는 거야.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야 되는데 옹진군내에 중학교가 딱 한 군데야. 옹진 여자 중학교. 옹진에 할아버지 동생의 막내 아들이 살고 있어서 시험 보러 가서 그 집에 물어 물어 찾아가니까 반색을 하시더라고. 시험 보고 나서 발표가 보름 뒤에 나는데, 발표 보러 왔다 갔다 할 수가 있어. 보름을 그 집에 죽치고 있었지. 공부 못했는데 시험은 됐데. 기분 좋아서 오니까 넷째 작은아버지네 상원이는 강령 농업학교 시험 봤는데 떨어진 거야. 걔는 공부를 잘 했어. 반에서 4등쯤 했거든. 다 내가 떨어질 줄 알았을 텐데 내가 안 떨어지고 걔가 떨어졌더라고.
근데 그 엄마는 중학교 갈 때가 돼도 옷을 어떻게 한다 그런 것도 없어. 교복이 세라복이었거든. 윗도리는 사고 치마는 내가 만들었는데 속치마가 없는 거야. 할머니 준 흰 천을 잘라서 밤새도록 속치마를 만들어서 아침에 입어보니까 속치마가 치마보다 길어. 그래서 어깨 끈을 잡아당겨서 묶고 학교에 갔는데, 차비도 아버지가 안 주고 큰아버지가 줬어. 기숙사에 있으면서 가끔 주말에 집에 오는데, 버스가 잘 안 다니니까 어떨 땐 80리를 걸어갔어. 3월에 입학해서 6월에 6.25가 났으니까 학교를 얼마 못 다녔지. 그래도 그 사이에 영어 시험을 세번인가 봤는데 내가 다 100점 맞았어.
피란
옹진에 유명한 비행장이 있는데, 6.25 때 지주한테 푸대접 받던 가난한 사람들, 빨갱이들이지,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기들 일 시키던 주인들을 잡아다 그 비행장 굴에 집어넣었어. 그때 잡혀간 사람이 2천명인데 강석인네 할아버지도 거기 잡혀 가서 죽어서 나왔어. 강석인은 큰집 셋째언니 남편이니까 나한테 형분데, 대학교수 하다가 자살해서 너는 못 봤을 거야. 그이네 할아버지도 면장이고 우리 할아버지도 면장인데 우리 주변에선 빨갱이들이 지주 나오라고 소리치고 때리고 잡아가고 그런 거 없었어. 할아버지는 피란 안 나왔는데, 나중에 얘기 들어보면 인민군도 할아버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는 거야. 동네에서 고발하고 이래야 되는데, 다들 떠받들기만 하니까.
우리 시골에선 인민군 구경도 못 했어. 인민군이 그런 시골까지는 안 오니까. 근데 옹진이 전쟁터가 되면서 인민군이 옆동네까지 막 밀려오니까 우리가 무도로 피란을 갔어. 무도는 우리 동네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섬인데, 그 섬사람들이 큰집에서 쌀하고 나무 같은 걸 사갔던 인연으로 우리한테 배 두 척을 보내줬어. 우리 동네가 바닷가라 전쟁 나면서 각처에 있는 사돈들이 우리 동네로 홈빡 옮겨 앉았거든. 할아버지가 사돈이 얼마나 많냐, 육촌네 사돈 무슨 사돈. 외지에서 온 그 친척들이 먼저 한 배 가득 타고 떠났는데, 그 배가 바위에 부딪쳐 박살이 나서 수십명이 몰살당하고 오촌 하나만 살아왔어. 다음 날 아침 갯바닥에 송장이 하얗게 떠내려온 걸 어른들이 끌어다 산에 묻어주고, 우리는 그날 밤 배를 타고 나왔어.
무도에서 대소가의 그 많은 인원이 돈 내고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하숙을 했어. 그러다 남자들 방에 장질부사, 염병이 돌아서 우리 아버지가 그 병에 걸린 거야. 내가 그 방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막 기절해서 들어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데, 염병은 땀을 많이 흘리는 병이라 어찌 꾀죄죄한 지 귀신은 저리 가라야. 강석인 하나 빼고 그 방에 있는 12명이 다 병에 걸렸는데, 이북 놈들이 함포사격을 하면 그 사람들이 얼굴도 안 닦고 손도 안 닦은 몰골로 살겠다고 다 밖으로 뛰어나와서 바위에 숨느라 야단을 하고.
강석인의 아버지도 병에 걸리고 우리 아버지도 병에 걸려서 강석인이랑 나랑 그 방에서 식모 노릇을 했어. 물 달라면 물 주고 죽 달라면 죽 쒀주고. 무도는 물이 귀해. 우물이 하나 밖에 없는데, 피난민이 원주민의 열 배가 왔으니 물이 모자라지. 두레박으로 물을 푸는데, 한 두레박을 퍼야 물이 작은 패트병 하나가 안 돼. 우물에 물이 고이면 먼저 푸려고 잠 안 자고 기다리고 있으면 동네 청년들이 너네 때문에 물 못 먹는다고 강석인을 밀치고 때리고. 그 양반도 피란 나올 때 입고 나온 명주 바지저고리를 석 달을 안 갈아입으니까 거지 중에 상 거지지. 오죽하면 마누라가 창피하다고 자기 남편을 한번도 안 만났으니까. 비가 오면 강석인이랑 나랑 다니면서 바위에 고인 물을 조개 껍질로 떠서 주전자에 모으는 거야. 한 주전자가 되면 그걸로 밥물 붓고 쌀은 짠물로 씻고.
무도는 물이 없고, 자꾸 포가 떨어지고, 며칠만 있으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못 돌아가니까, 거기서 석 달 만에 연평으로 갔어. 강석인이 연평 가기 직전에 학도호국단에 불려갔다 왔거든. 그 양반이 군인 모자에 소위 마크를 딱 달고 나타나니까 때리고 밀치고 하던 녀석들이 깜짝 놀라더라고.
연평에선 큰집하고 따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쌀은 있는데 나무가 없어서 밥을 못 하는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가 나무하는 건 상상도 못해. 여자가 하는 일은 밭 매는 거 아니면 집에 있는 거지 나무하고 논에 발 벗고 들어가는 건 안 하거든. 내가 나무하는 게 창피해가지고 해가 어슬어슬하게 지길 기다렸다가 산이 가깝지도 않아, 논두렁 밭두렁 지나 산에 가서 나무를 까치집 같이 해서 이고 오면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때서 밥을 하는 거야. 나 혼자면 큰집 가서 먹으면 되는데, 엄마 아버지 때문에 못 그러고 맨날 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나무하고. 연평도에 두세 달 있었는데 다른 건 생각 안 나고 몰래 나무하러 간 생각만 나. 나무하러 갔단 얘기는 언니들한테도 한번도 안 했어.
