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vu letar Mar 29. 2023

삶이 우리들에게 자몽을 내밀 때





 라떼?


출근하면 오전 열 시경 윤 이사가 묻는다. 모든 직원이 들을 수 있도록. 그러면 조용히 하나 둘 자리에서 손을 든다. 입사했을 땐 윤 이사의 라떼를 마시는 직원은 둘 뿐이었는데. 지금은 매일 다섯 명도 넘게 손을 든다. 그러면 윤 이사는 20분에서, 길게는 30분가량 직원들을 위한 라떼를 만드는 것이다.


라떼를 만드는 윤 이사


윤 이사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면 그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맛에 대한 조예만큼은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나는 윤 이사를 알기 전까지는 커피의 맛도, 콩의 종류도 몰랐다. 그는 아메리카노로 마실 때에는 중 배전으로 볶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권한다. 플로럴 향에 산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라떼를 만들 때에는 우유와 잘 어울리는 강 배전 케냐 AA를 사용한다.  

내가 집에서 마실 원두를 고르기 위해 그에게 커피를 물으면 고체레부터 시다모까지,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 그러면 햇빛에 그을린 손이 타나 커피열매를 따기 위해 바스락, 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입사 삼 개월 차에 회사를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을 돌려놓았던 게 윤 이사였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실수를 저지른 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도무지 회사에서 원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음속에 라떼향과 함께 상실감이 스미던 어느 오전, 언뜻 퇴사에 관한 생각을 내비쳤을 때 윤 이사가 말했다. "너무하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우리 회사는 특성상 늘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여기까지 오기도 했고. 엎어지면 다시 하면 돼요. 또 엎어지면 다시 또 하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섣불리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그 말을 듣고 눈이 시려, 아직도 그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윤 이사로 인해 자몽이라는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웬만해서는 과일을 먹지 않는다. 첫 번째로는 단음식을 싫어해서. 두 번째는 먹고 나면 음식물 쓰레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윤 이사가 나를 포함한 직원 몇을 데리고 생과일을 착즙 하는 카페에 갔다. 매장엔 커피 향이 아닌 과일향으로 가득했고, 주방엔 성인의 몸통만 한 착즙기가 놓여 있었다. 카페사장은 이미 윤 이사를 알고 있는 듯 눈으로 인사했고, 묻지도 않고 긴 도마 위에서 자몽들을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착즙기이미 모양새만으로 단단한 연륜이 느껴졌다. 무쇠로 만들어진 착즙콘에 자몽 반 개를 올리고 뚜껑이 연결된 손잡이를 내린다. 그러면 필터에 과육은 남고 연어색 과즙이 촤르륵. 주스탱크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반복한 것이 틀림없는, 카페사장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스무 개도 넘는 자몽의 살이 으깨졌다. 이 과정이 끝나기를 기다린 윤 이사가 "아시죠?" 하니 사장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얼음 하나도 첨가하지 않은 순도 백 프로의 자몽즙에 빨대를 꽂아 우리에게 내밀었다.


 으.


나는 자몽주스를 한 모금 넘기고 서서, 뭔가를 잘못 씹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윤 이사가 내 표정을 보더니 왜. 왜, 너무 맛있지 않아요? 하고 크게 웃었다.




벌써 벚꽃이 많이 피었다. 나는 산호색 주스를 들고 그 아래에 앉았다. 꽃은 하얗고 하늘은 파랗다. 나는 요즘에도 종종 회사에서 뛰쳐나가는 상상을 한다.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누군가의 주문들, 상식에서 어긋나는 말투와 웃음, 가래 낀 목소리. 그런 것들에 어쩔 수 없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미간이 구겨진다.


나는 찰랑이는 자몽주스를 들고, 어쩐지 삶이 자몽의 맛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생에서 처음 마주했던 쓰디쓴 순간들, 눈물이 날 때 어금니 사이에서 배어 나오는 시큼하고 떫은  맛을. 시간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겼을 때, 마침내. 긴 어둠 끝에서 빛을 만난 해방감. 자몽이 주는 잠깐의 해갈이 꼭 그것을 닮았다.


현재의 나는 자몽주스 한 모금을 넘기고 이야 하고 감탄한다. 요즘은 윤 이사 없이도 가끔 다른 직원들과, 혹은 혼자 카페로 가서 예의 사장의 잡음 없는 동작을 본다. 그리고 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순도 백 프로의 자몽을 받아 들고 마신다. 여전히 나는 잠깐 찌푸리지만. 그러나 곧 미소가 맺히고, 투명한 잔에 담긴 살몬 빛깔의 음료를 들어 햇빛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grapefruits


매거진의 이전글 육개장 사발면과 행복한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