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적 인간 되기 #4
안녕하세요,
ㅇㅇ회사 ㅁㅁㅁ입니다.
작일 △△△ CJN께서 문의하신 내용 확인하였습니다.
유선 상 말씀드린 것처럼, 해당 건은 금일 지급으로 처리하여 명일 오전까지는 자료 전달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관련하여 자세한 사항은 유첨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ㅁㅁㅁ드림
이제는 이런 메일을 받으면 ‘응, 그렇구나.’ 하며 아무렇지 않게 다음 메일을 확인합니다. 어제 △△△차장님께서 문의한 부분에 대한 회신인데, ㅇㅇ회사에서 오늘 최대한 빠르게 확인해서 내일 오전까지 자료를 전달 준다고 했고 자세한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해 보면 되니까요.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하루에 수백 개 씩 쏟아지는 이메일의 홍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학생 때는 새로운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나 필요했던 이메일이, 회사에 들어와 보니 일 하라고 발명된 ‘일’ 메일인 것 같았습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메일 속 가득한 회사어였습니다. 처음 보는 단어를 마주하며 ‘내가 이렇게 무식했나’ 싶기도 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작일, 금일, 명일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유추도 안 되어 네이버 검색창에 검색을 해야만 했습니다. 네이버에도, 구글에도 안 나오는 BJN, CJN, DRN은 결국 옆자리 선배님께 여쭤본 후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급으로, 유첨은 어디서 인가 본 적도 있는 것 같은데.. 결국은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 누군가가 올린 똑같은 질문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나만 모르는 건 아니여서' 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전문용어들을 접할 때면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특히 영어 줄임말은 인터넷에 검색해 보아도 잘 나오지 않거나 다의적인 단어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어떤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차장님께 모르는 용어를 여쭤보았는데, 알아 볼 노력도 하지 않고 질문만하는 무성의한 태도로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 날은 차장님 기분이 별로인 날이었겠죠). 그 이후부터는 반드시 질문할 때 ‘인터넷에 찾아보아도 잘 나오지가 않아서요’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을 배우긴 했습니다.
전화 상으로나 미팅 때는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을 왜 이메일에서는 쓰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내가 쓰는 이메일에는 한자어 표현이나 일본어의 잔해들로 굳이 어려운 문장을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혹시나 저 같은 신입사원이 제 메일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회사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혼자만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메일을 모두 작성하고 나서 ‘이 정도면 누구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겠지’라는 생각으로 작성한 내용을 검토하는 중이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이메일 내용이 프로페셔널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개의 단어들을 알고 있는 어려운 표현들로 바꾸고 문장을 조금씩 길게 수정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고친 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제 이메일은 이해할 수 없는 회사어가 가득한 ‘그’ 이메일과 비슷해져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회사원이 회사에서 보내는 이메일을 회사어 가득한 표현으로 작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며 나는 좀 다르게 해보겠다는 생각이, 아직 회사원 신분에 적응하지 못한 앳된 생각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치면 회사에는 바꿔야 하는 게 너무나 많기도 합니다. 일이 끝나면 윗사람의 퇴근과 상관없이 집에 가고, 내 휴가 일정을 내 마음대로 정하고, 선약이 있으니 회식에는 불참하겠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있지 - 못 하니까요.
이제는 회사어 가득한 메일을 써서 보내는 것에도 익숙해진 듯합니다. ‘내 메일 내용이 너무 어려우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보다는 ‘이것도 이해를 못 하고 업무를 하면 안 되지’ 하는 마음으로 메일을 쓰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하나하나 메일을 붙잡고 쓰기엔 시간도 배려심도 부족해진,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