연평에서도 며칠만 있으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못 돌아가고 가진 건 바닥나고 하니까 거기서 다시 인천으로 갔어. 인천 가서도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그러니까 온 집안 식구가 몇 년을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갈 날만 기다렸어. 근데 전쟁 끝나고 우리 고향은 미수복지역이라 못 돌아가게 됐잖아.
우리 땅이 원래 38 이남이라 정전되고 나서 정부에서 그 땅을 전부 지가증권으로 사줬어. 근데 큰오빠가 그 돈을 다 자기가 받아서 썼어. 작은 아버지들 거까지 다. 난 돈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봤어. 큰집에 가면 돈을 가마니에 넣어서 대여섯 가마씩 쌓아 놨어. 그때는 은행이 시원치 않으니까 집에 놔둔 거지. 큰오빠가 그 돈으로 서울에서 수원 다니는 급행버스를 사고, 흥안방직회사라는 데 주식을 샀어. 근데 버스를 운영을 잘 해야지 그게 그냥 되냐. 돈만 날렸지. 주식도 돈만 날리고. 우리는 고무신 한 짝 못 사보고 그 돈을 다 날렸어. 그래도 큰집에서 고향 사람들한테 잘 했어. 큰집에서 배다리에 집 두 채를 샀는데, 거길 옹진 여관이라 그랬어. 인천에 오면 다 거기 와서 자고 가고 또 거기 오면 고향 사람 누가 어디 있는 걸 다 아니까.
우리가 다 거기서 학교에 다니다 나왔지만, 여기와서 학교에 계속 다닌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무슨 직업을 가질 수가 있냐. 나는 우리 식구들이 어디 가서 날품팔이하고 밭 매서 얼마 받았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어. 아무 것도 안 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큰집에서 그 많은 돈 다 녹이고 남동으로 내려가 무허가 판잣집 짓고 살면서 큰아버지가 환갑이 훨씬 넘어서 부평 미군부대에 들어갔어. 형이 일을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혁명이 난 거야. 우리 아버지가 쓰레기차 위에 타고 다니더라고. 큰아버지는 아파서 미군부대에 오래 못 다녔어. 노환이지. 한 열흘 아프고 돌아가셨는데, 가난하니까 산소도 제대로 못 썼어.
큰오빠는 십 년 넘게 고향사람들 찾아다니며 밥값이랑 술값 받아쓰고 그랬는데, 할머니가 결혼할 때 데리고 온 하인의 둘째 아들이 피란 나와서 충남 살았거든, 거기까지 가서 손 벌리고 며칠 자고 그랬다고. 너네 아버지가 술 먹기 좋아하니까 너네 아버지한테 자주 왔는데, 한번은 오빠가 술집에서 팔을 살짝 뎄는데 아기처럼 엉엉 울더래, 아기처럼 엉엉. 그러다 소식이 끊겼는데, 나중에 임자 없는 시신으로 화장을 한다면서 내일 화장하는데 오늘 연락이 왔어. 술 취해 버스에 치어 객사한 거지. 상설이라고 그 동생이 찾아다가 장사는 제대로 지냈어.
미싱자수학원
큰오빠가 흥안방직회사 주를 샀다고 해도 방직회사가 뭔지도 몰랐는데, 내가 연줄연줄해서 거길 들어가게 됐어. 내가 거길 다니면서 옷도 거지 같이 입고 그래가면서 돈을 모아서 엄마 아버지한테 가게를 만들어줬어. 구멍가게지. 엄마 아버지가 세 들어 살던 집 툇마루에 과자 같은 걸 채워준 건데, 그 엄마가 누가 오면 사탕이나 과자를 한 줌씩 쥐어 주고 이래서 남는 것도 없지만 식구가 없으니까 먹고는 사는 거지.
나는 공장 다니면서 뭐든 배워야 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녁에 한문학원도 다니고 타자학원도 다녔는데, 가기만 하지 복 습할 시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공장을 그만 두고 편물을 배우려고, 용산에 큰 편물 학원이 있었거든, 수업료를 억지로 만들어 가지고 가는데 미싱자수라고 쓴 작은 간판이 보이더라고. 도대체 미싱자수가 뭔가 하고 거길 들어가 봤어. 나무계단을 올라가니까 2층에 대여섯평쯤 되는 데 미싱이 대여섯 대쯤 있고, 횃댓보, 그전엔 장이 없으니까 횃댓보를 많이 썼거든, 거기에 솔하고 학하고 목단을 수 놔서 걸어 놨는데, 미싱자수가 화려하잖냐, 또 손으로 놓은 거랑 다르니까 신기하지. 그래 내가 편물학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거기 등록해서 그날부터 미싱자수를 배우기 시작했어. 근데 나무계단에서 통통통통 하고 누가 올라오는 소리만 나면 원장이 횃댓보 뒤로 쏙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야. 원장이 일본에서 미싱을 배워온 사람이고 아버지가 초대 국회의원 출마했던 사람이야. 그럼 괜찮은 집안일 거 아니야. 옷도 예쁘게 입고. 근데 아버지가 국회의원 나갔다가 떨어지면서 빚을 많이 진 거야. 원장이 통통통통 소리만 나면 횃댓보 뒤에 들어가서 빚쟁이가 갈 때까지 안 나오니까 학생들이 진도를 못 나갈 거 아니야. 그래 내가 거기 다닌 지 사나흘쯤 돼서부터 나보다 늦게 들어온 학생들을 가르쳤어.
그때 내가 잘 데가 마땅치 않았는데, 원장이 학원에서 자다가 집을 얻어 나가면서 내가 거기 들어가 자게 됐어. 내가 거기서 자면서 보리밥만 얻어먹고 일을 했어. 학생들 가르치는 것부터 거래처 관리하는 것까지 다. 학생이 졸업하면 학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되거든. 미싱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미싱회사에서 미싱을 월부로 살 수 있게 보증 서 주고, 그 미싱으로 물건을 만들어 오면 팔아주고. 근데 졸업생들이 미싱 월부금을 빚쟁이 원장한테 안 주고 꼭 나한테 갖다 줬어. 내가 미싱회사에 월부금 전달하고 수예점에 물건 납품하는 걸 착실하게 하니까 거래처하고 신뢰가 생겼을 거 아니야. 내가 3년을 일하고 나서 원장한테 독립하고 싶다고 기술 있는 사람 셋하고 거래처하고 날 달라고 했어. 3년을 십 원 한 푼 안 주고 보리밥만 먹이면서 일을 시켰으니까 할 말이 없지. 원장이 ‘상춘 씨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러더라고.
