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함께 여행하는 법

by 김지현

“우리 같이 여행 갈래?”

“그래, 가자.”

“엄마 차타고.”

“그래. 내가 운전은 잘 할 수 있어.”

“엄마 스마트폰으로 내비하고.”

“그럼 되지. 내비는 쓸 줄 알지?”

“너무 간단해서 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광주를 거쳐 담양을 여행하기로 했다. 여행 전날 천안에 있는 엄마 집에서 가서 자고 다음 날 아침 길을 나섰다.

차에는 못 보던 핸드폰 거치대가 달려 있었다. “막내가 사줬어.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이런 건 잘 알아.” 엄마가 말했다. 내가 폰을 거치대에 끼워보려 했다. 폰에서 케이스를 벗기지 않은 채였다. “그걸 벗겨야 돼.” 엄마가 말했다. 폰은 가죽지갑처럼 생긴 케이스에 끼워져 있었다. 그런데 케이스를 어떻게 벗기는 것일까? 살펴보니 케이스 뒷면이 폰에 달라붙어 있었다.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 같았다. 엄마가 케이스를 잡아당겼다. 잘 안 떨어졌다. 점점 힘을 주다가 나중에는 있는 힘껏 잡아당기게 됐다. 가죽이 뜯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내가 놀라서 물었다. “파는 사람은 쉽게 하던데.” 한참을 케이스와 힘겨루기를 한 뒤에야 엄마는 가죽이 폰의 뒷면이 아니라 플라스틱 프레임에 붙어있어서 가죽이 아니라 그 프레임을 당기면 케이스가 떨어진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때쯤 나도 친구들이 하던 걸 본 게 기억났지만, 이미 가죽은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아이구 무식해가지고 이걸 이렇게 피가 나게 잡아당기고 있었으니.”


플라스틱 프레임 위에 뜯겨 나간 붉은 가죽의 흔적이 핏자국처럼 점점이 남아 있는 걸 보고 하는 소리였다.

거치대에 스마트폰을 끼웠다. 안성맞춤이었다.


“이 차 살 때 내비를 샀으면 됐는데 첫째가 나는 그거 못 쓴다고 어찌 지랄을 하는지 내가 더 말하기 싫어서 그만 뒀어.”

“엄만 내비 못 써.”

“왜 못 써?”

“문자 보내는 게 제일 간단한 건데 그걸 수 백 번을 가르쳐줘도 못 하니까.”

“언제 수 백 번을 했어?”

“........수 십 번.”


티맵 검색창에 ‘광주 충장로’를 쳤다.


“2시간 38분 걸린대.”

“걔가 그래?”

“응.”

“똑똑하기도. 내가 내비를 하려고 핸드폰을 바꾼 거야. 일부러 화면을 큰 걸로 샀지.”


엄마와 나는 핸드폰을 같이 사곤 했다. 쓰던 폰이 낡으면 같이 핸드폰 가게에 가서 같은 기종에 색깔만 다른 폰으로 바꿨다. 2G폰으로. 엄마는 스마트폰이 나오고부터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싶어 했지만, 내가 말렸다. 어차피 전화기로만 쓸 거면서 비싸고 무거운 스마트폰을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랬더니 엄마는 나 모르게 혼자 가서 스마트폰을 샀다. 엄마는 남들이 하는 건 뭐든 자기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자기뿐 아니라 자식들도 남들 하는 건 다 하며 살길 바란다. 나한테도 스마트폰을 사라고 성화를 했다. 남들은 스마트폰으로 별 거 별 거를 다 하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것도 할 줄 모르고 세상에 뒤쳐져서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한동안 엄마는 나에게 스마트폰으로 바꾸라고 잔소리를 하고, 나는 엄마에게 스마트폰을 샀다고 잔소리를 했다. 내 예상대로 엄마는 비싼 스마트폰을 사서 전화기로만 썼다. 실은 전화기로 쓰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스마트폰에 너무 기능이 많고 버튼도 많다보니 전화를 걸고 받을 때마다 이 버튼 저 버튼을 누르며 수선을 떨었고, 번번이 전화가 중간에 끊기는가 하면, 뜬금없이 영상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젠가부터 서로 간에 스마트폰을 사니마니 하는 것으로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됐다.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개인적인 사심도 작용했다. 엄마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니 엄마와 만났을 때 인터넷을 쓸 수 있어 편리했다. 이번 여행만 해도 그렇다. 스마트폰의 내비가 아니었다면 길도 모르는 광주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광주 가는 길을 몰랐지만 내비가 있으니 걱정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번째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마자 길을 잘 못 들어 고속도로 하행선이 아니라 상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것도 다 경험이야.” 엄마가 말했다. 그렇다. 처음이라 실수가 많지만 이번 기회에 호흡을 맞춰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둘이서 전국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엄마는 운전을 하고 나는 내비를 보고. 나는 우리가 환상적인 파트너가 될 거라고 기대했다.

