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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an 07. 2018

부다페스트와 첫사랑 1

 15년 전의 크리스마스 

새해를 며칠 놔두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다 꿈에 첫사랑이 나왔다. 


첫사랑. 엄연히 말해 처음으로 좋아한 이성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사랑. 


그런 그가 헤어진 후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훌쩍 넘은 시간 후에야 꿈에 나타난 것이다. 새해를 며칠 앞에 두고 현실보다 더 생생한 꿈에 그가 나온 게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별다른 이유 없이 문득 15년 전의 크리스마스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왜 여태껏 한 번도 기억하지 않았던 아주 오래 전의 크리스마스가 15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그 어떤 최근의 기억보다 더 강렬하게 다시 나의 의식의 문을 두드렸을까. 


나는 당시 고3이었고, 그는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학년은 한 학년 더 어렸다. 그는 철저한 규율을 지닌 외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나는 사귄 지 백일도 채 안돼 발칙한(?) 제안을 했다. 


“우리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


“그래”


“이브 저녁부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라서 당황한 그가 대답할 새도 없이 나는 내가 철도청 사이트를 뒤지며 며칠 전부터 세운 크리스마스 여행 계획을 털어놓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밤 기차를 타고 가서 정동진에서 해 뜨는 걸 본 다음 돌아오는 거야


물론 각자의 부모에게는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온다는 거짓말을 한다는 전제 아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건 곧 금기를 깨는 행위였고, 그러기에 사랑과 금기가 동일시되었던 그 나이에 이 은밀한 둘만의 크리스마스 여행은 더욱더 로맨틱하게 여겨졌다. 물론 현실은 단 둘만의 공간이 철저하게 배재된 크리스맞이 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승객들과 함께 하는 기차 안에서의 밤이었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함께 지새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묘한 설렘을 느꼈다. 첫사랑과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처음 함께 여행을 가고 비록 승객으로 가득 찬 기차 안 일지라도 첫 밤을 보낸다는 건 그 당시 열 여덣살의 우리에게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싶냐던 그에게 나는 별의 '12월 32'일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는 기차가 출발하기 전 연습은 계속 했지만 내가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수즙음으로 빨개진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사랑에 빠진 지 얼마 안 된 모든 연인들이 그러겠지만, 우리는 그 북적거리는 기차 안에서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고, 결국은 그 추운 겨울날 기차의 좁은 통로로 나와 추위도 잊고는 둘만의 사랑을 속삭였다. 


그는 몇 번이나 물었다.


“안 추워?”


근대 정말이지 추위가 아니라 그 밤이 그냥 끝나지 않으면 싶었고, 그렇게 새벽이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잘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난 그를 사랑했던 짧은 시간 동안 늘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마음이 변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 행복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난 그렇게 사랑을 말하는 대신 늘 두려움을 말했고, 그 후 상대만 바뀌었다 뿐이지 같은 레퍼토리는 그 후로도 십 년이 넘게 반복되었다. 내 사랑은 늘 시작하기 무섭게 두려움에 항기를 들었다.


첫사랑의 행복만을 만끽해도 좋았을 그 시절 왜 나는 그토록 두려움만을 말했을까? 아니 왜 그토록 두려워해서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했을까? 


결국 학년 차이로 일 년 먼저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가 그다음 해에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입학하여 CC가 되자는 약속은 감쪽같이 뒤로 하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몇 달 만에 변심을 했다. 마음이 변하는 게 그렇게 무섭다고 했는데.. 결국 정작 마음이 변한 건 그런 나였다. 


고 삼.. 한참 입시에만 매진할 시기에 일방적인 연락 단절이 그 당시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그는 그다음 해에 정말로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입학하였고, 한 번인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냈지만 난 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사람들이 나를 닮았다고 말한 같은 과 그의 동기와 CC가 되었고, 나는 캠퍼스도 좁은 학교에서 그와 그렇게 수시로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다음 학기에 교환학생을 떠났고 그 후로는 계속된 유학 생활로 그와 내가 캠퍼스에서 마주치는 일은 다시는 없었다. 


그렇게 그를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몇 년 후 내가 석사 중 한국에 잠깐 들렸을 때 연락이 왔다. 얼마 전 나와 같은 학교로 유학을 오고 싶다고 해서 내가 잠깐 입학 원서를 봐준 친구가 그의 고교 동창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 괜찮으면 내가 다시 나가기 전에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러자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취소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 인연을 다시 봐야 무슨 소용 일가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를 까마득히 까먹었다. 


그렇게 그와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를 열다섯 번이나 보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두려움보다 더 강함을 마침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그리고 그걸 믿게 해 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유독 그 오래 전의 기억이 마치 어제처럼 떠올랐다. 정동진의 일출도, 기차 밖의 풍경도 모두 잊있지만... 아직도 그의 눈빛은 기억하고 있다. 진실로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 눈빛을, 적어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눈빛을..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과연 그때 어떤 눈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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