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수정-홍상수
어느 교실, 선생이 화가 나 야단을 치고 있다. 잘못했다고 느끼든 아니든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한 아이가 혼자 딴 생각을 하며 히죽거리고 비행기 지나간다며 창밖을 두리번거린다. 아이는 몇 대 맞고 나서도 통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지 이번에는 화장실엘 가겠단다. 차라리 선생에게 대드는 거라면 아이들에게라도 멋있어 보일 수 있으련만, 아이의 태도는 상황을 점점 더 불편하게 만들 뿐이니, 모두들 “쟨 정말 왜 저런다니? 제발 그만 좀 하지.” 라며 짜증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이 미운오리새끼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짐짓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안 되는 사람들이다. 올곧은 성격이어서는 전혀 아니고, 흡사 아이처럼 매 순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까닭이다. 그들은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적 없이 그때그때의 욕망에 이끌려 예측불가능하게 움직이면서, 관객의 호감을 사거나 동정 받거나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낱낱이 망쳐버린다.
영화에는 조폭, 살인자, 창녀처럼 현실에서라면 마주치기 꺼려지는 인물들이 흔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리얼리티가 포기되어야 한다. 이빨 뽑힌 호랑이처럼 아무 위험 없이 고분고분한 애완동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빨을 제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들을 우리와는 근본이 다른 악인으로 치부해 배제시키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공통분모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있는 이곳을 안전하게 만들자는 것인데, 범죄자를 태생적으로 보통사람과 뇌 발달이 다른 사이코패스라고 설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전제하고는 불편한 차이들을 없는 것으로 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크린의 조폭과 창녀는 하나도 낯설지가 않은 모습이 되고, 관객은 아무 거부감 없이 그들에게 자신을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결코 타자의 맨얼굴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데, 타자들을 순화시켜 수용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덕분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타자 쪽의 협조가 필요하다. 자신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그쪽에서도 눈치껏 처신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 모범적 사례로는 명랑한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가 카메라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불쌍한 연기를 하거나, 멀쩡하던 재벌회장이 사법처리를 앞두고 환자가 되어 휠체어에 실려 다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렇게 눈치껏 행동을 해줘야 우리가 적당히 그들을 불쌍해하면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홍상수의 인물들은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눈치를 안 보는 걸까? 그들은 관객이 좋게 봐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행동한다. 적당히 관객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넘어가는 법이라곤 없이, “난 이런 놈이야, 그래서 뭐?” 매사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뻔뻔스럽다.
그 중 한 인물을 만나보자. <오! 수정>의 수정에겐 오빠가 있다. 그 오빠는 짧게 두 씬에 등장한다. 첫 씬에서 그는 허름한 연립주택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한눈에 히끼꼬모리다. 잠시 후 그는 수정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이불속으로 파고들면서 “한번만 해 달라.”고 조른다. 동생에게 수음을 시켜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잠에 취한 동생은 귀찮아 밀쳐내다가 그래도 계속 조르니까 알았다고 한다. 부탁의 내용을 모르고 보면 이들의 모습은 옷이나 노트북 같은 걸 빌려달라고 실경이하는 여느 남매와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 행위는 이들에게 물건을 빌려주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것 같다. 두 번째 씬은 오빠의 방이다. 이번에는 동생이 심심해 오빠 방에 들어오지만, 그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동생이 귀찮기만 하다. 수정은 오빠에게 말을 붙여보려다 할 일없이 나간다. 좀 특별한 서비스를 주고받는다는 것 외에는 영락없는 보통의 남매다.
그 후 오빠는 영화에 다시 등장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내 그가 마음에 걸렸다.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동생과 일종의 근친상간 관계이지만 흔히 보던 그런 근친상간 관계는 아니다. 그는 동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것도, 약한 동생을 강제로 성추행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 근친상간이 등장하는 순간, 나는 습관대로 그를 불가능한 사랑에 빠진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으로 동정하거나, 나와는 근본이 다른 사악한 근친상간 가해자로 증오할 준비가 돼있었다. 만약 그가 혀를 자르고 기억을 지우는 몸부림으로 근친상간이란 단어에 줄줄이 달라붙어 있는 죄의식이나 트라우마의 제스처를 취했더라면, 나는 쉽게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관습적인 제스처를 거부하고, 한차례의 성욕이 지나간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죄인이나 불쌍한 사람으로 보아내려는 나의 시선과 맞서면서, 나의 습관적 믿음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수정에게는 두 명의 애인이 있다. 둘은 모두 수정에게 섹스를 조른다. 수정은 두 애인과 오빠, 이렇게 세 명의 남자와 각각 다른 침대에 눕는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처녀막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남자들의 욕망을 적당히 충족시켜주는 세 침대의 풍경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 나는 그 세 개이며 하나인 침대의 풍경을 보며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믿고 있던 것처럼 오빠인 그의 요구는 애인들의 요구와 질적으로 다른 것일까? 남매의 관계가 이상하다지만, 애인들과의 관계가 그보다 덜 이상한 것은 아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첫날밤을 치르는 데 성공한 애인이 혈흔이 뭍은 시트를 들고 환희하는 모습은 익숙해서 그렇지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너무너무 이상하다. 그런데 왜 하나는 금기시되고 다른 하나는 심지어 권장되는가?
나는 수정의 오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살면서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간접적으로나마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이 나의 선입견에 부합하는 포즈를 취해 주었기에, 나의 선입견을 재확인하며 그들 곁을 가볍게 지나쳐올 수 있었다. 그러나 수정의 오빠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는 기습당하듯 그의 맨얼굴과 마주친 채 멈춰 서고 말았다.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동생을 조르는 것 외에는 달리 성욕을 풀 길 없는 무력하고 메스꺼운 자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그런 자신을 변명하면서까지 나의 이해를 구하려 들지는 않는다. 나라면 구구한 변명을 포기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문득 그의 뻔뻔함을 당당함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어진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이든 기죽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당당함 말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역겹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얻을 거라곤 비난과 배척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