“이것도 다 경험이야.” 광주 톨게이트에서 하이패스 차선으로 들어갔을 때도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하이패스가 없었으므로 엄마는 차선을 바꿔야 했다. 그러나 톨게이트가 코앞이라 차선을 정상적으로 바꿀 여유가 없었다. 우리 차가 여러 개의 차선들을 가로질러 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운전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소심하게 주위를 살펴보니 뒤따라오던 트럭 운전사가 차에서 내려 삿대질을 하며 다가왔다. 곧 험악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겁을 먹고 있는 건 나뿐으로 엄마는 오직 전방만을 주시하며 목표 차선으로 진입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 다가오던 트럭기사가 엄마를 본 것 같았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그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머리가 허연 팔순 노인하고 싸워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노인은 종종 열외 취급된다. 어린이나 장애인처럼. 도로에서도 그랬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엄마와 나는 최악의 파트너였다. 엄마는 운전에 서툴고 나는 내비를 보는 데 서툴렀다. 나는 내비를 보는 것이 네이버 길찾기를 검색하는 것과 별다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서 길찾기를 검색하는 것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내비를 보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내비가 알려주는 길들은 눈앞에서 수 십 킬로의 속도로 가까워졌는데, 나는 그 속도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다. 특히 톨게이트를 들어가고 나갈 땐 처리해야 할 정보가 갑자기 많아졌는데, 내 머리는 그 정보들을 차가 달리는 속도로 처리하지 못해 매번 버벅댔다.

차도 잘 안 나갔다. 마티즈는 차가 작아서 아무리 밟아도 속도가 안 난다고 했다. 고속도로에서 너무 빨리 달리는 것만 겁나는 일인 줄 알았더니, 너무 느리게 달리는 것도 겁나는 일이었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계속 경적을 울려대면서 우리 차를 추월했다. 느리게 달리다보니 도착예정시간이 한없이 지연됐다. 출발할 때 내비가 알려준 예상도착시간은 3시 50분이었는데, 달리다 보면 예상도착시간이 4시, 4시 반, 5시로 점점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다가가는 만큼 도착점이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영원히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달리고 달리니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기는 했다.

광주 시내에 접어든 뒤에도 문제적 운전은 계속됐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연달아 경적을 울려댔다. 우리 차 들으라고 그러는 것 같은데 교통법규에 무지한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다른 차들이 자꾸 경적을 울리지? 엄마가 뭘 잘 못한 거야?”

“아니, 난 제대로 하고 있는데.”


내가 물을 때마다 엄마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심히 대답했다.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엄마는 운전경력 35년차인 데다 운전하는 걸 좋아하기까지 한다. 엄마가 운전하는 걸 보고 있으면 세상에는 아무리 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일이 있으며, 좋아한다고 해서 잘하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엄마가 운전면허를 따던 때가 기억난다. 엄마는 독서실까지 끊어가며 열공을 한 끝에 필기시험에 턱걸이로 합격을 했다. 엄마는 살면서 자기를 위해 한 유일한 일이 운전을 배운 거라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는 운전도 자신만을 위해서 하지는 않았다. 가족 중 유일하게 운전을 할 줄 아는 엄마는 늘 운전 못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태우고 다녔다. 내가 첫 영화를 만들 때 운전기사를 자처했고, 내가 운전면허 주행연습을 할 때는 매일 아침 나를 연습장까지 태우고 가서 기다렸다 데려오곤 했다. 나도 면허를 따기는 땄다. 그러나 엄마와 같이 첫 도로주행을 나갔다 대판 싸우고 난 뒤로는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원래는 광주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이른 저녁을 먹게 됐다. 숙소를 정하고 숙소주인에게 물어 근처 식당에 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한 식당이라는데 맛은 별로였다.

