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5
생중계 중이었다. 시상식 현장이었다. 나는 영상팀 부스에서 프롬프터를 넘겼다. 발표자는 프롬프터 대신 손에 든 큐카드를 읽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행사였다. 동료는 너무 긴장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긴장한 티가 났을까봐 신경이 쓰였다. 원래 작은 일에도 크게 불안해하는 편이었다. 리허설 내내 나는 영상팀 부스에서 단상 위를 오갔다. 프롬프터가 제대로 출력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희한하게 프롬프터의 화면은 매번 꺼져 있었다. 기술팀 감독은 계속 프롬프터의 전원을 켜며 이상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순간이 되어 큰 실수를 저지르는 내 모습이 눈앞을 맴돌았다.
애인은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한참 못 이르러 이미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고 했다. 아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는지 내게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왔다. 실은 그때 내 마음도 편하지 못했다. 본 행사를 몇 십 분 남기고 정신없이 리허설을 진행 중이었다. 식순을 따라가기 위해 신경이 곤두섰다. 다만 애인의 메시지에는 늦지 않게 답을 보내고 싶었다.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일하는 회사의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이 떠올랐다. 한 시간을 일찍 도착한 나는 마침 근처에 있던 친구 집에 들렸다.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막상 면접은 별 탈 없이 끝이 났다. 어떤 질문이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돌이켜보니 후회되는 말들이 떠올랐다. 정작 합격 통보는 당일이었다. 덕분에 조마조마한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 하면 일손과 일의 단계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더 적은 사람이 더 많은 일감을 더 빠른 방법으로 마치기 위해서다. 간혹 그탓에 오히려 작은 작업에도 사공이 많아질 때가 있다. 나는 되는대로 일하는 걸 더 좋아했다. 조금 늦는다고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니니까. 괜히 일터에서조차 쿨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동료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태도가 아닐지 모른다. 나는 자존심이 강한 편이다.
다행히 시상식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현장에서 동료들은 누군가 실수를 하면 농담으로 웃어 넘겼고 맡은 일을 안정적으로 수행했을 때는 공연히 칭찬했다. 피드백을 주고 받는 것은 건강한 분위기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에게 서로가 평가 대상이라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어떤 이유에서든 제 자신이 대상화되는 일은 피곤하다. 아무 비교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터라는 게 과연 있을까. 행사장을 정리하며 애인이 떠올랐다. 면접 결과가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보다 연배가 스무살쯤 더 많은 동료와 길이 겹쳤다.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집 주변에서 찾은 맛집에 관한 이야기였다. 며칠 전에 나는 식당 앞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모두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아마 방송팀 같았다. 식당 안에는 연예인들이 앉아 있었다. 나만 알던 맛집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조만간 외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줄이 길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 얼른 가보세요. 내가 동료에게 말했다. 그러고 싶은데 아내가 술을 안 마셔서. 밖에서 고기집을 가기는 좀 그래. 이윽고 동료가 말했다. 집에 가면 애인이 따뜻한 밥을 지어 놓는 건가?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요. 다시 내가 물었다. 그럼 아내분이랑 식사는 어떻게 해드세요? 내가 일곱쯤 하면 아내가 셋쯤 하는 것 같아. 아니, 어쩌다가. 내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동료의 아내는 오랫동안 일을 쉬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는데, 아내는 요리를 할 때 신중한 성격이기도 하고, 내가 손이 빠르거든. 같이 살다보니 그냥 자기 역할이 있는 거지 싶더라고.
면접을 이상하게 보고 온 것일까봐 애인은 걱정이 많았다. 그럴 일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기로 애인은 말솜씨가 좋았다. 결과는 이틀에서 삼일 뒤쯤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 하루이틀이 무척 길어질 것 같았다. 만약 떨어지면 어떡할까. 애인이 물었고 나는 고민했다. 애인이 면접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래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애인은 다시 면접을 보거나 혹은 면접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서로에게 대견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그저 프롬프터의 화면을 넘기고 작은 회사에 면접을 다녀온 일인데. 가냘픈 우리는 참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한 집에서 만났다. 애인과 나는 식탁에 올려둔 딱딱한 빵을 나눠 먹으며 저녁을 때웠다. 가끔은 식은 빵이 더 맛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