돈이 없으니까 한옥집 마루만 세를 얻고 드레스 회사에서 기계 두 대를 월부로 얻었어. 거기에 기술 있는 아이가 셋이니까 기계가 다섯 대인 거잖아. 수예점 아저씨가 고마운 게 일한 걸 가져가면 숫자만 세지 물건이 좋고 나쁜 걸 따지지 않았어. 옷 커버 몇개, 방석 몇 개, 이불 몇 개 하고 세서 돈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줬어. 돈을 받아야 광목을 사잖아. 광목이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 내가 그걸 이고 버스를 타서 또 버스값을 깎는 거야. 올 적 갈 적 다믄 십원이라도 깎아. 그렇게 광목을 가져와서 밤새 재단해서 그 위에 그림을 복사해 쌓아 놓으면, 애들이 가져가서 거기에 수를 놔서 가져오고, 그럼 그걸 박아서 조루로 물을 확 뿌려 놨다가 다려서 수예점 갖다 주고. 내가 그때 거의 자질 않았어.
일하는 사람이 늘고 자리가 잡히니까 드레스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그때 학원 인가를 받으려면 건물이 20평 이상이고 기계가 14대 이상이래야 되는데, 드레스 회사에서 자기네가 건물하고 기계를 해줄 테니까 나더러 학원을 운영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강석인 형부한테 전화했어. 피란 후에는 서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내가 사정 얘길 하고 드레스회사 사람들을 좀 만나봐 달라고 했더니 당장에 알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형부가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나오더니 나더러 회사 밑에서 일하지 말고 학원을 혼자 해보라고 하는 거야. 형부도 돈암동 산 꼭대기 살 땐데, 자기 아버지가 시발택시를 한 대 가지고 있는데 그걸 팔아서 건물을 빌려 보자면서. 내가 그래서 학원을 시작하게 된 거야. 영등포에 20평짜리 건물을 얻고 드레스 회사에서 미싱을 17대를 빌렸어. 학원 인가는 형부 아버지 이름으로 냈어. 내가 그때 스물 셋인데 스물다섯이 넘어야 인가를 내 줬거든. 나 가르친 원장은 인가 없이 했는데 나는 정식으로 인가 있는 학원을 하게 된 거야.
형부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가 형부한테 한 달도 안 거르고 이자를 줬어. 3년 만에 그 돈을 다 갚으면서 그때는 시계가 귀한 물건이었는지 선물로 벽시계를 사가지고 갔어. 내가 운이 좋은 게 사회교육원에서 내 담당이 큰오빠의 처제의 신랑이야. 학원 인가가 내 이름이 아니었잖아. 근데 그 사돈이 나 스물여섯 살 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인가를 내 이름으로 바꿔놨더라고. 서울미싱자수학원 원장 김상춘.
서울미싱자수학원 원장 김상춘
김상춘
1935년생
1958-1994 서울미싱자수학원 운영
큰집
황해도 옹진군 봉구면 옥은리 구주깨. 굴이 많은 동네라서 구주깨야. 거기는 고용된 사람들 빼고는 다 상산 김씨만 살아. 할아버지 형제들 하고 사촌, 오촌들. 그 일대가 다 우리 땅인데 그 근거가 치마산소에 있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에 바닷가에 치마가 떠내려왔어. 배가 파산해 사람은 죽고 치마만 떠내려온 건데, 그 주머니 안에 벼슬 문서가 들어 있었어. 우리 조상 할아버지들이 글을 잘 해서 나라에서 몇 리나 되는 땅을 받은 거야. 앞산에 그 치마를 모신 치마산소가 있는데 어른들이 일년에 몇 번씩 거기서 시제를 지내.
우리 동네엔 소나무가 장관이야. 노할아버지가 바닷바람을 막으려고 심은 건데, 소나무가 수백 년 된 아름드리라 거기 들어가면 동굴에 들어간 것처럼 하늘이 안 보이고,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은 나뭇가지들이 웅하고 노래 불러. 또 여름이면 신작로에 아카시아가 하얗게 매달리고 바닷가에 빨간 명개꽃이 끝도 없이 피는데 얼마나 예쁜지 몰라. 썰물에 물이 빠지면 뻘 움푹 패인 데 물이 고이거든. 그럼 아이들이 거기서 발가벗고 수영하고. 밀물에는 땜마, 우리는 보트를 땜마라고 그랬는데 바닷가에 그걸 여러 척 세워 놨다가 물이 들어오면 타고 노는 거야. 아이들은 노를 못 저니까 큰집의 일꾼이 선장이 돼서 태워주고.
우리 큰집이 어떤 집이냐면 아흔아홉 칸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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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은 개나리 울타리가 두껍게 쳐 있어서 그냥은 못 들어가고 꼭 대문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대문 네 개를 거쳐야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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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집이 얼마나 크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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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쓰는 사랑채만 해도 방이 다섯 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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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에 식구들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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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에 일꾼들 방 해서 방이 수도 없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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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도 벼광 따로 있고 쌀광 따로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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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광은 크기가 100평쯤 되는데 겨를 안 벗긴 쌀이 섬으로 가득해. 부엌 살림 넣어 놓는 광도 따로 있어서 독독이 팥, 녹두, 밀가루, 김치,
가계도
구주깨 지도
큰집
말린 생선이 들어있고.
큰집은 손님이 없는 날이 없어. 그때 무슨 식당이 있어서 식당에서 밥을 먹냐. 군이나 면에서 손님이 오면 백프로 큰집에서 대접하는 거야. 손님이 많아서 밥 하는 사람 한둘로 안 되니까 우리 어머니하고 작은어머니들이 날마다 큰집에 가서 일했는데, 어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나머지 식구들도 일년 365일에서 300일은 큰집에서 밥을 먹어. 거기는 얼마나 먹는 게 풍족한지 나는 뭐가 먹고 싶은데 못 먹은 적은 없어. 맨날 조기 잡아먹고 갈치 잡아먹지, 물 빠졌을 때 호미 들고 나가면 바지락이 금방 한 바구니지, 누가 왔다 하면 닭 잡지, 만두 해먹지, 밤 대추 복숭아도 지천이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큰집은 누구든 잘 대접하니까 빨갱이 세상이 됐을 때도 할아버지한테 함부로 반말 짓거리 하는 사람이 없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보통 분이 아니었어. 동네에서 남자들이 화투를 하잖아. 여자들이 자기 남편이 어디서 화투 한다고 일러바치면 할아버지가 뒤에 지팡이를 끌고서 거기 가는 거야.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다들 삽시간에 도망쳐서 화투를 며칠은 못 하지.