초저녁부터 자고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숙소를 나섰다. 무등산에 가기로 했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대로 내비에 <원효사>를 치고 출발했다. 나는 무등산이 서울의 남산쯤 되는 야트막한 산일 줄 알았는데, 무등산은 크고 깊고 울창했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원효사>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주차장이 텅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차하는 데 안타까우리만치 긴 시간이 걸렸다. 막상 절에서 보낸 시간은 주차하는 데 들인 시간보다 짧았다. 그날 우리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매번 목적지에서 보낸 시간보다 주차장을 찾거나 주차하는 데 더 긴 시간을 보냈다. 주차하는 데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지만 목적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만큼 짧았다.

원효사에서 나와 담양으로 갔다. 담양은 나무가 유명했다. 가이드북에서 권하는 볼거리가 다 나무가 있는 정원과 길이었다. 죽녹원이란 이름의 대나무숲,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있다가 메타세콰이어 길, 000나무길. 제일 먼저 죽녹원에 찾아갔다.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기를 바랐는데, 전통 가옥이 군데군데 서있는 공원을 한참 들어간 뒤에야 대나무숲길이 시작됐다. “중국에서 본 대나무는 진짜 엄청나데.” 대나무 숲 입구에 서서 엄마가 말했다. “일본 대나무도. 근데 우리나라는 대나무가 그렇게 두껍게 자라지 않나봐.” 내가 대답했다. 일본 대나무 숲엔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런데 그곳 숲길엔 사람들이 열을 지어 오르내리고 있었다. 숲길을 따라 십 여 미터쯤 걸었을까, 엄마가 말했다. “더 가볼 거 없잖아. 가봐야 계속 똑같지.” 우리는 거기서 돌아섰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침도 먹지 못한 채였다. 숙소를 나섰을 땐 너무 이른 탓에 문을 연 식당이 없었고, 길을 나선 후엔 계속 산속과 시골길이라 식당이 드물었다. 멀리 남도까지 갔으니 맛있는 걸 먹고 싶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이런 거 저런 거 따지고 고를 형편이 못 됐다. 설렁탕집에 들어갔다. 텅 빈 식당에 대형 TV가 켜져 있었다.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미식클럽이라는 프로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TV화면 위로 화려한 음식의 향연이 펼쳐졌고 출연자들은 연신 과장된 감탄사를 남발했다. 주인이 설렁탕 두 그릇을 가져왔다. TV화면과 대조되는 밥상. 그래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남도까지 와서 설렁탕이라니 실망스런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다음 코스는 메타세콰이어 길. 죽녹원을 보고 나자 메타세콰이어 길이 어떨지 감이 왔지만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예상대로 메타세콰이어 길은 메타세콰이어가 길 양 옆으로 늘어선 길이었다. “이걸 보러 온 거야?” 길 초입에 들어서며 사람들이 말했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명처럼 그곳이 드라마 촬영지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어느 드라마인지 모르면서도 자동적으로 사랑에 빠진 남녀가 단 둘이 걷는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만 없었어도......... 그러나 일요일 오후의 그 길은 충장로만큼이나 붐볐다. 그리고 땡볕이었다. 6월 들어 최고기온이라고 했다. 십 여 미터쯤 걸었을까. 엄마가 말했다.


“계속 가게? 가봐야 똑같지 더 가볼 것도 없잖아.”

“........”

“다 봤으면 이제 집에 가자.”


차마 00나무 길까지 가자고 말할 수는 없었다. 관광지는 이제 됐고, 마을 민박집에서 하루 머물며 마을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집이 바로 민박집이 아닌가. 그 마을엔 대나무가 없고 이 마을엔 대나무가 있지만 그런 말이 씨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는 엄마의 발걸음은 활기 넘쳤다. 집 떠난 이후로 엄마는 내내 시들했다.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피곤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게 재미없어 그랬던 것이다. “빨리 가서 고양이들 밥도 줘야 되고, 서울도 가야 되고.” 할 일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엄마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내비에 독립기념관 톨게이트라고 치라우.”


