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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ug 24. 2021

예술가들

요다 제 27화

새    

  

새집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의식적 행위인데, 새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의지도 없이 단지 본능에 따라 집을 짓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 오직 인간만의 활동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다큐 <새들과 함께 춤을>에서 바우어새의 구애 활동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우어새는 참새과의 작은 새로 예쁘게 장식한 집으로 암컷을 유혹한다. 새는 주위에서 물어온 물건들로 집을 장식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거의 충격을 받았다. 새는 물건을 놓을 때마다 그걸 여기 놨다 저기 놨다 하면서 고민했고, 물건을 놓고 나면 멀찌감치 가서 전체적인 그림을 살폈다. 새는 집을 꾸미는 내내 물건의 배치를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새를 아무 감정이나 의지 없이 프로그래밍된 대로 행동하는 자동기계라고 믿었는데, 새의 머릿속에서는 집을 꾸밀 때 우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새는 꽃, 과일, 코카콜라 캔, 플라스틱 병뚜껑 등의 여러 물건을 주워다가 바닥에 늘어놓거나 쌓았는데, 그것들을 배치하는 데 나름의 기준을 가진 것 같았고, 그 기준이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았다. 새는 물건을 색깔별로 진열했는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색끼리 모여있는 걸 예쁘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 새는 시들고 썩은 열매를 부지런히 솎아 내버렸는데, 우리와 마찬가지로 잘 익은 열매의 선명한 색과 매끄러운 모양을 예쁘다고 여기고, 썩은 열매의 칙칙한 색과 일그러진 모양을 밉다고 여기는 것이다. 새와 인간은 모두 과일을 즐겨 먹으며 잘 익은 과일의 색과 형태를 쫓아 감각을 발달시켰으니 우리 미감이 일치하는 건 당연하다.    

  

새가 꾸민 정원은 예뻤다.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새의 정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 새는 자기 눈처럼 파란 물건만 모았는데 자연에는 파란색이 많지 않아서 수집품 대부분이 플라스틱이었다. 새는 빨대, 어린이용 숟가락, 패트병 뚜껑, 패트병 뚜껑 링을 풀밭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진열했다. 새는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일까? 풀밭 위에 파란 물건들이 놓인 모습이 파란 꽃이 핀 것 같기도 하고 파란 열매가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새는 내가 보고 느낀 그대로 파란 꽃밭이나 열매밭을 표현한 게 아닐까?      


다큐에 소개된 또 다른 바우어새는 오두막을 쌓는 대신 높이가 1m 이상 되는 탑을 쌓았다. 1m는 새의 키의 십여 배나 되는 높이로 완성하는데 열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새는 평평한 땅을 골라 이끼로 두툼하게 기단을 쌓은 뒤 그 위에 나뭇가지로 탑을 쌓아 올렸다. 처음엔 탑이 한국의 절 탑 같다고 봤는데, 다시 보니 키 큰 침엽수 같았다. 늘상 보아오던 절 탑이 나무의 형태를 본 따 만들어졌다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새가 쌓은 탑도 나무의 형태를 본 딴 게 아닐까. 새는 탑이 완성되자 열매를 물어다가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우리가 절 탑이나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을 매달듯이 말이다. 나는 새가 뭘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동물과의 대화를 꿈꿨다. 같이 사는 개 고양이와 어느 정도 대화가 되기는 하지만 우리 대화는 밥을 달라거나 문을 열라는 등의 직접적이고 단순한 것에 머문다. 우리는 나무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은 적 없고 그런 대화가 가능하리란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우어새는 조형물을 통해 말한다. 나무는 크고 높고 풍요로운 존재이고, 자기도 그처럼 되고 싶다고. 세상에, 나는 새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예술을 통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줄은 알았지만, 새와도 소통하게 될 줄이야. 나는 지금 바우어새의 조형물을 예술이라고 불렀다. 예술이 인간만의 것이라고 믿어 온 세월이 길다 보니, 새가 만든 걸 예술이라고 하기가 조금 망설여진다. 그러나 바우어새의 조형물이 예술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내가 거기서 느낀 예술적 감흥이 그 증거다.