할아버지는 열 둘에 장가가서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뒀어. 쉰까지 봉구면 면장을 했고 군수까지 할 수 있었는데 쉰 넘어서 귀가 먹었어. 할아버지가 지들끼리 말한다고 소리 질러서 할아버지 있는 데서는 말도 잘 못했어. 할아버지한테 말할 땐 한지를 돌돌 말아 나팔을 만들어 귀에 대고 말하고.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우니까 밭에 나가 살았어. 일할 때 걸리적거리니까 저고리하고 바지 팔 다리를 절반씩 잘라 입고. 할머니는 그런 차림새가 남 부끄럽다고 할아버지 일하는 밭엘 한번도 안 나갔어. 우리 할머니는 여름에 모시 옷을 까칠하게 입고 비녀를 딱 찌르고.
할머니 친정은 해주야. 해주는 황해도에서 으뜸가는 도시잖아. 할머니 친정이 시내에서 60리 떨어진 덴데 집이 얼마나 크고 정원을 잘해 놨는지 그 일대 학생들이 전부 그 집으로 소풍을 갔대. 할머니가 열 넷에 우리 집에 시집와서 열 여섯에 첫아이를 낳고 스물 여섯에 며느리를 봤어. 할머니가 체구가 자그마한 양반인데도 보통 강단 있는 게 아닌 게, 어느 날 벼광에 들어갔더니 큰 구렁이가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었대. 여느 사람 같으면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나올 거 아니야. 그런데 할머니가 섬 있잖아, 벼 두 가마가 들어가게 아가리가 큰 섬을 구렁이 앞에 놓고 귀한 몸인데 함부로 사람 눈에 띄지 말고 여기로 들어가라고 했대. 그랬더니 구렁이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는 거야. 할머니가 섬 입구를 끈으로 설피게 매 놓고 열흘 있다 들어가 봤더니 구렁이가 없어졌더래. 집 신이지.
할아버지가 여섯 아들을 훈장을 모셔다 한문공부를 시켰는데, 맏이인 큰아버지가 제일 똑똑했대. 여덟 살에 천자문을 다 외웠다니까 얼마나 똑똑했겠니. 큰아버지가 집안 살림을 맡아 했는데, 소가 맷돌을 돌려서 곡식을 찧는 연자방아 있잖아, 그걸 리마다 하나씩 만들어서 사람들이 필요할 때 곡식을 찧을 수 있게 하고,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머니까 마을에 분교를 만들어서 동네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게 했어. 큰아버지가 그 학교 교장이야. 명예교장이지. 큰아버지가 어딜 가면 호말 있잖아, 잘 생기고 기름이 반질반질한 호말을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어. 혼자 다니는 게 아니라 일꾼이 옆에서 끈을 잡고 같이 따라다니고.
큰아버지는 열한살에 장가를 갔어. 큰어머니가 키가 크고 인물이 빼어난 분인데 성격이 대찼어. 큰집에 모 심고 벼 베는 날은 동네 사람이 다 오니까 일꾼이 백 명씩 되는데, 큰어머니가 사람 키만큼 높은 사랑 툇마루에 서서 할 얘길 하고 그랬어. 동네 사람들이 큰아버지가 만든 연자방아를 쓰면서 일년에 한번씩 와서 일을 해줬는데, 거기는 뭐든지 일년에 한 번이야. 나무도 여기처럼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일년에 한 번 야산에 나무하는 날이 있어. 그날 나무를 해다 잘라서 말렸다가 묶어서 벼 낱가리 쌓듯 집채만 하게 쌓아 놓고 겨울 지나 여름까지 때는 거야.
큰아버지는 아들 셋에 딸 여섯을 뒀어. 장손인 큰오빠는 동경까지 가서 공부했는데, 공부는 안 하고 멋만 내고 다닌 거 같아. 그 오빠가 하루에 세수를 세번 네번 했어. 그 오빠는 우리 시골에 안 살고 해주 사는데 봄에 고기가 많이 잡힐 때가 되면 기생들을 한 트럭 싣고 와. 바닷가에서 생선 펄펄 뛰는 거를 먹고 노느라고. 그 오빠가 또 뭘 했느냐 하면, 선산 밑에다 수천 평 되는 연못을 팠어. 가운데 섬을 만들어서 나무 심고 물방아를 설치해 물을 대고 일본에서 물고기를 초롱으로 실어다 붓고. 그러니 그 돈을 뭐로 당하겠니. 그래도 돈 많이 써서 돈 없다 소리는 못 들어봤어.
부잣집 장손이라고 하면 온 동네에서 위해 바치는 거거든. 그 올케도 장손의 부인이라고 다들 떠받들고 시어머니도 그 며느리한테는 싫은 소리를 할 수 없는 분위기야. 여름에 조개 잡으러 가잖아, 다른 사람들은 뻘을 맨발로 걸어가는데 그 양반만 소달구지를 타고 가. 모시 옷을 까칠하게 입고 부채 하나 들고. 시골 부엌에 음식이 한 가득인데 파리가 없겠냐. 근데 그 올케 방에는 파리가 없었어. 파리도 어려워서 못 들어가는 거지.
우리집
우리 아버지가 아들 여섯 중에 살림을 제일 못 했어. 할아버지가 훈장을 모셔다 아들들을 가르쳤다고 했잖아. 딴 아들들은 다 선생이 갈 때까지 공부하는데, 아버지만 살짝 나와서 꼴망태기 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훈장 가면 내려오고 그랬대. 할아버지가 아들들 장가보낼 적에 큰집 옆에 아들들 집을 하나씩 지어줬는데 큰집 바로 옆에 우리 집을 지었어. 아버지를 감시하느라고. 할아버지가 아들들 장가보낼 적에 논 20마지기에 밭 하루갈이도 줬거든. 논 20마지기면 다섯 식구가 충분히 살 수 있어. 땅도 다 좋은 걸로 주니까. 셋째 넷째 작은 아버지는 그거 가지고 살림 늘여서 딴 동네 가서 살았는데 이 아버지만 여기서 떠나질 못한 거야.
