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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an 07. 2018

부다페스트와 첫사랑 2

잊어야만 기억되는 추억도 있다

그렇게 그의 꿈을 새해 며칠 안 남겨두고 부다페스트에서 꾼 나는 그게 어떤 일종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잠에 들기 전, 그가 아주 오래전에 나에게 보냈던 메일들을 읽었다. 


우리는 손편지가 사라져 가며 아날로그 감상을 잊는다고 한탄하지만, 그가 썼던 그 많은 손편지는 모두 여러 번의 이사 끝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반면, 그가 남겼던 메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읽을 수 있음을 난 그날 밤 감사했다. 


그의 메일을 읽어가며 살며시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다 부분 부분 내 가슴이 덜컹함을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믿으라는 거야... 그게 아니면 느껴지는 그대로를 믿는 것도 좋겠지.. 나도 내 마음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사람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자기에게 좀 더 솔직해지면 그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 거야.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재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는 게 더 중요한 거 같아’

그는 내가 그 후로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깨달을까 말까 한 사랑의 진실들을 어린 나이에 나이는 동갑이어도 학년이 달라 누나라고 부르던 첫 연인에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상처가 걱정되는 건 아니야'라고 말했다. 나는 늘 상처가 무서워 사랑이 시작되기 무섭게 끝을 향해 달려가곤 했는데 말이다. 


아마 그게 다였으면 지나간 추억 회상에서 그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메일을 계속 읽다 보니 그가 십오 년 전 새해를 며칠 앞두고 보냈던 메일의 한 구절은 나의 가슴 한 중앙을 관통했다. 


‘누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신년인사들 해야지.. 혹시 다시는 못 볼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깐.. 하긴.. 그럴수록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어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잊을 수도 있고, 기억 한편에 새겨 놀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내가 살면서 가장 슬픈 건 누군가의 기억으로부터 잊힐 수도 있다는 거야. 참 슬프잖아.. 누군가로부터 잊힌다는 건.. 항상 기억되고 싶은데’


난 그 순간 당장 그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말을 해야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난 널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그땐 정말 미안했다고. 그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십 년 넘게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건 지난 사랑에 대한 미련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잊었지만 잊혀지지 않은 것도 있더라고. 


마침 오래전 내가 유학중 잠깐 들어왔을 때 그가 보낸 메일에 그의 번호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번호를 등록하자 바로 그의 카톡이 떴다. 그는 나를 이미 오래전에 잊었을 수도 있고, 잊지 않았어도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답변을 안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다만 이게 지금의 내가 그때의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 행위 같았다. 나는 널 잊지 않았다는.. 


‘안녕 나야 잘 지내지? 아직도 기억하는지 모르겠네’


‘우연히 메일을 보다 연락처가 있어 잘 지내나 궁금해 연락했어’ 


놀랍게도 그에게 카톡을 보낸 지 삼분도 채 안돼 답변이 왔다. 


‘오랜만이네... 여전히 멋있게 잘 살고 있지?’ 


난 그런 그에게 솔직하게 대답했다. 멋있게 잘 사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어디서든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어’


그를 잊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고 연락했는데, 오히려 그가 나를 잊은 적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 그의 메일에서의 말처럼 나를 다시 보지는 못했어도 기억 한편에 새겨놨나는 것을..


그렇게 나는 그가 이제 서울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애아빠라는 걸, 그는 내가 파리에 살고 결혼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출산과 결혼을 축하하며 앞으로 잘 지내라는 형식적인 말과 함께 짧은 대화로 끝냈다. 난 끝끝내 그에게 ‘난 널 잊지 않았어’라든지 ‘미안했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기에 이미 우리의 삶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으며, 서로가 있는 거리의 시차만큼이나 그때와 지금의 우리는 달랐다. 


하지만 서로의 안부만 간략하게 묻는 짧은 대화가 끝나자 나는 그런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어도 됐고 안 하기를 결국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연락 줘서 고마워. 행복한 결혼 생활되기를 바래’라는 그의 마지막 말에 그는 이미 그런 나의 마음을 다 읽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난 그를, 그는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서로의 삶에서는 빠져나갔을 지라도 기억 한편에는 고이고이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난 그를 오랜 세월 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지만, 그는 잊혀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잊어야만 기억되는 추억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다시 보거나 연락할 일은 이젠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기억된다는 것, 그것만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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