   

개      


지금까지 인간만이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확신한 데는 개와 고양이 탓이 크다. 개 고양이는 내가 가까이 지낸 유일한 동물들인데, 오랫동안 그들을 가까이서 봐왔지만,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어떤 낌새도 채지 못했다. 그러나 새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개 고양이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여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가 바우어새의 조형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건 그것이 시각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새는 비슷한 시각 경험을 한다. 시력이 좋고 색채 시력이 뛰어나 세계를 선명한 총천연색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영장류 조상이 새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주식으로 먹으며 열매를 잘 구분하기 위해 시력을 발달시킨 결과다. 그러나 영장류를 제외한 포유류는 대체로 시력이 좋지 않다. 개와 고양이도 그렇다. 고양이는 좀 나은 편이지만, 개는 지독한 근시에 색맹이라 세계를 흐릿한 흑백으로밖에 못 본다. 개는 대신 냄새를 잘 맡는데, 후각이 사람에 비해 100만 배나 발달했다고 한다. 사람보다 100만 배 냄새를 잘 맡는다는 건 어떤 걸까? 지금 내 주변에는 많은 물건이 있다. 나는 그 중 어느 것도 냄새로 지각하지 못하는데, 개는 그것들 각각을 다 냄새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소파, 전열기, 책장 그리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눈으로 훑으며 거실의 지도를 그릴 때 개는 냄새로 거실 지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시각보다는 후각을 통해서일 것이다.     


개는 다른 개들의 오줌 냄새를 맡는데 환장한다. 개는 산책 내내 가로수, 전봇대, 소화전 등 길가에 세로로 서 있는 구조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차례차례 냄새 맡는데, 그것들의 밑동은 오줌으로 얼룩진 데다 그 위에 먼지가 시커멓게 껴있어 쳐다보기가 무섭게 더럽다. 나는 거기에 코를 박고 있는 개의 목줄을 사정없이 잡아당기지만, 개는 한사코 버틴다. 오줌 냄새를 맡는 개는 몰두 그 자체다. 개가 오줌을 대하는 태도는 최고급 와인을 대하는 소믈리에처럼 신중하고, 눈 감고 냄새를 느끼는 표정은 황홀하다. 전봇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개는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일까? 전문가는 개가 오줌 냄새에서 다른 개의 성별, 나이, 건강, 그곳을 지나간 시간 등의 정보를 파악한다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먹으면 비타민, 칼륨, 섬유질 등의 영양소를 섭취하게 된다는 설명이 우리가 사과를 먹으며 하는 경험, 즉 사과의 맛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것처럼 그 설명은 개가 했을 경험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개가 전봇대에 코 박고 했을 경험에 상상으로라도 접근해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냄새로 무언가를 상상하는데 완전히 무능하다. 아쉬운 대로 냄새에 소리의 형상을 입힌 뒤 상상을 전개해보자. 개는 뒤섞인 냄새를 따로따로 구분한다고 하니, 여러 냄새가 그의 콧속에서 오케스트라의 선율처럼 따로 또 같이 화음을 이룰 것이다. 개는 냄새를 맡은 뒤엔 반드시 거기에 자신의 오줌을 더하는 것으로 하나의 악장을 완성하고, 힘찬 뒷발길질은 매 악장을 끝내는 클라이맥스다. 다음번 가로수까지 한 호흡 쉬었다가 다음 악장이 시작된다. 냄새는 소리에 비해 천천히 휘발되므로 맨 앞의 가로수, 즉 첫 악장에서 시작해 마지막 가로수의 마지막 악장까지 모든 선율이 동시에 울려 퍼질 것이다. 무지 복잡하고 화려한 곡일 듯.     


목줄을 잡아당기지 말고 충분히 음미하게 놔둘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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