난 우리 어머니가 베개 베고 누워있는 걸 못 봤어. 밤에는 밤새 졸면서 바느질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벌써 밭에 나가고 없으니까. 여름에는 빨래한 옷 풀 해서 다리느라고 밭에서 일찍 들어와서 큰집 가서 마당에 멍석 펴고 숯불 펴 놓고. 멍석 펴 놓으면 여름에 에어컨 없으니까 식구들이 다 거기 앉지. 아이들은 누워서 재밌는 얘기하고 야단도 맞다가 모기 쫓으며 자고. 어머니는 다림질 끝나면 사람들 들어가길 기다렸다 멍석 돌돌 말아서 세워놓고 그때서야 집에 들어오는데, 집에 들어와서도 바느질하느라고 자질 않아. 아버지는 큰집에서 술 훔쳐 먹고 맨날 취해서 자고.
어머니가 얼마나 인정이 많은 사람이냐 하면, 그때는 거지가 가족 거지야.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온 식구가 같이 다니면서 방앗간에서 멍석 펴고 자는데, 큰집에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거지가 여러 팀 와. 그럼 어머니가 큰집에서 해져서 안 신고 버리는 버선을 밤새 기워 놨다가 거지들 주는 거야. 조카들 방학 때 오면 준다고 개 키우고, 그때는 잡아줄 게 개나 닭 밖에 더 있냐. 또 밭에 나갔다 올 적에는, 그전에는 방울토마토를 일년감이라 그랬어, 일년감을 치마폭에 한 가득 따 와서 물에 담가 놨다가, 그걸 아까워서 나도 못 주고, 당숙모가 아프다 누가 아프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저녁에 병문안 가는 거야. 병문안 안 가는 날이 거의 없어.
나 열한 살 때였는데, 그 해에 해방되면서 38선이 막혔어. 우리가 38 이남이라 사리원 사는 사돈들이 우리 동네로 내려왔는데 그 사돈네가 곰보 되는 마마에 걸렸어. 옮을까 봐 아무도 안 가보는데, 어머니가 거기 병문안 갔다 마마에 걸린 거야. 그때 아버지가 집에 없었어. 내가 매일 아침 어머니 머리맡에 정안수를 떠놨는데 마마가 찬물을 먹으면 안 되는 병이라 학교도 안 가고 어머니가 그 물을 못 먹게 지키고 있었어. 병 옮을까 봐 아무도 안 오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 큰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둘이 왔는데, 어머니가 그 사람들하고 웃으면서 얘기하길래 나는 다 나은 줄 알고 좋아했어. 할머니가 나 혼자 재울 수 없으니까 저녁에만 와서 자고 갔는데, 그날 할머니한테 어머니가 다 나은 것 같다고 말하고 잤어. 나는 할머니가 있으면 물 못 먹게 할머니가 말리니까 마음 놓고 잤거든. 근데 자정쯤에 할머니가 나를 깨워서 ‘어미 죽었다’ 그래. 내가 할머니 옆에 자고 어머니는 따로 잤는데, 어머니가 자다가 할머니한테 옆에서 자고 싶다 그래서 옆에서 자게 했는데 얼마 안 있다 죽었다는 거야. 아버지가 없으니까 정식으로 못 묻고 가묘를 만들었어. 나중에 아버지가 와서 산소를 만드는데 어머니는 미리 갔기 때문에 조상묘에는 못 모신다고 해서 뒷산에 왜가리가 많고 바다가 확 보이는 데 묻었어. 그날 꿈에 어머니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와서 연필 한 다스를 주면서 공부 잘 하라고 해서 내가 따라간다고 하니까 안 된다면서 갔는데, 그러고 나서 어머니를 꿈에 다시 못 봤어.
어머니가 죽고 난 다음에 보니까 맨날 졸면서 바느질하더니 아버지랑 내 옷을 일년은 안 꿰매도 되게 여러 벌 만들어 놓고, 나 시집갈 때 준다고 옷감을 차곡차곡 모아 놨더라고. 누가 준 비로도도 치마해서 안 입고 넣어 두고. 어머니 죽고 밥 할 사람이 없으니까 아버지랑 나랑 큰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었어. 도둑놈이 옷감을 싹 가져갔는데, 그걸 산으로 가져가서 어머니 산소 앞에서 정리를 했더라니까. 쓸 만한 건 가져가고 아닌 건 내버리고.
아버지가 바로 새 어머니를 얻었는데, 그 엄마는 또 어떤 사람이냐면 소문난 알 부잣집 딸이야. 그 집 할머니가 꿈에 선몽해서 조상이 묻어 놓은 금은보화를 찾아서 그걸로 논밭을 크게 장만했대. 그래서 그 어머니가 일 한 번 안 해보고 귀하게 크다가 스물이 됐는데, 그때는 스무 살까지 시집 안가면 되게 늦은 거야. 부잣집 오째 아들에, 딸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까 괜찮겠다 싶어서 우리 집으로 시집을 보냈잖아. 근데 시집와 보니까 일이 너무 많고 일을 할 줄은 모르니까 그 엄마가 저녁마다 우는 거야.
그때는 밥을 큰 솥에 하니까 나무가 많이 들잖아. 그 엄마가 불을 요령 없이 때니까 나무가 더 많이 들지. 나무가 떨어지니까 어떡해, 큰집 나무 낭가리에서 빼다가 땔 수밖에. 그런데 큰어머니가 보통분이 아니거든. 큰집에 가면 큰어머니가 ‘오째네는 벌써 나무가 떨어져서 나무 낭가리에서 나무를 쏙쏙 빼다 때는구먼.’ 이런다고. 내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아침에 그 엄마보다 일찍 일어나 불을 때는 거야. 나무 많이 안 쓰려고. 고추밭도 고추를 제때 못 따니까 고추가 빨갛지. 그럼 큰어머니가 또 그러지. 오째네는 고추밭이 빨갛구먼. 내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학교 갔다 와서 고추 따러 가려고 하면 애들이 와서 ‘노올자’ 그러잖아. 내가 고추 따러 간다고 하면 애들이 나랑 같이 놀려고 바구니 하나씩 들고 밭에 들어가서 고추를 다 밟아 가면서 따. 그래도 그 엄마는 밭에 빨간 거 없는 것만 고마워서. 땅콩도 많이 심었어. 서리는 오는데 땅콩 안 캐고 있으면 큰어머니가 또 오째네는 땅콩을 안 캐서 이런 소리 하지. 내가 그 소리 듣기 싫어서 땅콩 캐러 가면 애들이 또 바구니 하나씩 들고 따라오는데 애들이 땅콩을 쏙쏙 빼기만 하지 땅에 떨어진 걸 줍질 않잖아. 애들이 밭을 엉망으로 해 놔도 그 엄마는 땅콩을 캤다는 것만 고마워서.
