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이 꺼지면, 무대의 주인공은 홈리스와 쓰레기
파리 여행 3일차이자 마지막날, 일요일이었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가볍게 걸어 나와 에펠탑을 향했다.
숙소인 캉브론에서 에펠탑까지는 도보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체크아웃 12시까지만 놀다 들어오자라는 마음으로 아침 8시쯤 나섰다.
파리에서의 아침, 얼마나 낭만적인가. 심지어 나는 자고 일어나서 바로 에펠탑까지 걷고 있다구..
내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한 느낌을 가지려는 찰나, 나는 그 마음을 살짝 접어 넣었다.
파리의 아침거리는 저녁보다 낯설었다.
이곳저곳에 누워 있거나 이제 막 일어나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홈리스(노숙자)들이 너무 많았다.
밤길보다 더 위험하다고 느꼈던 주말 아침 거리.
내가 걸어가면서 마주친 사람들의 대부분이 홈리스거나, 빠르게 조깅하는 서양인들이었다. (역시 유럽애들은 아침 조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양쪽 모두와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에펠탑까지 걸어갔더니, 드디어 아시아인들이 있었다.
한 20명쯤 되는 아시아인들이 마르스광장 옆 광활한 주차장의 한 관광버스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역시 파리의 새벽도 부지런한 건 아시아인들뿐이구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20년만에 온 에펠탑이었다. 그 땐 12월에 갔었기에, 에펠탑 아래가 아이스링크였는데, 지금은 그냥 텅 빈 공간이었다.
아마 잠시 후면 타워 전망대로 올라가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으로 가득찰 공간일 테지.
에펠탑 아래에 서서 나는 머뭇거렸다.
내가 알던 파리의 랜드마크와는 달리, 눈앞의 마르스 광장은 의외의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잔디밭에는 홈리스들이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누워 있었고, 여기저기 흩어진 종이컵과 음식 포장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전날 광란의 토요일 밤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수북이 쌓인 잔해들이었다.
무엇보다 낯선 긴장감을 준 건 총을 든 군인들이었다. 무표정하게 광장을 순찰하는 그들의 모습은 ‘로맨틱 파리’라기보다는 ‘보안 강화 도시’에 더 가까워 보였다.
순간, 그들이 혹시 노숙자들을 정리하기 위한 병력인지, 아니면 테러 대비를 위한 경계병력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불편해졌다.
뜻밖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렌즈를 들이대자, 화면 속 군인들이 나를 의심의 눈빛으로 보았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주변 풍경을 담는 척 렌즈를 옆으로 돌렸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대형 쓰레기통이 10개 정도 달린 차량이 공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기 쌓여 있는 쓰레기들을 정리하기 위함이겠지. 쓰레기차 10개도 부족할 것 같지만.
마치 화려한 무대의 커튼 뒤, 분장 전의 어수선한 대기실을 들여다본 기분.
에펠탑의 백스테이지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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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완성되는 순간
잠시 광장을 벗어나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을 때,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불과 방금 전만 해도 어수선하던 마르스 광장은, 어느새 깔끔한 무대 위로 변신해 있었다.
홈리스도, 쓰레기도, 군인도.. 모두 사라져 있었고 에펠탑은 그냥.. 에펠탑이었다. 내가 알던 그 모습.
순식간에 ‘빛의 도시’의 상징으로 돌아온 에펠탑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전의 풍경이 신기루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화려한 무대 뒤에는 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 청소부, 경비병력, 이름 없는 일꾼들 덕분에 우리가 꿈꾸는 파리의 엽서 같은 풍경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이면을 봤다는 사실이 영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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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는 이름, BTS와 블랙핑크
에펠탑이 보이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였기 때문에,
근처 골목을 한참 헤매었다. 카페애 도착하면 뒤돌아서 에펠탑을 찾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니 역시 에펠탑이 보이는 카페는 다르구나 싶었다.
아마.. 저 맞은편 카페는 에펠탑을 등지고 있으니 비싸긴 비싸도, 여기보단 싼 가격일 터였다.
혼자 카페 앞 거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크로크 무슈를 먹고 있자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으며 말을 건다.
“Are you Korean?”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I love BTS! BLACKPINK!”
아이돌에 관심 없는 나지만, 해외여행 나왔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그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동안 몇 명인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감사를 해보았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영어 가이드북을 들고 다니며 괜히 주눅 들었던 내가, 이제는 K-팝 덕분에 오히려 ‘친근한 나라의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20년 전에는 에펠탑 근처 기념품 파는 아저씨의 단골 멘트가 있다. 아시아 여자들을 보면 무조건 ‘니하오’가 먼저 나오고, 반응이 없으면 ‘곤니찌와’, 그래도 안 되면 ‘안녕하세요’가 아닌 ‘이뻐요’였다.
‘안녕하세요’가 어려웠던 걸까?
그랬는데 이제는 내 얼굴만 봐도 ‘코리안?’이라고 물어봐 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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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팁 문화, 작은 해프닝
여행은 늘 사소한 해프닝으로 기억이 깊어진다.
그날 나는 30유로짜리 현금을 내고 27.6유로의 음식을 결제했는데, 직원이 거스름돈을 주지 않았다.
자리에서 계산서를 달라고 하고, 30유로를 줬는데 어쩐지 메르씨 보꾸를 3번이나 하더라니.
순간 ‘아, 여기는 팁 문화 때문인가? 그 동안 카드로 계산할 땐 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는데..
(캐나다 퀘벡주는 카드 결제할 때 내가 주고 싶은 팁 %를 선택하게 되어 있는데, 파리는 그렇지 않았음)
사실 프랑스에서는 식당·카페 요금에 기본적으로 봉사료(service charge)가 포함돼 있어 팁을 따로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다만 현금 결제를 할 경우, 종종 거스름돈을 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하는데, 내가 별 말 안 했으면 일단 돌려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혹시 혐한??‘ 하는 생각이 스쳤다.
“Is there any change for me?”(나한테 줄 거스름돈 없니?)
직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좀 어이 없다는 웃음이었다.
거스름돈 돌려줄 때 나에게 간단히 사과라도 하거나, 실수였다고 한 마디 했으면,
나도 웃으면서 2유로 정도는 줄 의향이 있었는데, 어색한 표정을 지었기에 나도 그냥 고맙다고 한 마디만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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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남긴 질문
‘우리가 보는 파리는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화려한 엽서 속 풍경일까, 아니면 그 무대를 지탱하는 백스테이지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여행자는 때때로 그 이면까지 보게 되고, 그 순간 여행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하나의 질문이 된다. 나에겐 에펠탑이 그랬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여행의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