천안에서 출발할 때 내비가 가까운 독립기념관IC를 두고 다른 IC를 알려줘서 한참을 돌았는데, 또 그럴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


3박 4일을 예정하고 떠난 여행을 1박 2일 만에 돌아가다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독립기념관 톨게이트 쳤어?”

“집 주소 쳤어.”

“독립기념관 톨게이트라고 쓰라니까.”

“마찬가지야.”

“마찬가지 아니야. 내가 알아.”

“엄마가 알기는 뭘 알아?”


입씨름은 한참을 이어지다가 내비의 목적지를 독립기념관IC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런데 내비 알림판에 천안IC가 아니라 공주IC라고 떴다. 공주IC로 나가라는 것 같았다.


“왜 공주IC가 뜨지? 공주IC로 나가라는 거 같아.”

“독립기념관 톨게이트라고 쳤지?”

“응.”

“그럼 됐어.”


공주IC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공주IC로 나가라는데?”

“우리는 천안으로 가는데 왜 공주IC로 나가?”

“몰라. 그러니까 내가 아까부터 물어봤잖아. 얘 말대로 공주IC로 나갈 거냐고?”

“천안 가는데 왜 공주IC로 나가?”

“나도 모르지. 결정해. 900미터 남았어.........800미터..........600미터.........300미터”


엄마는 공주IC 쪽으로 차선으로 바꿨다. 그러나 톨게이트로 나가지는 않고 그 한참 전에서 차를 세웠다.


“가서 물어보고 올게.”


엄마가 한참을 걸어가 톨게이트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거봐. 천안으로 가는데 왜 공주IC로 가냐잖아. 괜찮아. 나갔다 다시 들어가면 돼.”


톨게이트를 지나는데 직원이 내비가 공주IC로 나가라고 길을 가르쳐 준 건 지금 독립기념관IC까지 고속도로가 막히기 때문일 거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마자 차를 돌려 천안 고속도로로 돌아갔다.


“내가 그랬잖아. 천안으로 가는데 왜 공주IC로 가?”

“내가 아까부터 물어봤잖아. 내비에서 공주IC로 가라는데 내비가 시키는 대로 할 거냐고?”

“잘 못했으면 잘 못했다고 할 것이지.”

“내가 뭘 잘 못했는데? 내비가 가라는 데로 갈 거라면서?”


내비가 괜히 공주IC로 가라고 한 것이 아닌 것이 천안 고속도로는 출퇴근길의 서울 시내만큼이나 막혔다. 반면에 고속도로와 나란한 국도로는 차들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아까 얘가 가르쳐준 대로 갔으면 지금쯤 도착했을까?” 내가 물었다. “다 끝난 일이니까 말해봐야 소용없어. 이것도 다 경험이니까.” 엄마가 대답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경험이라는 뜻일까? 앞으로 엄마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이 또 있을까?

마침내 독립기념관IC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하이패스 아닌 일반패스 차선을 찾느라 톨게이트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그러는 사이 뒤차가 우리 차를 앞질러갔다. 겨우 일반패스 차선을 찾아 들어갔을 때 통행료 받는 남자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유 젊은 사람이 운전을 안 하고 어르신이 운전을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도 60이 한참 넘어보였다. “앞차가 이 차가 운전을 위험하게 한다고. 고속도로에서는 젊은 사람이 운전을 해야 돼요.” 엄마가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개새끼. 지가 뭐라고.”

“이제 이거 꺼도 돼.” 톨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엄마가 말했다. 내비를 껐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 이제 고속도로 운전은 하면 안 될 거 같아. 집에서 연춘리까지만 왔다 갔다 해.”

“시골에선 차 없으면 못 다녀.”

“그러니까 연춘리까지만 왔다 갔다 해.”


엄마는 익숙한 길들을 능숙하게 달려 집에 도착했다. 집 앞에 차가 서자 고양이 한 마리가 도로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툇마루에는 또 다른 고양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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