큰아버지가 바닷가에 분교를 만들었다고 했잖아. 6학년까지 한 학년에 한 반씩인데 교실이 네 개밖에 없으니까 저 학년은 두 학년이 합쳐서 수업을 했어. 선생은 셋이 번갈아 가면서 하고. 나는 8살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아나운서 하는 이상벽 있지, 내가 걔네 엄마랑 같이 학교 다녔는데, 걔네 엄마는 16살에 나랑 같이 1학년이야. 우리 학년은 13명이었는데, 내가 12등이야. 할아버지 동생의 둘째 아들의 딸 아이가 나하고 동갑이거든. 걔가 꼴등이고 내가 꼴등에서 두번째인데, 걔는 자기 엄마가 아파서 맨날 결석하니까 공부를 못하지만 난 결석 안 하는데도 공부를 안 하고 못 했어.
학교에서 소풍가면 언제 소풍 간다고 미리 알려 주잖아. 다른 애들은 자기 엄마가 소풍날 입고 갈 옷을 깨끗하게 빨아 놨다고 자랑인데, 그 엄마는 옷 해줄 생각을 않는 거야. 사실 하루면 하니까 미리 해가지고 나 기분 좋게 해줄 일이 없거든. 시간도 없었겠지. 근데 내가 성질이 급하니까 그 엄마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질 못하고 내가 옷을 빠는 거야. 옷을 빨면 분홍 물감을 다시 들여야 되는데, 물감을 잘 풀지 않고 대충 휘저어서 하니까 색이 고르게 들질 않지. 물감 똥이 있는 데는 진하고 아닌 데는 흐리고. 또 풀 해가지고 방치로 빙칫돌 가운데를 두드려야 되는데 가장자리를 두드리니까 옷이 다 찢어질 거 아니야. 임시방편으로 찢어진 데를 풀로 붙여서 인두로 싹 데렸지. 근데 바느질해서 옷을 뒤집으면 속이 자꾸 겉으로 나오는 거야. 바늘귀 끼느라고 문구멍을 죄 뚫어가면서 몇 번을 해도 몇 번 다 그렇게 되니 얼마나 약이 오르겠니. 내가 혼자서 그 야단을 하느라고 종일 안 보이니까 할머니가 와 봤을 거 아냐. 내가 할머니 소리만 나면 왁 울지. 할머니가 저 년은 왜 또 악지가리를 부리냐면서 내가 한 걸 보더니 어떻게 하라고 알려줬잖아. 그때부터 그까짓 저고리 그 엄마가 해주는 거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다 해버리는 거야.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야 되는데 옹진군내에 중학교가 딱 한 군데야. 옹진 여자 중학교. 옹진에 할아버지 동생의 막내 아들이 살고 있어서 시험 보러 가서 그 집에 물어 물어 찾아가니까 반색을 하시더라고. 시험 보고 나서 발표가 보름 뒤에 나는데, 발표 보러 왔다 갔다 할 수가 있어. 보름을 그 집에 죽치고 있었지. 공부 못했는데 시험은 됐데. 기분 좋아서 오니까 넷째 작은아버지네 상원이는 강령 농업학교 시험 봤는데 떨어진 거야. 걔는 공부를 잘 했어. 반에서 4등쯤 했거든. 다 내가 떨어질 줄 알았을 텐데 내가 안 떨어지고 걔가 떨어졌더라고.
근데 그 엄마는 중학교 갈 때가 돼도 옷을 어떻게 한다 그런 것도 없어. 교복이 세라복이었거든. 윗도리는 사고 치마는 내가 만들었는데 속치마가 없는 거야. 할머니 준 흰 천을 잘라서 밤새도록 속치마를 만들어서 아침에 입어보니까 속치마가 치마보다 길어. 그래서 어깨 끈을 잡아당겨서 묶고 학교에 갔는데, 차비도 아버지가 안 주고 큰아버지가 줬어. 기숙사에 있으면서 가끔 주말에 집에 오는데, 버스가 잘 안 다니니까 어떨 땐 80리를 걸어갔어. 3월에 입학해서 6월에 6.25가 났으니까 학교를 얼마 못 다녔지. 그래도 그 사이에 영어 시험을 세번인가 봤는데 내가 다 100점 맞았어.
피란
옹진에 유명한 비행장이 있는데, 6.25 때 지주한테 푸대접 받던 가난한 사람들, 빨갱이들이지,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기들 일 시키던 주인들을 잡아다 그 비행장 굴에 집어넣었어. 그때 잡혀간 사람이 2천명인데 강석인네 할아버지도 거기 잡혀 가서 죽어서 나왔어. 강석인은 큰집 셋째언니 남편이니까 나한테 형분데, 대학교수 하다가 자살해서 너는 못 봤을 거야. 그이네 할아버지도 면장이고 우리 할아버지도 면장인데 우리 주변에선 빨갱이들이 지주 나오라고 소리치고 때리고 잡아가고 그런 거 없었어. 할아버지는 피란 안 나왔는데, 나중에 얘기 들어보면 인민군도 할아버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는 거야. 동네에서 고발하고 이래야 되는데, 다들 떠받들기만 하니까.
우리 시골에선 인민군 구경도 못 했어. 인민군이 그런 시골까지는 안 오니까. 근데 옹진이 전쟁터가 되면서 인민군이 옆동네까지 막 밀려오니까 우리가 무도로 피란을 갔어. 무도는 우리 동네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섬인데, 그 섬사람들이 큰집에서 쌀하고 나무 같은 걸 사갔던 인연으로 우리한테 배 두 척을 보내줬어. 우리 동네가 바닷가라 전쟁 나면서 각처에 있는 사돈들이 우리 동네로 홈빡 옮겨 앉았거든. 할아버지가 사돈이 얼마나 많냐, 육촌네 사돈 무슨 사돈. 외지에서 온 그 친척들
이 먼저 한 배 가득 타고 떠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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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가 바위에 부딪쳐 박살이 나서 수십명이 몰살당하고 오촌 하나만 살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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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갯바닥에 송장이 하얗게 떠내려온 걸 어른들이 끌어다 산에 묻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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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밤 배를 타고 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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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에서 대소가의 그 많은 인원이 돈 내고 해주는 밥을 먹으면서 하숙을 했어. 그러다 남자들 방에 장질부사, 염병이 돌아서 우리 아버지가 그 병에 걸린 거야. 내가 그 방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막 기절해서 들어오지 말라고 손을 내젓는데, 염병은 땀을 많이 흘리는 병이라 어찌 꾀죄죄한 지 귀신은 저리 가라야. 강석인 하나 빼고 그 방에 있는 12명이 다 병에 걸렸는데, 이북 놈
무도
들이 함포사격을 하면 그 사람들이 얼굴도 안 닦고 손도 안 닦은 몰골로 살겠다고 다 밖으로 뛰어나와서 바위에 숨느라 야단을 하고.
강석인의 아버지도 병에 걸리고 우리 아버지도 병에 걸려서 강석인이랑 나랑 그 방에서 식모 노릇을 했어. 물 달라면 물 주고 죽 달라면 죽 쒀주고. 무도는 물이 귀해. 우물이 하나 밖에 없는데, 피난민이 원주민의 열 배가 왔으니 물이 모자라지. 두레박으로 물을 푸는데, 한 두레박을 퍼야 물이 작은 패트병 하나가 안 돼. 우물에 물이 고이면 먼저 푸려고 잠 안 자고 기다리고 있으면 동네 청년들이 너네 때문에 물 못 먹는다고 강석인을 밀치고 때리고. 그 양반도 피란 나올 때 입고 나온 명주 바지저고리를 석 달을 안 갈아입으니까 거지 중에 상 거지지. 오죽하면 마누라가 창피하다고 자기 남편을 한번도 안 만났으니까. 비가 오면 강석인이랑 나랑 다니면서 바위에 고인 물을 조개 껍질로 떠서 주전자에 모으는 거야. 한 주전자가 되면 그걸로 밥물 붓고 쌀은 짠물로 씻고.
무도는 물이 없고, 자꾸 포가 떨어지고, 며칠만 있으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못 돌아가니까, 거기서 석 달 만에 연평으로 갔어. 강석인이 연평 가기 직전에 학도호국단에 불려갔다 왔거든. 그 양반이 군인 모자에 소위 마크를 딱 달고 나타나니까 때리고 밀치고 하던 녀석들이 깜짝 놀라더라고.
연평에선 큰집하고 따로 살았는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쌀은 있는데 나무가 없어서 밥을 못 하는 거야. 그때만 해도 여자가 나무하는 건 상상도 못해. 여자가 하는 일은 밭 매는 거 아니면 집에 있는 거지 나무하고 논에 발 벗고 들어가는 건 안 하거든. 내가 나무하는 게 창피해가지고 해가 어슬어슬하게 지길 기다렸다가 산이 가깝지도 않아, 논두렁 밭두렁 지나 산에 가서 나무를 까치집 같이 해서 이고 오면 우리 엄마 아버지가 그때서 밥을 하는 거야. 나 혼자면 큰집 가서 먹으면 되는데, 엄마 아버지 때문에 못 그러고 맨날 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나무하고. 연평도에 두세 달 있었는데 다른 건 생각 안 나고 몰래 나무하러 간 생각만 나. 나무하러 갔단 얘기는 언니들한테도 한번도 안 했어.
연평에서도 며칠만 있으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못 돌아가고 가진 건 바닥나고 하니까 거기서 다시 인천으로 갔어. 인천 가서도 전쟁이 금방 끝날 것처럼 그러니까 온 집안 식구가 몇 년을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갈 날만 기다렸어. 근데 전쟁 끝나고 우리 고향은 미수복지역이라 못 돌아가게 됐잖아.
우리 땅이 원래 38 이남이라 정전되고 나서 정부에서 그 땅을 전부 지가증권으로 사줬어. 근데 큰오빠가 그 돈을 다 자기가 받아서 썼어. 작은 아버지들 거까지 다. 난 돈이 그렇게 많은 건 처음 봤어. 큰집에 가면 돈을 가마니에 넣어서 대여섯 가마씩 쌓아 놨어. 그때는 은행이 시원치 않으니까 집에 놔둔 거지. 큰오빠가 그 돈으로 서울에서 수원 다니는 급행버스를 사고, 흥안방직회사라는 데 주식을 샀어. 근데 버스를 운영을 잘 해야지 그게 그냥 되냐. 돈만 날렸지. 주식도 돈만 날리고. 우리는 고무신 한 짝 못 사보고 그 돈을 다 날렸어. 그래도 큰집에서 고향 사람들한테 잘 했어. 큰집에서 배다리에 집 두 채를 샀는데, 거길 옹진 여관이라 그랬어. 인천에 오면 다 거기 와서 자고 가고 또 거기 오면 고향 사람 누가 어디 있는 걸 다 아니까.
우리가 다 거기서 학교에 다니다 나왔지만, 여기와서 학교에 계속 다닌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렇다고 무슨 직업을 가질 수가 있냐. 나는 우리 식구들이 어디 가서 날품팔이하고 밭 매서 얼마 받았다는 소리를 못 들어봤어.
아무 것도 안 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큰집에서 그 많은 돈 다 녹이고 남동으로 내려가 무허가 판잣집 짓고 살면서 큰아버지가 환갑이 훨씬 넘어서 부평 미군부대에 들어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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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일을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혁명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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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쓰레기차 위에 타고 다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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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는 아파서 미군부대에 오래 못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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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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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아프고 돌아가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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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니까 산소도 제대로 못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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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는 십 년 넘게 고향사람들 찾아다니며 밥값이랑 술값 받아쓰고 그랬는데, 할머니가 결혼할 때 데리고 온 하인의 둘째 아들이 피란 나와서 충남 살았거든, 거기까지 가서 손 벌리고 며칠 자고 그랬다고. 너네 아버지가 술 먹기 좋아하니까 너네 아버지한테 자주 왔는데, 한번은 오빠가 술집에서 팔을 살짝 뎄는데 아기처럼 엉엉 울더래, 아기처럼 엉엉. 그러다 소식이 끊겼는데, 나중에 임자 없는 시신으로 화장을 한다면서 내일 화장하는데 오늘 연락이 왔어. 술 취해 버스에 치어 객사한 거지. 상설이라고 그 동생이 찾아다가 장사는 제대로 지냈어.
미싱자수학원
큰오빠가 흥안방직회사 주를 샀다고 해도 방직회사가 뭔지도 몰랐는데, 내가 연줄연줄해서 거길 들어가게 됐어. 내가 거길 다니면서 옷도 거지 같이 입고 그래가면서 돈을 모아서 엄마 아버지한테 가게를 만들어줬어. 구멍가게지. 엄마 아버지가 세 들어 살던 집 툇마루에 과자 같은 걸 채워준 건데, 그 엄마가 누가 오면 사탕이나 과자를 한 줌씩 쥐어 주고 이래서 남는 것도 없지만 식구가 없으니까 먹고는 사는 거지.
나는 공장 다니면서 뭐든 배워야 그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녁에 한문학원도 다니고 타자학원도 다녔는데, 가기만 하지 복 습할 시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공장을 그만 두고
편물을 배우려고, 용산에 큰 편물 학원이 있었거든, 수업료를 억지로 만들어 가지고 가는데 미싱자수라고 쓴 작은 간판이 보이더라고. 도대체 미싱자수가 뭔가 하고 거길 들어가 봤어. 나무계단을 올라가니까 2층에 대여섯평쯤 되는 데 미싱이 대여섯 대쯤 있고, 횃댓보, 그전엔 장이 없으니까 횃댓보를 많이 썼거든, 거기에 솔하고 학하고 목단을 수 놔서 걸어 놨는데, 미싱자수가 화려하잖냐, 또 손으로 놓은 거랑 다르니까 신기하지. 그래 내가 편물학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거기 등록해서 그날부터 미싱자수를 배우기 시작했어. 근데 나무계단에서 통통통통 하고 누가 올라오는 소리만 나면 원장이 횃댓보 뒤로 쏙 들어가서 안 나오는 거야. 원장이 일본에서 미싱을 배워온 사람이고 아버지가 초대 국회의원 출마했던 사람이야. 그럼 괜찮은 집안일 거 아니야. 옷도 예쁘게 입고. 근데 아버지가 국회의원 나갔다가 떨어지면서 빚을 많이 진 거야. 원장이 통통통통 소리만 나면 횃댓보 뒤에 들어가서 빚쟁이가 갈 때까지 안 나오니까 학생들이 진도를 못 나갈 거 아니야. 그래 내가 거기 다닌 지 사나흘쯤 돼서부터 나보다 늦게 들어온 학생들을 가르쳤어.
그때 내가 잘 데가 마땅치 않았는데, 원장이 학원에서 자다가 집을 얻어 나가면서 내가 거기 들어가 자게 됐어. 내가 거기서 자면서 보리밥만 얻어먹고 일을 했어. 학생들 가르치는 것부터 거래처 관리하는 것까지 다. 학생이 졸업하면 학원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되거든. 미싱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미싱회사에서 미싱을 월부로 살 수 있게 보증 서 주고, 그 미싱으로 물건을 만들어 오면 팔아주고. 근데 졸업생들이 미싱 월부금을 빚쟁이 원장한테 안 주고 꼭 나한테 갖다 줬어. 내가 미싱회사에 월부금 전달하고 수예점에 물건 납품하는 걸 착실하게 하니까 거래처하고 신뢰가 생겼을 거 아니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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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을 일하고 나서 원장한테 독립하고 싶다고 기술 있는 사람 셋하고 거래처하고 날 달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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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을 십 원 한 푼 안 주고 보리밥만 먹이면서 일을 시켰으니까 할 말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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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이 ‘상춘 씨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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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니까 한옥집 마루만 세를 얻고 드레스 회사에서 기계 두 대를 월부로 얻었어. 거기에 기술 있는 아이가 셋이니까 기계가 다섯 대인 거잖아. 수예점 아저씨가 고마운 게 일한 걸 가져가면 숫자만 세지 물건이 좋고 나쁜 걸 따지지 않았어. 옷 커버 몇개, 방석 몇 개, 이불 몇 개 하고 세서 돈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줬어. 돈을 받아야 광목을 사잖아. 광목이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 내가 그걸 이고 버스를 타서 또 버스값을 깎는 거야. 올 적 갈 적 다믄 십원이라도 깎아. 그렇게 광목을 가져와서 밤새 재단해서 그 위에 그림을 복사해 쌓아 놓으면, 애들이 가져가서 거기에 수를 놔서 가져오고, 그럼 그걸 박아서 조루로 물을 확 뿌려 놨다가 다려서 수예점 갖다 주고. 내가 그때 거의 자질 않았어.
일하는 사람이 늘고 자리가 잡히니까 드레스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그때 학원 인가를 받으려면 건물이 20평 이상이고 기계가 14대 이상이래야 되는데, 드레스 회사에서 자기네가 건물하고 기계를 해줄 테니까 나더러 학원을 운영해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강석인 형부한테 전화했어. 피란 후에는 서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내가 사정 얘길 하고 드레스회사 사람들을 좀 만나봐 달라고 했더니 당장에 알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형부가 회사 사람들을 만나고 나오더니 나더러 회사 밑에서 일하지 말고 학원을 혼자 해보라고 하는 거야. 형부도 돈암동 산 꼭대기 살 땐데, 자기 아버지가 시발택시를 한 대 가지고 있는데 그걸 팔아서 건물을 빌려 보자면서. 내가 그래서 학원을 시작하게 된 거야. 영등포에 20평짜리 건물을 얻고 드레스 회사에서 미싱을 17대를 빌렸어. 학원 인가는 형부 아버지 이름으로 냈어. 내가 그때 스물 셋인데 스물다섯이 넘어야 인가를 내 줬거든. 나 가르친 원장은 인가 없이 했는데 나는 정식으로 인가 있는 학원을 하게 된 거야.
형부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가 형부한테 한 달도 안 거르고 이자를 줬어. 3년 만에 그 돈을 다 갚으면서
그때는 시계가 귀한 물건이었는지 선물로 벽시계를 사가지고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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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운이 좋은 게 사회교육원에서 내 담당이 큰오빠의 처제의 신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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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인가가 내 이름이 아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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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사돈이 나 스물여섯 살 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인가를 내 이름으로 바꿔놨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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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싱자수학원 원장 김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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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싱자수학원 원장 김상춘
발 행|2022년 12월 29일
펴낸이|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